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 전 대검찰청을 출입하는 선배로부터 책 한권을 선물 받았습니다. ‘도쿄지검 특수부의 붕괴’라는 책입니다. 일본 법조 출입 기자인 이시즈마겐지가 쓴 일본 검찰(특수부 중심)의 붕괴사입니다. 저자는 일본 검찰의 붕괴 원인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제공받은 정보에 배후가 무언지 꿰뚫어 보는 인재가 없다. 배후가 있는 정보를 덥석 물어 사건을 짜 맞추고만 있다. 일그러진 증거를 다량으로 수집해 사실을 왜곡 시킨다. 시나리오대로 전개되지 않으면 체면을 유지하기 위해 억지수사를 계속 한다”
더 많은 내용이 있었지만, 오래 전이라 기억나는 건 이정도입니다. 4년 전 우리 검찰은 이 책에 감동을 받았는지 만나는 검사마다 한 동안 책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런데 책을 선물 받고 한 달도 채 안 돼서, 일본에선 사상 초유의 일이 일어났습니다. 오사카지검 특수부가 '증거를 조작한 사실'이 '변호인에 의해 법정'에서 드러났고, 현직 검사들이 줄줄이 구속됐습니다. 이 사건으로 일본 검찰은 날개 없이 추락했습니다. 일본 기자가 이런 사태를 예견하고 책을 쓰진 않았겠지만, 일본 검찰은 저자가 밝힌 대로 ‘아마추어 수사집단’이 돼버렸고, 화려한 시기를 뒤로 하고 붕괴해버렸습니다.
4년 뒤인 지난 14일 우리나라에서 비슷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이 간첩 혐의로 기소된 서울시 공무원 유모씨 사건에서 증거 조작을 폭로했습니다. 법정에서 검찰이 제출한 증거 자료의 모순점을 발견해 위조 사실을 밝혀낸 겁니다. 폭로 기자 회견을 보고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일본 검찰의 붕괴사였습니다. 자존심 강하고 똑똑한 관료로 구성된 우리 검찰은 이웃국가 검찰의 붕괴에서 이미 교훈을 얻었을 것이라고 여겼지만, 사건 발생 열흘 동안 보여준 검찰의 모습은 그게 아니었습니다.
#서울시 공무원 간첩사건 증거조작의 개요
간첩 사건 증거조작의 개요는 이렇습니다. 1심 재판부는 객관적 사실에 배치된다는 이유로 유씨의 간첩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검찰은 항소심에서 간첩 혐의를 입증하겠다며 유씨의 출입국 기록을 법원에 제출했습니다. 검찰이 간첩 행위를 했다고 공소사실에 적시한 2006년 5월 27일 이후 유씨가 북한에 넘어간 기록이 적힌 문서였습니다. 당시 검찰은 중국 공안 당국으로부터 받은 공신력 있는 문서라며 법원에 증거로 제출했고, 재판부는 이를 채택했습니다. 그런데 변호인이 중국으로부터 발급 받은 출입국 기록엔 유씨가 당시 북한으로 넘어간 기록이 없었습니다. 검찰과 변호인은 지난한 공방을 벌였고, 재판부는 검찰과 변호인의 기록 중 누구 것이 맞는지 중국 정부에 물어보자며 사실조회를 보냅니다. 그러자 중국 정부는 답변서를 보냅니다.
‘중화인민공화국 주대한민국 대사관 영사부’가 발신처로 찍힌 회신엔 이렇게 명시돼 있습니다. “변호인이 제출한 출입국 기록과 정황 설명서 내용은 모두 사실이고, 합법적 정식 서류다. 검찰이 제출한 출입국 기록 등 3건은 모두 위조된 것으로, 검찰이 제출한 위조 공문은 중국 기관의 공문과 도장을 위조한 혐의를 받게 돼 중국에서 조사를 진행 하겠다”
검찰이 유씨의 공소사실을 입증하겠다고 제출한 자료 일체가 내용도 틀리고, 위조됐다는 말입니다.

#증거조작을 대하는 검찰의 자세
의혹 제기 당일인 지난 14일 검찰은 밤늦게 위조로 보기 어렵다는 취지의 대응을 했습니다. 빈약한 설명에설득력 역시 낮았습니다. 이틀 뒤인 지난 16일 일요일 오후 2시 검찰은 두 시간 넘게 관련 브리핑을 했습니다. 이 사건을 지휘하는 서울중앙지검 2차장이 직접 나선 장시간의 브리핑이었습니다. "증거자료 모두 정식 외교 절차를 통했고, 일부 자료는 국정원의 협조를 통해 받았지만 이 역시 문제될 것이 없고 위조는 없었다"는 게 골자였습니다. 증거의 진위를 두고 검찰과 변호인의 공방을 벌이자 재판부가 소모적인 다툼은 그만하고, 문서 발급자인 중국 정부로부터 어느 쪽 자료가 진짜인지 확인해보자며 사실조회를 보냈는데, 그 결과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거였습니다.
기자들은 당연히 최초 관련 자료를 수집한 국정원의 조작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질의를 했습니다. 당시 검찰의 대답은 이랬습니다. "자국의 국가기관에 대해서 폄하하는 태도는 적절치 않다고 생각한다." 팩트를 확인하는 검찰이 애국심에 호소를 한 건데, 이런 답변은 검찰이 지닌 이번 사건의 인식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누구나 추론 가능한 출처의 신빙성 여부, 그리고 합리적 의심인 조작 가능성 질문에 대해 2차장 검사는 심지어 "국정원이 어떻게 구했는지는 우리가 왈가왈부할 사안이 아니다. 미진한 부분은 국정원으로부터 협조를 얻어 확인하겠다"고 말합니다. 국정원에 대한 높은 신뢰도 때문인지, 아니면 함께 수사를 한 동지애의 발로인지 한 배를 타겠다고 공식 선언했습니다.
그러나 며칠 뒤 외교부 장관 등 외교 당국은 정식 외교 절차를 통해 검찰이 받은 증거는 세 건 중 한 건 뿐이라고 밝혔습니다. 그리고 3건 모두 국정원에서 선양한국영사관으로 파견한 이 모 영사가 개입한 것이 드러났습니다. 게다가 영사가 작성한 자료가 공문서가 아닌 개인문서라고 밝힌데 이어 제출된 증거의 원본이 된 자료 출처에 대해 외교부는 알 길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위기 자초한 검찰…원인은 밀행성을 빙자한 불투명성
검찰은 지난 16일 브리핑이 있은 후 분위기가 반전되지 않고 도리어 심각해지자 이틀 뒤인 지난 18일 공안 검사를 배제한 진상조사팀을 꾸립니다. 전보다 진전된 모습이었지만, 수사가 아닌 조사에 방점을 둔 '조사팀'으로 범죄 혐의점인 '위조' 는 아직 공식적으론 인정하기 않겠다는 겁니다.
'조사'든 '수사'든 단어의 형식적 의미에 관계없이, 진상조사팀이 이번 사건을 사문서위조 혐의로 사건번호 '2014수제72호'를 달고 시작한 이상 수사로 전환되는 건 기정사실화됐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여전히 검찰이 이번 사건의 심각성을 인식하지 못하는 데 있습니다. 최초 브리핑에서 보여준 안일한 태도가 진상조사팀 구성 이후에도 곳곳에서 감지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번 증거조작 의혹이 재차 사실로 확인될 경우 검찰은 주범이든, 공범이든, 종범이든, 과실범이든 그 신분에 관계없이 조직 전체가 뿌리째 흔들리게 됩니다. 수뇌부의 일괄 사퇴로 해결되는 것을 넘어서 조직 전체의 명운이 걸린 사안으로, 국가의 품격과 신뢰도와 직결됩니다.
그동안 검찰은 밀행성을 강조하며 수사 과정에 일어난 일을 당연하듯 숨겼습니다. 수사 성패를 위해 필요한 범위 내에서 제한적으로 이뤄져야할 밀행성은 투명치 못한 수사로 변질됐고, 외부의 감시와 검증을 거치지 않은 증거수집이 사각지대에서 이뤄지면서 이번 사태가 발생한 겁니다. 상처가 곪아 터지기 직전이 되도 검찰이 숨기면 알 길이 없고, 터진 뒤에야 뒷수습을 할 수 밖에 없는 구조였습니다.
그런데도 검찰은 증거조작 진상 규명에서도 이 사태의 원인으로 꼽히는 '오염된 밀행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국민들 앞에 모든 걸 드러내고 매일 상황을 설명해도 신뢰를 얻을까 말까한데 평소 수사 관행을 계속 고수하겠다는 겁니다.
검찰은 진상규명의 주체이기 이전에 증거조작 의혹의 핵심 당사자입니다. 이런 신분을 망각했는지 진상규명팀장은 거짓말로 언론의 감시 기능을 마비시킨 뒤, 조사를 위한 불가피한 행동이었다고 해명합니다. 검찰 수뇌부도 마찬가지 말을 하고 있습니다. 조작 여부를 확인하기 위한 문서 감정을 진행한다고 밝히면서도 정작 어떤 문서를 감정하는지는 말 할 수 없다는 게 현재 검찰의 모습입니다.

#증거조작 본질 왜곡에 함께 춤추는 검찰
이번 사건으로 확실하게 확인된 게 있습니다. 우리사회 보수-진보 이념의 허구성과 편리성입니다. 어찌된 일인지 이번 사건에 대해 문제 제기를 하는 건 진보 진영, 사건 확대를 막고 있는 건 보수 진영이 돼 버렸습니다.
증거조작은 정쟁의 대상이 아닙니다. 인권의 문제이고, 형사사법의 근간인 증거재판주의를 뿌리 째 흔드는 중대한 문제입니다. 그동안 북한과 북한 이탈주민 인권에 관심을 기울이며 먼저 문제제기를 한 건 보수 진영이었습니다. 일말의 타협도 없다며 법과 원칙을 신봉하며 법질서 확립을 강조한 쪽도 보수였습니다. 그런데도 이번 문제에 있어선 그렇지 않았습니다.
왜 그럴까. 민변 소속 한 변호사는 "의혹의 중심에 국정원이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합니다. 증거 조작에 직접 관여 여부가 확인되진 않았지만, 국정원이 의혹의 핵심이 되면서 보수진영은 이번 문제를 이념적으로 접근하기 시작했다는 겁니다. 한 검사는 "보수 정권이 들어선 뒤부터 국정원은 보수 진영의 수호자이자 기준이 됐다"며 "국정원이 무너지면 보수 역시 붕괴된다는 인식하에 이번 사건을 이념적 갈등으로 확대시키고 정쟁의 대상으로 삼아 진상 규명을 방해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이 사건 실체를 확인하면 국정원이 목숨을 걸고 쌓아둔 정보 인프라, 이른바 휴민트가 무너져 내리고 결국 국익 역시 훼손된다는 주장도 같은 맥락에서 나왔다는 겁니다.
검찰도 이런 주장에 공감을 표하며 국익 차원에서 접근해봐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이유에서인지 의혹의 핵심인 국정원에 대해 이렇다 할 액션을 취하고 있지 않습니다. 몇 년 전 CCTV에 얼핏 나온 봉투를 보고 야당 후보의 사무실을 압수수색(나중에 돈 봉투가 아닌 초대장 봉투로 밝혀져 무혐의 처분)하는 등 무수한 형사사건에서 보여준 검찰의 속전속결 자세에 비춰볼 때, 이미 검찰은 중국 정부의 회신과 관련자 증언을 근거로 압수수색을 통한 자료 확보를 충분히 하고도 남았습니다. 그런데도 일주일이 지날 동안 검찰은 국정원이 자료를 직접 넘겨주길 기다리고 있습니다. 지난해 국정원 대선 개입 의혹 사건으로 생긴 트라우마 때문인지, 세련된 조사를 위한 건지, 아니면 국익을 위해서인지는 불확실합니다.
진상규명이 정말 휴민트를 붕괴시키고 국익을 훼손하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이런 주장은 이념의 허구성에 근거해 본질을 왜곡시키는 말입니다. 만약 이번 조작 사건에 국정원이 개입한 것이 사실이라면, 이미 휴민트에 금이 가버린 게 원인이 돼서입니다. 또 신뢰성 없는 휴민트로 향후 발생 가능한 더 큰 범죄와 사회적 혼란을 막기 위해서라도, 그리고 국익을 위해서라도 철저한 진상규명으로 관련자를 색출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검찰은 사실관계의 문제, 인권의 문제, 형사사법의 문제인 이번 사건을 이념과 정쟁의 대상으로 삼아 본질을 흐리게 만드는 주장에 흔들려서도 안 됩니다.
변호인 측은 검찰은 더 이상 조작이 있었는지 여부에 시간을 낭비할 게 아니라, 누가 왜 이런 조작을 했는지 규명하는데 전력을 다해야 한다고 촉구하고 있습니다. 일각에선 진보성향의 서울시장을 흔들기 위한 조작이라는 추정까지 내놓고 있습니다. 뚜렷한 증거는 없지만 이런 추정이 사실로 드러난다면 심각한 문제입니다. 그게 아니라면 더 큰 문제입니다. 타성에 젖은 채 그동안 관행대로 해오다가 생긴 조작으로 볼 수 있어 과거 이뤄진 대공사건 전체가 의심을 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 사건 발생 이후 검찰이 보여준 행태를 볼 때 진상조사 결과에 대해 국민이 납득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지만, 지금이라도 과정과 결과 모두가 투명한 진상조사는 이뤄져야 합니다.
일본 배우 키무라타쿠야가 검사로 나온 영화 <히어로>를 보면, 한 변호사가 자신이 검사를 그만 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누명을 씌웠고, 재판에 최선을 다했는지 자신할 수 없어서 그만뒀다". 그리고 앞서 말한 '도쿄지검 특수부의 붕괴'의 저자는 "검사는 수사가 정치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를 고민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증거를 찾아서, 그 증거에 따라 수사를 해나가면 된다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