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나주 어린이 성폭행 사건을 예로 들어볼까요. 8월 31일, 광주의 한 PC방에서 검거된 피의자 고종석은 이날 오후 전남 나주경찰서에 도착합니다. 경찰 조사와 현장 검증이 끝나고 이틀 뒤인 9월 2일 고종석은 구속됩니다.
그런데, 8월 31일 검거에서 9월 2일 구속까지, 극악무도한 성범죄자 고종석의 모습이 언론에 고스란히 노출된 건 몇 번일까요. 8월 31일 고종석이 경찰서에 도착했을 때, 이날 밤 사무실에서 기초 조사를 끝낸 뒤 유치장으로 이동할 때, 그리고 그 다음날 현장 검증, 이렇게 딱 3번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석기 의원은 구인장 발부됐던 9월 4일부터 구속 수감된 9월 5일까지, 언론에 그대로 노출된 건 몇 번이었을까요. 한 번 세보죠.
첫 번째 : 9월 4일 오후 8시. 국정원은 구인장이 발부되자마자 60명을 동원해 국회 의원실을 찾아가고, 이 의원 측과 실랑이를 벌입니다. 이 모습은 뉴스채널을 통해 고스란히 전파를 탑니다. 변호인이 도착하자 구인영장 고지를 받은 이 의원은 자진해서 의원회관을 나섭니다. 이 의원은 취재진에 “진실과 정의는 반드시 승리한다.”고 말했습니다.
두 번째 : 오후 9시 20분. 이 의원은 구인 절차를 밟기 위해 수원지법에 도착합니다. 경찰은 불상사에 대비해 경찰 병력 2개 중대, 150명을 배치합니다. 이 의원은 취재진에 “내일 자진출도 하겠다. 혐의는 조작됐다. 정의는 승리한다.”고 말했습니다.
세 번째 : 오후 9시 50분. 이 의원은 다음날 있을 영장실질 심사까지 대기할 수원 남부경찰서에 도착해 독방에 수감됩니다. 수십 명의 취재진이 차량을 둘러싸 이 의원의 지지자들과 마찰을 빚습니다.
네 번째 : 9월 5일 오전 10시 10분. 이 의원은 영장실질 심사를 위해 수원 남부서에서 수원지법으로 향합니다. 수많은 취재진이 따라붙습니다.
다섯 번째 : 오전 10시 20분. 이 의원이 영장실질 심사를 받기 위해 수원지법에 도착합니다. 이 의원 지지자들 50여 명이 피켓을 들고 시위를 벌였습니다. 이 의원은 취재진에 “혐의를 인정하지 않는다. 혐의를 다 밝히겠다.”고 말했습니다.
여섯 번째 : 오후 2시 20분. 이 의원이 영장실질 심사를 마치고 수원 남부서로 향하기 위해 수원지법을 나섭니다. 이 의원은 취재진에 “진실과 정의는 반드시 승리한다. 혐의 내용은 완벽한 조작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일곱 번째 : 오후 2시 30분. 이 의원이 수원 남부서에 도착해 영장 발부 여부를 기다립니다.
여덟 번째 : 오후 8시 20분. 구속영장이 발부된 뒤 이 의원은 구속기간 있을 수원구치소로 향합니다. 당시 수원 남부서 주변에는 이 의원 지지자 70여 명이 항의가 이어졌습니다. 경찰은 4개 중대 280여 명을 남부서와 수원 구치소에 배치했습니다. 이 의원은 “야, 이 도둑놈들아. 국정원의 조작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구인영장 발부에서 구속영장 발부까지, 단 이틀 동안 이석기 의원은 8번이나 노출됐습니다. (저는 5번째부터 총 4번을 봤는데, 단 하루 동안 피의자를 4번이나 기다려 본 것은 만 7년 간의 기자 생활 동안 이번이 처음이었습니다.)
그 때마다 인터넷에는 현장 사진과 이 의원의 발언이 보도됩니다. 노출됐을 때의 공통점은 몸싸움이 벌어지는 상황, 진실은 승리한다는 이 의원의 발언 등입니다. 언론에 노출된 그의 일거수일투족, 행동, 표정, 발언 하나하나는 국민들의 감정선을 하염없이 자극하고, 여론은 들끓습니다. 넥타이가 빨간색이라고, 출석하면서 웃었다고, 지지자들과 악수를 했다고, 국정원 직원을 밀쳤다고, 인터넷에는 비난 세례가 쏟아집니다.
그런데, 이 의원 옆에 바짝 붙어있던 국정원 직원들의 행동은 예상 밖이었습니다. 보통 피의자가 출석할 때, 수사 기관은 언론 앞에서 말 할 시간을 주고,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면 안으로 데려갑니다. 그런데, 이 의원이 법원에 출석하자 국정원 직원은 이 의원을 확 잡더니 심사장 안으로 끌고 가다시피 했습니다. 이 의원은 얼굴을 찌푸리며 팔을 뿌리쳤고, 이 과정에서 취재진이 얼굴을 맞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찍힌 이 의원의 사진은 “국정원 직원들에게 저항하는 이석기”란 제목이 달렸습니다.
이상한 점도 있습니다. 관례상 수원지법에서 영장실질 심사를 받으면, 바로 옆에 있는 수원지검에 구금되는 게 일반적입니다. 지법과 지검 사이에 지하 통로가 있기 때문에 이석기 의원은 이 과정에서 언론에 노출되지 않을 수도 있었습니다. 실제, 국정원과 검찰은 법원에 구금 장소 변경 요청에 대해 문의해 왔다고 합니다. 수원 남부서에서 수원 지검으로 바꾸는 방안을요. 아무래도 거리상 가까우니 국정원과 검찰 모두 편하겠죠. 법원도 구금 장소 변경을 요청하면 충분히 변경시켜주겠다는 입장이었고, 이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법원 말로는 구금 장소 변경을 신청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결국 이석기 의원은 수원 남부서에서 수원지법으로, 수원지법에서 다시 남부서로 계속 이동했고, 그 때마다 국정원과 몸싸움을 벌이는 상황이 발생됐습니다. 이 과정은 계속 카메라에 찍혔고, 온라인에선 “이석기, 아직 정신 못차렸다.”는 지탄이 계속 나왔고요. 이렇게 ‘그림’은 계속 만들어졌습니다. 취재진들 사이에서는 “국정원이 우리 그림 만들어주려고 일부러 수원지검이 아니라 수원 남부서에 구금시키나보다.”는 농담도 나왔습니다.
이석기 의원을 비호할 생각은 추호에도 없습니다. 피의자 인권 이야기를 하려는 것도 아닙니다. 어차피 이석기 의원은 공공의 적이 됐습니다. ‘내란 음모’란 키워드는 국민들의 감정선을 자극했습니다. 그런데, 구인장이 발부됐을 때부터, 중요한 것은 법리 싸움입니다. 정말 내란 음모가 있었는지, 지금으로선 그 진실을 파헤치는 게 본질입니다.
하지만, 이석기 의원의 몸싸움이나 흥분을 유도하는 듯한 국정원의 대응방식, 그리고 이 상황을 가십거리마냥 계속 내보내며 자극적인 제목을 다는 언론, 모두 본질과는 거리가 있어 보입니다. 국정원도, 언론도 계속 생산적이지 않은 감정 카드를 계속 내놓는 건 아닌지 아쉬움이 남습니다. 일거수일투족을 내보내면서 여론의 감정선을 건드리는 건 이미 충분히 했습니다. 사안의 핵심인 법적인 문제에 다가갈 수 있도록 이성적인 토론을 시작해야 합니다. 냉철함을 되찾고, 국정원도 언론도 중심을 잡아야 할 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