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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잇] 겁쟁이는 여러 번 죽는다

김창규│입사 21년 차 직장인. 실제 경험을 녹여낸 회사 보직자 애환을 연재 중



 운중한 (運中閑) 3편
'운전 중 떠오르는 한가로운 생각'이라는 뜻. 운전 중 발생하는 여러 에피소드를 회사 생활과 엮었다.



문제가 생겼을 때, 
여럿이 모여 의논을 하면 좋은 수가 나오곤 한다. 그게 회의가 필요한 이유이다. 하지만 너무 난감한 일에 마주치면 참석자들이 이런저런 해결책을 말하다가도 회의 주관자가 "그럼 그렇게 할까요?"라는 물음에 꽁무니를 빼곤 한다. 나중에 책임을 져야 할 말은 안 하는 게 상책이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 어쩔 수 없이 회의 주관자가 결정을 내려야 하는데 지금 이 회의도 딱 그런 상황이다. 나는 관계자들에게 질문을 하며 다시 상황을 정리했다.
 
회사 회의 사무실 (사진=픽사베이)

- 그러니까 그 대리점장이 규정을 어긴 것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안하면서 수익이 나지 않으니 지원을 더 해 달라는 거예요?

= 그렇습니다.

- 그런데 여러 경우를 고려할 때 그 대리점에 또 지원을 해 주는 것은 옳지 않다는 거죠?

= 그렇습니다.

- 지원을 안해주면 무슨 일이 발생할까요?

= 당장 대리점 그만두겠다고 할 것입니다. 자기가 포기하면 대체할 사람이 없어 지점이 곤란해 질 것을 알고 있으니까요.

- 일종의 협박이네요. 음. 어쨌든 그럼 또 요구하는 대로 해 줄 수밖에 없는 거잖아요?

= 하지만 그렇게 하면 다른 대리점과의 형평성 문제가 발생합니다. 게다가 이번 요구는 본사의 승인을 받아야 하는데 그것은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 그것도 그렇죠. 게다가 최근 본사에서 기준 미달인 대리점 다 잘라버린다고 했으니…… 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다! 
에이, 그럼 계약해지 합시다.



그러자 침묵이 회의실을 지배했다. 조금 뒤 해당 지역 책임자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달래서 하는 게 좋겠다"라며 그 침묵을 깼다. 자칫 대체자를 신속히 구하지 못하거나 아예 못 구하면 당장 우리만 머리 아파 진다는 것. 본사의 책임 추궁, 소비자들의 클레임 폭주 및 없는 인원에 불필요한 업무 폭증 등 감당 못할 일들이 쓰나미처럼 밀려온다는 거다.

사실 맞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자 나 역시 '회사생활에 있어서 나한테는 지금이 중요한 시기인데 그런 위험을 감내할 필요가 있나?' 라는 의구심이 들었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그냥 갈까? 하지만 이건 아니긴 아닌데……' 결국 나는 결론을 내지 못했다.

난 이렇게 얼버무리 듯 회의를 끝내고 사무실로 복귀하기 위해 차를 탔다. 그러니 내 마음이 좋을 리가 없다. 운전 중에도 '그 대리점장 그만두게 할까 아니면 대충 요구조건 들어주고 그냥 가야 하나?'를 계속 고민고민 했다. 머리에 김이 나는 것 같았다. 때마침 고속도로 휴게소가 보여 들어갔다. 커피 한 잔을 사서 바깥에 설치되어 있는 의자에 앉아 커피향을 맡으며 머리를 식혔다. 하지만 이내 또 마음이 심란해졌다. '용기를 냈는데 용기가 없군. 그냥 타협을 할까' 이런 생각이 나를 무겁게 지배했기 때문이다.
 
밀어부칠까, 아니면 적당히 타협할까. 머리가 복잡해졌다.

우울한 마음으로 차 시동을 걸고 다시 고속도로에 들어섰다. 주행선에서 추월선으로 넘어와 속도를 내고 있는데 저 앞에 안타까운 광경이 보였다. 주행선에서 달리는 어떤 차가 자기 앞에서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는 화물차를 비켜가기 위해 깜박이를 넣고 추월선으로 차선을 변경하려고 했다. 그런데 추월선에서 달리는 차들이 그 차에게 넉넉한 공간을 양보해 주지 않았다. 그러자 그 차는 주춤주춤 거릴 뿐 결국은 차선을 바꾸지 못하고 그냥 앞의 차와 발맞추어 거북이 운행을 하는 것 아닌가. 내가 보기에 끼어들 수 있는 공간이 충분히 있는데 못한 것을 보니 아마도 성격상 소심한 운전자인 것 같았다. (혹은 완전 초보 거나)   어쨌든 나는 그 차를 멀찍이 뒤로 보내면서 "대범해야지. 저렇게 주저 주저하다가는 계속 뒤쳐져 갈 수밖에"라고 중얼거렸다.

이 때 영국 버진 그룹의 괴짜 회장 리처드 브랜드가 한 말이 생각났다.

용감한 사람이 영원히 사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조심스러운 사람은 아예 살아 보지도 못한다.


이 말에서 "조심스러운 사람은 아예 살아 보지도 못한다" 라는 이 문구가 저 운전자를 가리키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나는? 막무가내 대리점장 교체에 겁 먹은 나도 저 운전자처럼 '아예 살아 보지도 못할 사람' 아닌가.

그러자 꼬리를 물고 셰익스피어의 명언도 떠올랐다.

겁쟁이가 죽는 건 여러 번이지만,
용기 있는 자가 죽는 건 오직 한 번뿐이다.


'겁쟁이는 여러 번 죽는다'라는 문장이 저 운전자와 나를 지목하는 것 같았다. 속이 쓰렸다. (그렇다고 운전을 조심성 없이 과감하게 하자는 의미는 절대 아니다. 착각 말자.)

사무실에 거의 도착할 즈음 조금 전 회의에 참석했던 A지점장에게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뭐라고? 그것만 해 주면 그냥 대리점 하겠다고 한다고?" 속으로 '다행이다' 싶었다. 그가 원하는 것, 좀 거시기 하지만 본사에 보고할 필요 없이 내 권한으로 해 줄 수 있다. 그러면 이 골치 아픈 상황은 이걸로 끝이다. 그 순간 방금 전 봤던, 선을 넘어야 하는데 선을 넘지 못해 제대로 살지 못하고 여러 번 죽고 있었던 차 운전자가 떠올랐다.

'여기서 내가 이 제안을 받아들여 또 땜질 처방을 하면 지금처럼 앞으로도 계속 그 대리점장에게 끌려 다니게 되어 있다. 그러면 나는 그 주저주저하던 차 운전자처럼 아예 (제대로) 살아 보지도 못하면서 향후에도 (그로 인해) 여러 번 죽게 된다.'

 
셰익스피어가 그랬다, 겁쟁이는 여러 번 죽는다고...

나는 숨을 한번 크게 내쉬며 지점장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 한번 죽고 맙시다.

= 예? 무슨 말씀인지?

- 그 분과 계약해지 하고 대체자를 찾아 보자고요. 어려움이 있다고 계속 타협만 하면 당신이나 나나 지금처럼 앞으로도 계속 양보만 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도 한 번 제대로 살아야죠.


말은 쉽고 멋있었는데 실제로는 한 번 죽고 제대로 살기가 정말 힘들었다. 다시 그 상황이 온다면 그와 같은 결정을 하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 운중한 (運中閑) 1편 - 선의 베풀었더니, 선을 넘네?
▶ 운중한 (運中閑) 2편 - 바라기만 하는 그 사람, 너무 얄밉잖아요
▶ 운중한 (運中閑) 3편 - 겁쟁이는 여러 번 죽는다
▶ 운중한 (運中閑) 4편 - "나 없으면 회사 안 돌아가" 네, 착각입니다 

 
 
- 4편(마지막)에 계속

#인-잇 #인잇 #김창규 #결국꼰대
인잇 시즌 2 엔드
         
인잇 사람과 생각을 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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