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시간에 빛에 대해서 배웠다. 빛에 따라서 어떻게 사물이 보이는지를 종이에 옮기고 가장 비슷하게 표현한 학생이 칭찬을 들었다.
개인적으로 내 손 모양이 마음에 안 든다. 보통 사람보다 손가락이 굉장히 짧기 때문이다. 하루는 미술 선생님이 자신의 손을 그려보라고 했다. 선생님은 연필로 그려진 내 손을 보고는 스케치북을 들어 내 머리를 쳤다. 비율이 안 맞는다며. 그 뒤로 그림을 다시는 그리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몇 년간의 미움 끝에 다시 나를 열병에 들게 한 미술. 나는 형태를 제대로 그리라는 미술 선생님의 가르침이 싫어 미대에 가서도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
미술은 형태를 그리고 표현하는 기술일까? 빛이 있기 때문에 볼 수 있는 사물의 모습을 정확하게 혹은 느낌이 있게 변형해서 표현하는 것일까? 그럼 추상화는?
어쩌면 처음부터 미술이란 정신을 그리는 그릇이었는지 모른다.
고대 벽화 속에 등장하는 소의 그림은 그려지는 순간 영혼을 상징하는 매개가 되었다. 소의 형태를 정확하게 그리는 것이 중요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집트, 고구려의 벽화는 신과 사람과 왕과 사냥, 노동을 기록하고 있다. 선비들은 사군자로 정신을 담을 수 있다고 했다. 풍경에는 자연의 도도한 기운을 담는다. 빛과 그림자는 중요하지 않다. 사람의 눈과 손, 온 몸이 받아들인 정신의 표현이 중요하다.
현대미술도 결국 원시시대의 정신으로 돌아왔다. 사진처럼 그리는 사람이 잘 그리는 화가가 아니라 정신, 거기에 혼이라고 할 수 있는 일종의 염원까지 담아내는 사람이 예술가이다. 중국 현대 작가 중에 장환(Zhang Huan)은 정신을 담아내는 작품을 극단적으로 쉽고 강렬하게 보여준다.
재(Ash)를 이용한 작품.
사원에서 피우는 향. 죽은 자를 위해 바치는 향.
그 향이 재가 되었다. 수 천 명, 수 만 명의 염원을 담고 있는 재. 수많은 죽은 이를 달래는 수많은 사람들의 혼이 담겨 있는 재.
재라는 재료 자체가 뭔가를 태워서 얻어지는 것인데 그 재료 안에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온갖 염원이 담겨 있다. 불에 탄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한다. 죽음인 동시에 희생으로 얻어지는 열과 연기, 그리고 향내로 날아가 버리는 허무함과 하늘에 닿게 될 것이라는 소망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장환은 작품을 만드는데 이 재를 사용했다. 형태를 그린다는 것은 전달하기 위한 기호의 생산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신과 통할 것 같은 혼의 그릇이 되었다는 것이다. 작품은 하나의 죽은 호흡을 가지고 살아있는 정신이 되었다. 죽음의 재가 수많은 정신을 담고 있는 커다란 그릇이 되었다.
재는 캔버스 위에 하얀 호랑이가 되었다. 죽음의 그림자가 남긴 자취를 따라 설산 위의 백호가 수 만 명의 염원을 포효하려고 한다. 재의 자취 속의 희게 남겨진 여백은 사람이 되고 나무가 되었다.
재가 모이고 모여 커다란 부처의 상이 되었다. 그런데 머리와 턱은 서로 붙어 있지 않다. 재로 만든 부처 위에 다시 향을 피운다. 향 피운 재로 만든 입이 다물어 지지 않는 부처. 계속 염원을 담을 수 있게 향을 피우는 작가.
희생을 담보로 한 부처의 전생前生과 중생들의 염원을 안고 가는 현생의 부처가 만나고 있다. 허무와 죽음 속에 다시 무지한 중생의 향이 타고 있다.
한 마리의 소가죽으로 부처를 만들었다. 인간의 노동과 배고픔을 역사가 시작되기 전부터 함께 했던 동물. 그 소가 부처의 얼굴이 되었다. 자비로움은 한 마리의 소가 죽음으로 형상화 되었다. 온전하게 남아 있는 소의 발굽과 꼬리는 부처를 현실속의 죽음과 맞닥뜨리게 한다. 신神을 상상하지 말고 죽음과 삶 속에서 깨달으란다.
인간의 정신은 보이지 않는다. 혼魂도 영靈도 보이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것을 표현한다는 것은 깨닫게 하는 충격을 준다는 것일지 모른다. 하나의 획 안에 각고의 노력과 성격과 마음이 담겨 있다고 믿은 붓 놀림이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작품과 대화하듯이 향속에서 영혼의 냄새를 맡아 보자. 미술작품은 정신을 담아내는 그릇이니까.
취재협조 : 학고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