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16일) 북한과 브라질의 경기가 있기 직전에 미 국무부에서는 브리핑이 있었습니다. 매일 하는 거니까 새로울 것도 없었습니다만, 크롤리 대변인은 한국과 북한에 관련된 말을 정말 많이 했습니다. 하나는 북한의 유엔 대사가 천안함 조사결과가 날조된 것이라고 주장한 데 대한 반박이었고, 또 하나는 북한과 브라질 축구 경기에 대한 부분이었습니다.
천안함에 대한 미국의 태도는 확고합니다. 국제조사단의 조사결과 북한 행위로 결론이 난 만큼 북한의 주장은 일고의 가치도 없다는 거죠. 그리고 북한을 제재할 경우 군사적 대응으로 맞서겠다는 북한의 발언이야말로 호전적이고 도발적인 북한의 속성을 반복해서 보여주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지금이라도 북한은 도발행위로는 아무 것도 얻어낼 수 없음을 깨닫고 예측가능하고 책임있는 국가로서 정상적으로 행동하라고 촉구했습니다. 사실 이 내용은 크롤리 대변인이 하지 않았더라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던 대목입니다.
오히려 이색적이었던 것은 북한과 브라질 경기에 대한 질문과 대답이었습니다. 전문을 한 번 그대로 옮겨보겠습니다. " " 는 외신 기자들의 질문입니다.
"북한이 오늘 이긴다면 어떻게 되는 건가?" (웃음)
[크롤리/미 국무부 대변인 : 놀라운 일이겠죠.]
"월드컵에 대해서 하나 더 물어도 될까?"
[크롤리/미 국무부 대변인 : 아, 나는 브라질을 응원합니다.]
"아니, 북한과 월드컵에 대해서…."
[크롤리/미 국무부 대변인 : 나는 진짜로 브라질을 응원한다니까요. (웃음)]
"한국은 지금 북한이 불법으로 월드컵을 중계한다고 비난하고 있다. 북한 사람들에게 월드컵 경기같은 국제적 이벤트를 보여주는 게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는지, 그것이 북한 사회를 개방시킬 수 있다고 보는지 묻고 싶다."
[크롤리/미 국무부 대변인 : 그 질문의 한편에는 진실도 있는 것 같고, 다른 한편으로는, 지적재산권 침해라는 측면이 있다고 봅니다. 내 말은, 그런 행태가 북한을 특징짓는 것이라는 거죠. 북한은 이웃국가들과 정상적인 관계를 맺을 수도 있었습니다. 법적으로도 말이죠. 하지만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월드컵 중계신호를 해적질하거나 훔치려고 하는 길을 택했죠. 월드컵을 북한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것이 북한 안에서 일어나는 일과 한국, 그리고 북한 밖에서 일어나는 일 사이의 괴리에 대해서 북한사람들이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해준다고 하더라도 말이죠. 북한은 범죄국가입니다. 국제 규칙을 지키고 법적인 절차를 밟아나가기보다 훔치는 것으로 전진하려는 게 바로 북한의 또다른 특징입니다.]
북한을 범죄국가라고 한 크롤리 대변인의 발언이 기자들을 조금 놀라게 했습니다. 외신기자는 이후 계속해서 미 국무부 대변인이 특정국가를 그런 식으로 표현하는 게 외교적으로 도움이 되는거냐고 물었습니다. 크롤리 대변인은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대답하더군요.
[크롤리/미 국무부 대변인 : 보세요. 미국은 앞으로도 북한이 저지르는 호전적이고 도전적이며, 용납될 수 없는 행위를 (범죄라고) 특징 짓는데 주저하지 않을 겁니다. 한반도 지역에서의 우리의 궁극적인 목표는 명백합니다. 결코 물러서지 않을 겁니다. 북한은 미국과 새로운 관계를 맺고 싶다면 변화해야 한다는 점을 깨달아야 합니다.]
브리핑이 끝나고 한나절 뒤에 크롤리 대변인의 브리핑 내용 가운데 틀린 부분이 드러났습니다. 바로 북한이 월드컵 중계신호를 중간에서 훔쳐서 중계방송했다는 부분에 대한 겁니다. 국제축구연맹이 공식적으로 북한을 비롯한 아주 가난한 나라들에 대해서는 무상으로 월드컵 중계를 할 수 있도록 해줬다고 발표한 거죠.
브리핑 당시 그 부분에 대해 질문을 한 미국의 여기자나 크롤리 대변인 모두 그 부분에 대해서는 정보가 없었던 거죠. 그 날 아침 뉴욕 타임스가 '월드컵 중계 놓고 남북 또 충돌'이라는 기사를 쓴 것도 마찬가지 배경에서였습니다. 브리핑이나 기사의 그 어디에도 한반도 전역에서의 중계권을 확보한 SBS를 언급한 부분은 없었고요.
결국 해프닝으로 끝났지만, 미국 정부가 북한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 사례로 남을 것 같습니다.
물론 저와 크롤리 대변인의 생각이 전혀 다른 부분이 있었습니다. 크롤리 대변인은 브라질을 응원한다고 두 차례나 강조했지만 저는 북한을 응원하고 있었으니까요. 천안함 사태가 없었다면 얼마나 홀가분하게 남북이 함께 응원했을까 하는 아쉬움도 있었고, 그런 차원에서 무모한 도발을 감행한 세력에 대한 분노와 원망도 함께 찾아오더군요.
끝까지 물러서지 않고 세계 최강 브라질과 맞서는 북한 선수들의 왠지 홀쭉한 얼굴을 보면서 안쓰럽고 뭉클했습니다. 북한 국가를 들으며 눈물을 철철 흘리던 정대세 선수의 플레이도 인상적이었고요.
남북관계가 다시 풀려서 다음 브라질 월드컵 대회에는 남북 단일팀이 나가서 박주영-정대세 투톱에 박지성-홍영조 윙이 상대의 골문을 활짝 열어젖히는 모습을 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무엇보다 북한의 전략전술이 상당히 효율적으로 드러난 만큼 내일 아르헨티나와 맞붙는 한국팀으로서도 상당부분 참고가 됐겠다 싶었습니다.
아직 두 경기씩 남았으니까, 월드컵 동반 진출에 이어 16강도 동반진출하는 기적(쾌거, 감동)을 기대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