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년 전 어제(9월28일)는 해방 이후 수도 서울이 가장 환희로 넘쳤던 날입니다. 6.25전쟁이 발발한 지 100일 가까이 지난 1950년 9월 28일,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한 우리 해병대와 미 해병대가 격전에 격전을 치른 끝에 서울을 탈환했습니다. 역사적인 '9.28 서울 수복'입니다.
기념일이 차고 넘치는 요즘, 이 날을 기억하는 사람 얼마나 되겠습니까만 매년 이날 서울에선 기념식이 열립니다. 어제도 용산구 전쟁기념관에서 '9.28 서울 수복 62주년 기념식'이 열렸습니다. 당시 탈환작전에 참가하셨던 노병들도 오셨고, 예비역 해병대, 시민, 학생들도 왔습니다. 외국인들도 '서울 수복'을 축하하기 위해 비를 맞으며 자리를 지켰습니다.
"그러나 서울시는 없었다"
비도 오는데 굳이 안 오셔도 되는 분들도 많이 오셨습니다. 그런데 오셔야 마땅한 분들이 없었습니다. 바로 서울시청 분들입니다. 서울과 서울시민을 대표하는 기관이니, 서울을 되찾은 날을 기념하는 행사에 오셔야지요. 시장 바쁘시면 부시장 오시면 되고, 이도저도 안 되면 실국장님들 오시면 될텐데 아무도 안 오셨습니다.
예전에는 서울시 관계자들이 왔습니다. 어지간하면 시장이 왔고, 정 바쁘면 부시장, 비상기획관이라도 오곤 했습니다. 목숨과 영혼을 걸고 서울 탈환에 나섰던 우리의 영웅들의 희생을 기리는 자리이니 시장을 비롯한 서울시청 관계자들, 아무리 바빠도 왔었는데 어제는 안 왔습니다.
"추석 민생 점검에 바쁘다"
서울시가 해병대에 밝힌 불참 명분은 "시장님이 추석을 맞아 민생현장을 둘러보느라 틈이 없다"였습니다. 추석 연휴 하루 전날, 공무원 입장에선 마지막 근무일이니 바빴겠죠. 너무 바빠서 단 한 사람도 서울 수복 기념식에 들를 틈이 없었을 정도였다는 겁니다.
서울시는 행사 주최 자격도 버렸습니다. 추석이라서 바쁘다는 핑계가 무색해지는 지점입니다. 기념식에도 안 오고 행사 공동주최도 안한다는 것은 시장부터 말단까지 추석 한참 전부터 민생 점검에 바빴다는 말밖에 되지 않습니다.
올해 해병대 혼자 서울 수복 기념식을 주최하니 무척 초라했습니다. 목숨과 영혼을 바쳐 서울을 탈환한 노병들이 자기들끼리 노고를 치하하는 어색한 자리로 비쳐져 보는 이를 안타깝게 했습니다.
진보 정치인의 안보관
박원순 서울시장은 자타공인 진보 정치인입니다. 그래서 박 시장의 서울 수복 기념식 불참을 두고 기념식 현장에서는 "진보 정치인의 진보 색채 안보관을 엿볼 수 있다", "안보를 등한시하는 정치인"이라는 말까지 나왔습니다. 그런 추측들이 괜한 오해이길 바랍니다.
안보 문제에 있어서는 진보와 보수가 다를 수 없습니다. 내 나라, 내 민족 지키자는데 사상의 틀은 무의미합니다. 안보는 가치중립적이고, 초당파적입니다. 다만 우리나라의 경우 안보관에도 진보가 있고 보수가 따로 있어서 논란이 빚어지곤 합니다. 이런 틈바구니 속에서 진보 정치인 박원순 시장이 통 크게 어제 서울 수복 기념식에 나왔으면 더없이 보기 좋았을 겁니다.
짓밟힌 그들의 희생
어제 행사엔 탈환작전에 직접 참가했던 노병들도 참석했습니다. 많은 분들이 그때 탈환작전 중에 전사하셨고, 이후엔 노환으로 돌아가셨지만 어제 오신 분들은 건강해보여서 고마웠습니다. 일제시대 넘어서자마자 맞은 전쟁, 멀쩡한 나라 만들기 위해 전부를 희생한 분들입니다. 적에게 빼앗긴 수도 서울을 되찾기 위해 적진 깊숙이 죽음을 무릅쓰고 진격한 분들입니다.
서울시는 그들의 희생을 외면했습니다. 이런 서울이 미래에 적의 손에 넘어간다면 누가 목숨 걸고 나설까요? 없을 겁니다. 비참하게 외면당할 희생인데 누가 앞장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