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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잇] 선의 베풀었더니, 선을 넘네?

김창규│입사 21년 차 직장인. 실제 경험을 녹여낸 회사 보직자 애환을 연재 중



 운중한 (運中閑) 1편
'운전 중 떠오르는 한가로운 생각'이라는 뜻. 운전 중 발생하는 여러 에피소드를 회사 생활과 엮었다.




   운전을 싫어한다. 하지만 인생을 살면서 하고 싶은 것만 할 순 없다. 뭐든지 당장은 피해도 언젠가는 그전에 하지 않았던 몫까지 한꺼번에 해야한다. 지금 내 상황도 그렇다. 몇해 전 지방 지사장으로 발령이 나 서울에서 지방으로 상당한 거리를 자동차로 출퇴근 하고 있으니 말이다.

 오전 6시, 차를 탔다. 이른 아침이라 막히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내 속상함이 찾아왔다. 신호등이 나의 길을 자주 막아섰기 때문이리라. 또 왜 그렇게 대기시간은 긴지. 이런, 또 저기 신호등이 빨간색으로 바뀌려고 한다. 엑셀 페달을 밝았다. 다행히 통과. 하하하, 속으로 좋아하는데 찜찜한 기분이 들었다. 신호위반 카메라에 찍힌 것 같다. 어이구…

 고속도로에 들어섰다. 신나게 달리고 있는데 갑자기 앞 차의 경고등이 깜박깜박 했다. 사고가 났다. 모두 다 거북이 운행을 해야 했지만 앞 차는 지나칠 정도로 너무 느렸다. 차를 약간 왼쪽으로 움직여 전방을 보니 차간 거리가 상당함에도 앞의 차가 안 가고 있었다. 나는 짜증을 담아서 여러 차례 경적을 울려댔다. 그 차가 화난 듯이 멈추었고 운전자가 내리려는 것 같았다. 순간 난 긴장하고 만약의 사태에 대비했다. 다행이랄까? 그는 내리지 않고 그냥 갔다. 난 비웃었지만 만약 싸움이 났으면 어땠을까, 상상만 해도 등골이 오싹했다.

난 운전이 싫어...
 사고 구간에서 벗어나자 다시 정상 속도로 달릴 수 있었다. 한참을 이렇게 평화롭게 가다 보니 잡생각이 머리를 지배했다. 그러다 오늘 아침 대리점장과 면담해야 할 일이 생각났다. 운전대를 잡은 손에 힘이 빡 들어갔고 '어휴' 라는 짜증 섞인 한숨이 나왔다. 이 대리점장, 처음과는 달리 지금은 기질이 너무 많아 졌다. '이번에는 무슨 말도 안되는 요구를 할까? 그러면 나는 어떻게 대응을 하지'라는 고민을 하다 보니 뒷목이 뻑뻑해졌다.

 몇 시쯤일까? 시계를 보았다. 어! 아까 사고구간에서 정체가 너무 심했는지 잘못하면 지각이다. 엑셀 페달을 밟았고 속도계 바늘이 쭉쭉 올라갔다. 그러다 앞차가 갑자기 멈춰 서는 바람에 브레이크를 급하게 밟았다. 하마터면 앞 차와 부딪힐 뻔 했다. 그 뒤 과도하게 속도를 올리지 않았다.

 톨게이트를 빠져 나와 일반 도로를 탔다. 아이구, 이제는 이 곳도 출근시간이라서 그런지 도로가 차로 가득 찼다. 가다 서다를 한참동안 반복할 수밖에 없었는데 또 앞 차가 너무나도 느긋하게 가고 있었다. 경고음을 빵 내려고 주먹으로 운전대를 치려고 했다. 하지만 결국 그러지 않았다.

 왜 나는 경적을 울리지 않았을까? 그리고 아까 왜 고속도로에서 속도를 줄였을까? 당연한 이유지만 전자는 잘못하면 큰 다툼이 일어날 수도 있는 두려움 때문이었고 후자는 벌금이 무서워서 였다. 살벌해 질 수 있는 다툼과 제법 큰 금액의 벌금은, 나에게 있어서 긴고아(緊箍兒)였다.

 긴고아는 손오공이 이마에 두르고 있는 머리테이다. 여기서 긴(緊)은 조인다, 고(箍)는 둥근 테를 의미하며 아(兒)는 일종의 애칭이다. 이 긴고아는 천방지축 손오공의 고집과 난폭함을 금하게 하고 삼장법사의 말에 순종하게 하는 역할을 한다. 어떻게? 알다시피 삼장법사가 주문을 외우면 이 고리가 오그라들어 손오공의 머리를 절구통 허리 모양으로 찌부러트려 참을 수 없는 고통을 주는 방식이다.

손오공이 쓰던 긴고아, 내 머리에도 씌워지다니...하아... (사진은 영화 '몽키킹2')
 막가파가 되어버린 대리점장 얼굴이 떠올랐다. 그의 긴고아는 뭘까? 생각하다가 '아이구! 내가 이 점장을 그렇게 만들었구나' 라는 자책이 들었다. 사연은 이렇다. 내가 여기 지사장으로 부임된 초창기에 이 대리점장에게 상당한 혜택(?)을 주었다. 다소 잘못을 해도 눈을 감아주었고 그의 요청사항을 대부분 받아들였다. 왜? 그의 대리점은 여러 정황상 과거 회사의 잘못된 정책, 그리고 지금은 사직한 옛 직원의 업무태만으로 한동안 사업적 손해를 많이 보았다. 그 뒤 나는 회사를 대신해서 그에게 미안함을 표하고 어느 정도는 보상을 해 줘야 한다는 의무감을 갖게 된 것이다. 그래서 선의로 그를 대한다는 것이 그만 그가 선을 넘게 만든 원인인 된 셈이다.

 하지만 어찌하랴, 이미 엎질러진 물인 것을. 대부분의 사람들은 부당한 대우를 받았던 약자에게 배려와 동정, 편의를 제공할 것이다. 그것은 잘못이 아니다. 그런데 문제는 선한 의도로 상대방에게 양보하다가 현재 나와 대리점장과의 관계가 불편해진 것처럼, 그렇게 갑과 을이 바뀐 경우가 제법 많다는 사실이다. 제 도끼로 제 발등을 찍은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그 사람, 선을 넘네" 하지만 어찌하랴, 내 발등 내가 찍은 것을! (사진은 영화 '기생충')
 일이 더 꼬이기 전에 제자리를 찾아야겠다. 그러려면 우선 그 대리점장에게 긴고아를 씌워야 한다. 그런데 이건 치사한 행동 아닌가? 어쨌든 상대방의 약점을 잡아 협박하는 것이니까. 언뜻 생각하면 그런 것 같기도 해 사색을 더 이어갔다. 악한 의도를 가진 사람이 긴고아를 활용하는 것은 비열한 행위이지만 보통의 선한 사람들이 그것을 사용하는 것은 오히려 자신을 지키고, 관계를 정상화하고, 사회의 옮음을 지키는 역할을 할 수 있다. 이를 증명하는 연구결과도 있다. 로버트 액설로드의 '협력의 진화'라는 책의 한 대목을 보자.

 <팃포탯(Tit for tat)>은 게임 이론에서 반복되는, '죄수의 딜레마'를 실현화 한 강력한 전략이기도 하다. … 이 전략을 사용하는 경기자는 처음에는 협력하고, 그 이후에는 상대의 바로 전 전략에 반응한다. 만약 상대가 이전에 협력을 했다면, 경기자는 협력하고, 만약 배반했다면, 경기자는 배반할 것이다. … 팃포탯 전략은 몇번의 토너먼트에서 컴퓨터 과학자, 경제학자나 심리학자들의 팀이 만든 (보통 훨씬 더 복잡한) 전략들보다 우수하였다. … 팃포탯 전략이 최선의 전략이라고 믿고 있다.>

 상대방과의 협력을 전제로 했지만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의 전략이 결국 최선이라는 거다. 이보다 훨씬 전에 공자도 말했다. 원한은 곧음(정의)으로 갚고 덕은 덕으로 갚아야 한다고 말이다.

 만약 삼장법사가 긴고아 없이 부처님과 같은 마음으로만 손오공을 대했다면 서유기의 결론은 뭐가 되었을까? 최악의 경우 소설이 시작되고 얼마 되지 않아 "삼장이 손오공에게 죽음을 당했다." 로 끝났을 것이다. 긴고아가 없는 현실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운전대를 잡은 채 나는 대리점장의 지나친 요구에 대응해 부질없는 동정심을 내려놓고 냉정한 마음을 표출할 용기를 끌어내어 본다.


▶ 운중한 (運中閑) 1편 - 선의 베풀었더니, 선을 넘네?
▶ 운중한 (運中閑) 2편 - 바라기만 하는 그 사람, 너무 얄밉잖아요
▶ 운중한 (運中閑) 3편 - 겁쟁이는 여러 번 죽는다
▶ 운중한 (運中閑) 4편 - "나 없으면 회사 안 돌아가" 네, 착각입니다 

 
 
- 2편에 계속
 
#인-잇 #인잇 #김창규 #운중한
인잇 시즌 2 엔드


                                     
인잇 사람과 생각을 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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