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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피고인 "내가 성폭행범" vs 검찰 "넌 범인 아니야"

중국판 '7번방의 선물'은 블랙 코미디

[취재파일] 피고인 "내가 성폭행범" vs 검찰 "넌 범인 아니야"
얼마전 중국 CCTV의 뉴스채널을 통해 대단히 희한한 재판 광경을 볼 수 있었습니다. 머리가 반쯤 벗겨진 40대 중반의 남성 왕수진이 피고인이었습니다. 왕 씨는 여러 명의 부녀자를 강간했고 그 가운데 3명을 살해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었습니다. 이미 1심 법원에서 사형을 선고 받은 뒤 이를 받아들이지 않아 항소심 재판이 열린 것입니다.

CCTV는 거의 하루종일 재판 모습을 생방송으로 연결해 자세하게 내용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습니다. 왕 씨가 비록 극악무도한 범죄 혐의를 받고 있지만 그렇다고 재판 내용을 생중계할 만큼 유명인이거나 특별한 사람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형사 재판이라면 피고인이 '자신은 죄가 없다'고 주장하고 검찰 측은 '이런 증거를 볼 때 죄인이 맞다'고 공방을 벌여야 당연합니다.

그런데 왕씨의 재판 모습은 정반대였습니다. 왕 씨는 시종일관 '자신이 강간과 살인을 했다'고 주장하는데 검찰측은 '당신은 그 사건의 범인이 아니'라고 반박했습니다.

검찰은 심지어 왕 씨가 자신의 죄를 자백하며 내놓은 진술의 허점을 집요하게 파고들었습니다. 살해된 여성의 목에 강하게 압박을 받은 혈흔이 나타났는데 왕 씨는 이에 대한 정황을 전혀 진술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왕 씨는 자신이 다리로 여성의 가슴을 눌렀더니 죽었다고 말했는데 여성의 갈비뼈가 골절된 흔적은 없었다고 반박합니다. 아울러 왕 씨는 살해된 여성의 키도 잘못 말했고 살해 시간도 정확히 몰랐다고 꼬집었습니다. 마치 왕 씨의 변호인이 변론을 하는 듯한 내용입니다. 오히려 거꾸로 왕 씨 측 변호사는 왕 씨의 범죄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사건이 발생한 것은 1994년 8월, 왕 씨가 경찰에 잡혀 조사를 받은 것은 2005년 1월로 거의 10년이란 세월이 흐른 만큼 왕 씨가 사건과 관련된 세부적인 내용을 자세하게 기억할 수 없는 것 아니냐고 반론을 펼쳤습니다. 또 당시 왕 씨가 사건이 난 지역에 있었다는 여러 증거가 있고 무엇보다 본인이 피해 여성을 살해했다고 자백하고 있음을 강조했습니다. 검찰과 변호사의 역할이 완전히 바뀐 모습이었습니다.

왕 씨는 그러면서 '내가 범인이 맞으니 사형에서 종신형으로 형을 깎아달라'고 재판부에 요구했습니다. 이건 또 무슨 말일까요? 왕씨의 주장은 자신이 죄를 있는 그대로 자백해 크게 뉘우치고 있고 사회에 도움을 주기위해 노력했으니 정상 참작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조금 더 풀어서 설명해보죠. 왕 씨는 검찰이 자신에게 적용한 3건의 살인 혐의를 모두 왕씨 스스로 자백했다고 강조합니다. 아울러 심지어 검찰이 숨기려고 하는 강간과 살인죄까지 먼저 나서서 밝혔다고 말합니다.

사법 정의를 위해 그만큼 노력을 했다는 설명입니다. 또 이렇게 검찰을 역공했습니다. 자신이 4건의 살인 사건을 털어놨는데 나머지 3건은 자신의 자백을 그대로 받아들여 사형을 언도했으면서 왜 1건만 진술의 신빙성이 없다고 배척하냐고요. 자신의 진술을 믿을 수 없다면 4건 모두 자백을 받아들이지 않아야 하는 것 아니냐고 따졌습니다.
녜수빈

점점 더 곡절을 모르시겠다고요? 이런 해괴한 재판 뒤에는 큰 비극일 수도 있는 사연이 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1994년 8월 허베이성의 성도인 스좌장의 한 한적한 마을에서 20대 여성의 강간 살해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수사에 나선 경찰은 당시 20살의 이 마을 청년 녜슈빈을 용의자로 붙잡아 강도 높게 조사한 끝에 녜 씨로부터 살인 자백을 받아냈습니다. 다음 해인 1995년 1심 법원은 녜 씨의 강간살인죄를 인정해 사형 판결을 내렸고 그해 4월 2심 법원이 판결을 그대로 확정하면서 이틀 뒤 녜 씨는 사형을 당했습니다.

녜 씨의 어머니인 장환즈 씨는 녜 씨가 수감돼 있던 교도소로 옷가지와 먹을 것을 챙겨서 아들의 면회를 갔다가 이런 사실을 전달 받았습니다.

아들이 범죄를 저질렀을 리 없다고 굳게 믿고 있던 어머니 장 씨는 거의 정신을 놓을 지경이었습니다. 왕 씨가 최근 재판에서 검찰 측과 '내가 범인 맞다', '너는 범인이 아니다'며 옥신각신하는 바로 그 사건을 둘러싸고 벌어진 일이었습니다.

녜수빈 어머니 오열

녜 씨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지 10년 만에 진범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나타나자 녜씨의 어머니는 아들의 억울한 죽음을 법적으로 보상받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습니다.

그 사연이 또 책 한 권입니다. 재심을 청구하기 위해서는 아들에 대한 1심과 2심 판결문을 구해야 하는데 해당 법원이 이를 내주지 않았습니다.

몇 년 동안 발만 동동 구르고 있을 때 지난 4월 '누군가'가 익명으로 문제의 판결문들을 복사해 우편으로 장씨에게 보내줬습니다.

그 익명의 지원자는 아직까지 누구인지 드러나지 않고 있습니다. 어떻든 장 씨는 이를 근거로 베이징 최고인민법원에 아들 녜 씨의 재심을 청구하는 신청서를 냈습니다.

그러니 중국의 검찰과 법원도 왕씨의 항소를 '이유 없다'고 바로 기각하지 못하고 법정 공방을 벌이게 된 것입니다.
녜수빈 어머니 투쟁

왕 씨의 이번 재판은 중국의 사법체계 자체에 대한 재판의 성격까지 띄고 있습니다. 지난 2일 항저우 샤오산구 법원이 17년전 강도살인 사건의 범인으로 사형을 언도했던 5명의 청년들에 대한 판결을 오심으로 뒤집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진범이 나타난 것이었습니다. 5명이 범행을 했다는 증거도 없었고, 게다가 현장에 남아있던 지문과 5명의 지문이 전혀 일치하지 않았는데도 강요에 의해 억지 자백을 받아냈던 사실도 뒤늦게 밝혀졌습니다.

이로 인해 중국인들의 사법체계에 대한 의혹과 비난의 감정이 잔뜩 고조된 상황에서 이제 왕 씨의 사건은 이런 불만을 폭발시킬 수 있는 도화선이 돼버렸습니다. 5명은 그나마 다행히 감형 끝에 목숨을 유지해 이제 국가로부터 보상을 받을 수 있는 기회라도 갖게 됐지만 녜 씨는 이미 되돌릴 수 없는 처지가 됐다는 점 때문에 그 폭발력이 훨씬 큽니다.

그동안 비난을 받아온 중국 수사 당국의 자백 지상주의와 각종 가혹행위, 이를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는 검찰과 법원의 치부가 드러날 위기에 처한 셈입니다. 그러니 중국 검찰은 기를 쓰고 왕 씨가 범인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거꾸로 왕 씨를 돕고 나선 중국의 인권 변호사들은 왕 씨가 진범이라며 소리 높이고 있습니다.

녜수빈 사례 만평
올초 우리나라에서 '7번방의 선물'이라는 영화가 큰 인기몰이를 했습니다. 지능이 떨어지는 한 아버지가 자신의 딸을 보호하기 위해 어린이에 대한 성폭행과 살인 누명을 뒤집어쓰고 결국 사형을 당한다는 줄거리입니다.

저도 그 영화를 가족들과 함께 봤는데요, 보는 내내 감독이 웃으라는 대목에서는 웃고, 눈물을 흘리라는 대목에서 펑펑 울었습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감독이 어떤 의도로 그 장면을 구성했는지, 왜 그렇게 이야기를 끌고 가는지가 느껴져 살짝 거부감까지 들었는데도 감독이 하라는대로 충실히 반응하고 말았습니다.

나오면서 왜 그렇게 감정이입을 할 수 밖에 없었는지 의아했는데요, 요즘 그 이유를 알겠습니다.

얼마 전 우리나라에서 70대 노인이 파출소 소장의 딸을 성폭행하고 살해한 죄로 15년을 복역했다가 거의 40년 만에 누명을 벗고 보상을 받은 일이 있었죠.

중국에서도 항저우의 청년 5명과 같은, 혹은 억울한 죽음을 당했을지도 모를 녜씨와 같은 일이 끊임없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즉, 영화 속의 이야기가 단순히 허구가 아니라 언제든 현실이 될 수 있기 때문에 그렇게 마음에 와닿았나 봅니다. 게다가 중국판 '7번방의 선물'은 블랙 코미디어서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너무나 난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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