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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읽을수록 답답한 판결문

김용판 무죄 판결을 보며

[취재파일] 읽을수록 답답한 판결문
■ 김용판은 어떻게 재판에 넘겨졌나?

대선을 8일 앞둔 2012년 12월 11일 저녁. 국정원 직원이 인터넷으로 불법 선거운동을 한다는 신고가 접수됐습니다. 역삼동 오피스텔에 사람들이 몰려들었죠. 국정원 직원 김하영 씨는 문을 잠그고 나오지 않았습니다. 무려 이틀이나. 새누리당은 민주당이 국정원 여직원을 감금했다며 고발했습니다. 12월 13일, 김하영 씨가 방에 있던 컴퓨터 2대를 자진해 제출했습니다. 불법 선거운동을 한 적 없으니, 가져가서 확인해 보라면서.(이렇게 제출하는 걸 임의제출, 제출하는 물건을 임의제출물 이라 합니다)

관할인 수서경찰서는 컴퓨터를 서울청 분석설로 보냈습니다. 국정원 직원이 인터넷으로 선거운동을 했는지 흔적을 찾기 위해서였죠. 흔적이 발견되면 새누리당이, 없으면 민주당이 타격을 입을 상황이었습니다. 밤샘 분석이 이뤄졌지요. 그리고 대선 사흘 전인 12월 16일, 대선 후보 토론이 끝나자 수서경찰서가 보도자료를 배포했습니다. <국정원 직원 불법선거 운동 혐의사건 중간수사 결과. 디지털 증거분석 결과, 문재인 박근혜 후보에 대한 지지, 비방 댓글 발견되지 않음>

12월 19일, 대선 결과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가 대통령이 됐습니다. 국정원 여직원 사건은 해프닝으로 정리되는 듯 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 김하영이 제출했던 컴퓨터에서 선거 운동 흔적이 발견됐습니다. 수개월이 지난 4월18일, 경찰은 김하영을 국정원법 위반 혐의로 검찰에 송치했습니다. 그런데 송치 하루 뒤 사건을 지휘했던 권은희 수사과장의 폭로가 나왔습니다. “서울청이 수사에 부당하게 개입했다” 검찰 수사와 함께 폭풍이 몰아쳤습니다. 결국 김용판은 공직선거법 위반, 경찰공무원법 위반, 직권남용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습니다.

■ 김용판 사건의 핵심은?

현행 공직선거법은 공무원이 <선거에 대한 부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거나> <선거 결과에 영향을 미치는 행위를 하지 못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공무원은 중립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기 때문입니다. 권은희의 폭로가 나오자 검찰은 경찰 공무원인 김용판이 대통령 선거에 영향력을 행사했는지, 선거 결과에 영향을 미치는 행위를 했는지를 검토했습니다. 이를 위해 김용판이 <지휘한 수사>와 <언론 발표>를 집중적으로 살폈지요.

경찰 수사와 발표는 대선을 코앞에 두고 벌어진 일이어서, 어떤 식으로든 대선에 영향을 끼쳤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수사기관의 장이 법이 정한 절차대로 공정하게 수사를 진행하고 그 결과를 신중히 발표했다면 책임을 물을 수 없고 물어서도 안 됩니다. 검찰은 김용판이 지휘한 수사가 문제없이 이뤄졌는지, 언론 발표를 사실대로 했는지를 따졌습니다. 그리고 수사와 발표에 문제가 있다고 보고, 김용판이 법을 어겼다고 판단해 재판에 넘겼습니다.

■ 분석 범위 제한...보라는 것만 본다?

치열한 법정 공방이 8개월 간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1심 재판부는 김용판에게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법원은 김용판에게 <문제가 없다>기 보다, 검찰이 <입증을 못했다>는 걸 더 강조했습니다. 그러면서 가장 핵심적인 쟁점으로 김하영이 임의제출한 컴퓨터 하드디스크의 분석 범위를 제한하는 게 정당한가를 꼽았습니다. 분석 범위 제한 논리가 정당하냐고요? 말이 어렵죠, 쉽게 풀어 보겠습니다.

신고 당시 국정원 여직원은 무고함을 주장했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많았지만요. 그러자 이틀 후, 김하영은 자기 방에 있던 컴퓨터 2대를 확인해 보라고 줬습니다.(임의제출했습니다) 그런데, 그냥 준 게 아니라 조건을 달아서 줬습니다. <최근 3개월 치 기록만 보라>고요. 경찰은 기술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답했습니다. 김하영은 “기술적으로 불가능하다는 답은 들었으나, 최대한 3개월 치만 분석해 달라”는 확인서를 써줬습니다.

<내가 보라는 것만 보세요>란 단서가 달린 임의제출은 전례 없는 일입니다. 정말 떳떳하다면 뭐가 문제입니까? 개인정보나 국가기밀이 있다면 그 사정을 설명하면 될 일 아닌가요? 불법 선거운동을 안 했으니 확인해 보라면서, 최근 3개월 것만 보라는 건 상식적이지 않은 일이죠. 경찰들도 이상하게 생각해서 논쟁이 벌어졌습니다.(물론 나중에 그 컴퓨터에서 불법 선거운동을 한 게 드러났지요. 지금 보면 무슨 의도였는지 짐작은 됩니다만)

검찰은 김하영의 이런 행동이 말도 안 되는 억지라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법원은 정당하다고 판단했습니다. 하드디스크에 저장된 정보도, 물건처럼 <제출하고 싶은 것만> 제출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근거가 된 법은 형사소송법인데 같은 조항을 두고 검찰과 법원의 해석이 갈렸습니다.

(형사소송법 106조 3항: 법원은 압수의 목적물이 컴퓨터용디스크, 그 밖에 이와 비슷한 정보저장매체인 경우에는 기억된 정보의 범위를 정하여 출력하거나 복제하여 제출받아야 한다. 다만, 범위를 정하여 출력 또는 복제하는 방법이 불가능하거나 압수의 목적을 달성하기에 현저히 곤란하다고 인정되는 때에는 정보 저장매체 등을 압수할 수 있다. 신설 2011.7.18)

■ 정보도 물건으로 보라고?

이상했습니다. 그래서 현직 경찰, 검사, 판사들에게 물었습니다. 수사기관 사람들은 대부분 말이 안 된다는 반응이었습니다. 비유하자면 100장짜리 일기장을 주면서 10장만 보라고 정해준 건데요.(물론 일기장이면 10장을 찢어서 줬겠죠) 하지만 임의제출을 한다면서 이렇게 하면 오히려 의심을 산다고들 하더군요. 떳떳하다면서 일부만 낸 다는 게 말이 안 된다는 거지요. 그래서 이런 식으로 조건을 달면, 오히려 그 조건을 첨부해서 압수수색 영장을 받는게 일반적이라고 했습니다. 경찰, 검사, 판사 모두 그랬습니다.

특히 판사들 대부분은 <법리적으로는 가능할지 모르나, 상식적이지는 않다>고 반응했습니다. 형사소송법을 아주 엄격하게 해석한 것인데, 논쟁이 될 것 같다고 하더군요. 이 부분이 핵심인 이유는 간단합니다. 이 논리를 받아들이면, 경찰 수사와 발표를 문제 삼을 수 없게 되거든요. 하지만 이 부분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수사도 발표도 누군가는 반드시 책임을 져야하는 상황이 생깁니다. <분석 범위 제한 논리>가 핵심이라는 이유도 거기 있습니다.

■ 경찰은 사실을 발표했나?

국정원 댓글 트위터
당시 경찰이 발표한 브리핑 내용을 보시죠. 경찰은 <수사해서 나온 그대로> 발표했다고 주장했고, 검찰은 아니라고 봤습니다. 도대체 내용이 어땠기에 의견이 갈릴까요? 법원에서 인정된 사실관계만 간단하게 정리해 보겠습니다.

1. 국정원 여직원(김하영)이 컴퓨터 2대를 제출했다. 
2. 그러면서 최근 3개월 치만 분석해 달라고 요청했다.
3. 경찰은 기술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답하고 확인서를 받았다. 
4. 확인해 보니 최근 3개월 내에 삭제한 기록이 있었다. 
5. 삭제된 파일을 복구했더니 ID와 닉네임 40개가 발견됐다. 
6. 그 ID와 닉네임으로 확인하니 찬반 클릭한 게 확인됐다.
7. 오늘의 유머 같은 사이트에 접속한 기록도 발견됐다.
8. 자기가 쓴 글을 다른 아이디로 추천한 경우도 있었다.
9. 이런 활동이 사생활이었는지, 업무인지는 확인이 안 됐다.
10. 국정원의 조직적인 활동인지 계속 수사할 방침이다.

내용을 보면 김하영의 활동이 명확하게 불법 선거운동인지, 아닌지 판단이 어렵습니다. 사적으로 한 것인지 업무인지가 명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강제수사가 아닌 수사 초기단계이니 당연합니다. 따라서 경찰은 그때까지 밝혀진 사실을, 최대한 <있는 그대로> 발표 했어야 합니다. <일부 정황은 나왔으나 단정하긴 이르며, 추후 수사로 밝히겠다.> 이런 식으로 말이죠. 하지만 경찰 발표는 지나치게 단정적이었습니다.

■ 엄격한 법 해석? 그 때 그 때 달라요

발표를 앞두고 서울청 분석팀이 보고서를 만들 당시, 경찰청 파견 직원들이 서명을 못하겠다고 나서는 일이 있었습니다. <혐의사실 관련 내용이 없다>는 표현 때문이었죠. 혐의사실이라는 표현은 분석관들이 쓰는 말이 아닙니다. 그것은 수사를 통해서 판단을 한 후에 쓸 수 있는 말이기 때문입다. 그런데 분석팀은 그냥 그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이에 대해 재판부는 <매끄러운 표현을 찾다가 실수로 쓴 것>이라고 했습니다. 일반인 아닌 경찰이 혐의사실이라는 말뜻을 몰라 실수로 썼다니요. 그랬다면 서명을 못하겠다고 문제 제기는 왜 했을까요?

재판부는 물건이 아닌 정보도 내고 싶은 것만 낼 수 있게 해야 한다면서, 판례에도 없는 형사소송법 조항은 엄격하게 해석했습니다. 그런데 <혐의사실>이란 표현을 함부로 사용한 것에 대해서는 그럴수도 있다면서 너그럽게 넘어갔습니다. 엄격한 법리적용의 대상이 그 때 그 때 달라지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 그냥 아쉽고 말 일인가?

경찰 발표가 선거에 얼마나 영향을 미쳤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경찰 발표 내용이 지나치게 단정적이었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지요. 재판부도 이 부분을 지적했습니다.

수서서가 발표한 보도자료와 언론 브리핑이 그 시기와 내용면에 있어서 최선의 것이었는지에 관해 다소 아쉬움이 남는 것도 사실이다.(예컨대, 김하영이 40개의 아이디와 닉네임을 사용하였음이 확인된 이상, 비록 당시까지는 그것이 경찰이 설정한 분석 범위 내의 것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려웠더라도, 분석의 범위와 관련된 쟁점을 분명히 부각시켜 이를 기초로 수사가 확대될 여지가 있음을 밝히는 등으로, 불필요한 오해를 피하는 방법으로 업무를 처리할 수도 있었을 것으로 판단된다.(판결문 104쪽)

하지만 재판부의 판단은 <아쉽다>가 전부였습니다. 재판부는 입증 책임은 검찰에 있고, 검찰이 제대로 못 밝혔으니 무죄를 줄 수밖에 없다고 수차례 강조했습니다. 물론 심증만으로 유죄를 내리라는 말은 아닙니다. 하지만 판결문을 읽으면 읽을수록, 이게 정말 검찰의 무능함 탓인가 하는 생각을 지울수가 없는 것도 사실입니다.

■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는지 따져봐야

경찰 수사와 발표가 부당했다 주장한 것은 권은희 과장뿐이었습니다. 나머지 17명의 경찰들은 권 과장과 정 반대되는 진술을 했지요. 재판부는 직급과 신분, 개인적인 성향이 다 다른 경찰들이 계속 일관된 진술을 하고 있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그러면서 권 과장이 객관적인 사실과 다른 진술을 많이 했다고 지적했고요.

그러나 권 과장 진술이 명백히 다른 부분은, 서울청에서 돌려받은 분석물 목록에 ID와 닉네임이 없었다고 진술한 부분뿐입니다. 나머지 내용은 모두 <물증으로 거짓말이 드러난> 게 아니라 <진술이 다른> 것이었습니다. 재판부가 지적한 전화 통화 내용을 볼까요? 경찰 간부들은 내선 전화를 많이 씁니다. 그런데 공공기관 사이의 유선 전화 추적은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엄청난 공을 들여 통화가 이뤄진 내역을 찾는다 해도, 본인이 아니라 하면 특정인이 그 시간에 그 전화를 사용했는지는 입증할 방법이 없습니다. 녹취가 없는 이상 전화로 무슨 말을 했는지는 결국 서로의 말을 듣고 판단하는 수밖에 없는 거죠.(권은희는 영장 신청 하지 말라는 전화를 받았다는데, 김용판은 전화로 격려를 했다고 하니... 누구 말이 진실인지 두 사람은 알겠죠)

권 과장의 폭로 시점을 따져봅시다. 권 과장은 대선이 끝나고 수개월 후에 외압을 폭로했습니다. 경찰이 여당에 유리한 내용이 발표했고, 여당 후보가 대통령이 된 마당에 폭로로 얻을 수 있는 게 무엇인가요? 재판부는 나머지 경찰들에게 <인사상 불이익>과 <보복>이라는 공통분모가 있다는 사실은 간과했습니다. 권은희가 폭로로 챙기려 한 이익보다, 나머지 경찰들이 마주하게 될 불이익이 훨씬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것 같습니다. 적어도 제가 가진 상식으로는 말입니다. 재판부의 논리대로라면, 물증 없는 뇌물 사건은 절대로 유죄를 받을 수 없습니다.

■ 법과 상식의 사이에서

기사를 읽어 내려갈수록 궁금증과 의문이 커진다면, 그 기사에는 분명 문제가 있다고 봐야합니다. 상식의 기준을 벗어나는 기사도 그러한데, 법을 적용해 사람의 신체와 재산을 강제하는 판결은 더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지난 주 판결 이후, 108 페이지에 달하는 판결문을 여러 차례 읽고 또 읽었습니다. 읽을수록 사안이 명쾌하게 정리되기는커녕 복잡함과 답답함에 울화가 치밀었습니다. 그저 제 무지와 부족함만을 탓하기에는 법과 상식의 간극이 너무 큰 것 아닌가 싶습니다. 이런 답답함을 느끼는 사람이 비단 저 혼자만은 아니리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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