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2일 밤 9시쯤, 서울의 한 지구대가 북적였습니다. 여느 지구대가 그렇듯 잦은 손님인 취객이 오기에는 이른 시간. 하지만 10명 가까운 사람들이 북적였고, 모두들 화가 난 표정이었습니다. 지구대 작은 방에서 조사를 받고 있는 32살 손모씨 때문이었습니다.
손씨는 백화점 매장 직원들 사이에서는 공포의 대상이었습니다. 사가지도 않은 옷과 신발 등을 갖고와 억지 트집을 잡습니다. 트집을 잡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정신적 피해 보상금에 왕복차비까지 요구하기 일쑤였습니다. 돈을 받아내기 전까지 소리를 질러대며 소란을 피웠습니다. 매장뿐만 아니라 백화점 고객 서비스센터까지가 돈을 받아낸 적도 잦았습니다. 그야말로 '진상‘을 부리는 블랙컨슈머(악성민원을 제기해 돈을 뜯어내는 손님을 일컫는 마케팅용어)였습니다.
손씨가 부린 진상의 전형적 예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지난 달 서울의 강남 한복판 유명 백화점의 수입의류 브랜드에서 벌인 소동입니다. 매장에 들어와 10분가량 옷을 구경합니다. 그러다 갑자기 매장 직원에게 사지도 않은 양말을 내밀며 화를 내기 시작합니다. 양말 3개를 샀는데, 양말과 함께 세탁하던 고급 속옷에 물이 들었다는 겁니다. 양말 3개에 2만원 정도, 고급속옷 값은 16만원. 변상하라고 떼를 씁니다. 직원이 영수증을 보여달라 요청하는 순간 악을 지르기 시작합니다. 나는 임신8주다. 너희가 나에게 이럴 수 있냐 등이 주요 레퍼토리입니다. 그러더니 정신적 피해보상에, 일산에서 왔으니 왕복차비 8만원까지 더해달라 요구하기 시작합니다. 이런 생떼는 1시간 넘게 이어집니다. 화장실을 가더니 피를 묻힌(혹은 매니큐어인지...알 수는 없습니다) 화장지를 보여주며 매장의 불친절로 하혈했다 주장합니다. 매장 직원들은 당황을 넘어 공황 상태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날 손씨는 이 매장에서만 30만 원 넘게 뜯어갔습니다. 그리고 고객센터에서도 10여만 원을 진료비조로 받아갔다 합니다. 이 정도는 어찌보면 다행입니다. 대전의 한 백화점의 매장에서는 1백만 원 넘게 뜯어갔습니다. 해당 매니저는 집에가서 많이 울었다 합니다. 백화점의 돈도, 브랜드의 돈도 아닌 매장 매니저의 주머니에서 나간 돈 이기 때문입니다.
손씨는 생트집을 잡으며 전국을 순회한 것으로 보입니다. 지난 해 초 유명 의류브랜드 내부 전산망에 하소연을 올린 이는 ‘부산’의 유명백화점 매장 관리자입니다. 블랙컨슈머 사례로 정리된 글들과 하소연글들, 그리고 이에 달린 리플들을 보면 울산, 광주, 대구 할 것 없이 지난 해 초부터 손씨가 쓸고 다녔습니다. 속옷, 청바지, 등산의류, 수입 캐쥬얼 의류...종류를 가리지 않고 쓸고 다녔습니다. ‘경상도 말씨에 올백머리. 키는 160센티미터 정도. 머리부터 발끝까지 해당 브랜드로 갖추고 오는 사람. 자신을 30대 후반의 김모씨라 소개함’. 손씨입니다. 그러다보니 모두 손씨가 백화점에 오면 ‘비상령’을 발동하며 문자로, 구두로 전달했습니다.
그날 밤 8시쯤, 지구대를 찾아온 사람들은 모두 손씨에게 당한 매장 관리자들이었습니다. 백화점도 제 각각. 브랜드도 제각각 이었습니다. 목동의 한 백화점에서 손씨가 붙잡혔단 소식이 퍼진겁니다. 손씨가 지구대로 연행됐단 소식도 그렇게 퍼진거죠.
토요일 8시뉴스로 기사가 보도된 뒤, 이런 질문을 받았습니다. ‘어떻게 사가지도 않은 물건을 들이미는데 돈을 받아가나? 왜 자기 돈으로 주나’. 네. 황당하고 논리적으로 이해가 안 가는 대목입니다. 매장 직원, 정확히는 매장 관리자의 입장을 들으시면 이해 가실겁니다.
매장 관리자, 흔히 ‘매니저’라 불리는 사람들은 백화점 직원이 아닙니다. 해당 브랜드 소속입니다. 하지만 그가 일하는 일터는 ‘백화점’ 안에 있습니다. 즉, 양쪽의 관리와 감시를 받는 입장입니다. 브랜드든 백화점이든 모두 ‘이미지’가 가치에 큰 부분을 차지합니다. 고객 서비스 역시 가격과 가치에 큰 부분을 차지합니다. 그러다보니 백화점이나 브랜드나 고객 서비스 관련 관리자들은 고객의 항의 등 평가가 인사평가의 큰 부분을 차지합니다. 매장 매니저들은 이런 그들의 관리를 받습니다. ‘임신 했다’면서 악을 쓰는 고객이 백화점과 브랜드에 항의를 한다면? 그 난리를 지켜보는 다른 고객들이 ‘어떻게 임신한 여성에게 저럴 수 있나’라며 항의를 한다면? 백화점에서 해당 브랜드가 나가라는 소리까지 들을 수 있습니다. 만약 나가게 된다면? 매니저는 브랜드에서 좋은 이야기를 들을 리 만무합니다. 손씨는 매장 관리자들이 백화점과 브랜드 사이에서 ‘치이는 것’을 노린 겁니다. 손씨가 연행된 것도, 피해 매장의 신고가 아니었습니다. 다른 백화점의 같은 브랜드 매장 관리자가 신고를 했다 합니다. 한 피해자는 울먹이며 ‘손씨는 약자를 괴롭히는 악마다’라고 말했습니다. 백화점 매장 아닌 일반 매장에서 손씨에게 당했다는 이야기는 없습니다.
그날 손씨는 기초 조사를 하는 지구대원에게도 거짓말을 했습니다. ‘김모씨’라며 자신과 비슷한 인상의 사람의 신원을 들이밀었습니다. 하지만 지문대조 끝에 결국 ‘32살 손모씨’임이 드러났습니다. 지구대에서도 ‘임신8주’라고 주장 끝에 결국 자신의 입으로 ‘임신하지 않았다’ 실토했습니다. 지구대에 찾아온 매장 관리자들, 그리고 그들과 연락을 주고받은 사람들끼리만인데도 피해금액이 큽니다. 경찰에 따르면 지금까지 확인된 피해금액만 백화점 매장 25군데 백화점에서 1000만 원 이상입니다. 모두 하루 종일 서서 일하는 '끼인 사람들'의 주머니에서 털어낸 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