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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로연가 - 비로소 대학로가 되다 <1>



1926년 일제는 예과와 법학과 의학대학을 세워 비로소 동숭동에 경성제국대학의 모습을 갖춘다. 그리고 교정에 마로니에 나무를 심는다. 마로니에 나무는 당시 경성제국대학 교수였던 일본인 교수 우에노가 지중해에서 직접 공수해 온 것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일제가 옛 숭교방 지역에, 고선 윤선도와 같은 지조 있는 선비가 태어난 자리에, 경성제국대학을 설립한 것이 우연이 아니고 필연이었다면 이 마로니에 나무를 심은 것 역시 우연의 색채를 띤 필연이었을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마로니에 나무는 피나무, 플라타너스와 함께 세계 3대 가로수 중 하나다. 가로수가 되기 위해서는 다 그렇겠지만, 쭉 뻗은 외관이 일단 멋지고 공해 등으로 살기 힘든 도시 환경에서도 잘 자라는 나무이기 때문에 마로니에 나무가 가로수종으로 선택받았을 것이다. 또 당시 파리 등 유럽에서 인기 있는 수종이었기 때문에 일본인 교수는 그것을 들여왔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일본인 교수는 마로니에 나무가 갖는 의미를 알고 있었을까?

마로니에의 꽃말은 '천분 또는 천재 - 하늘이 준 재능'을 의미한다고 한다. 그리고 또 한가지, 마로니에 나무는 '행동하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마로니에 나무는 강한 에너지를 발산시켜 행동력과 움직이고 싶은 욕구를 상승시킨다. 즉 마로니에 나무는 행동을 촉진하는 나무인 것이다. 만약 어떤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면 지금 바로 행동으로 옮겨라' <나무의 힘, 야스민 미하엘라이트> 

1910년, 일제는 조선을 강제로 병합하면서 당시 조선의 최고 교육기관인 성균관의 교육기능을 폐쇄했다. 지금의 동숭동 일대 즉 숭교방 터가 갖는 학문의 맥이 끊기는 듯 했다. 하지만 그 뒤 동숭동 일대에 다른 교육시설이 들어섰고 일제는 그곳에 경성제국대학을 설립했다. 정의와 소신을 위해 뜻을 굽힐 줄 몰랐던 윤선도의 정기가 서려 있는 그곳에 제국대학의 터를 잡았고, 그리고 교정에는 '행동하라'는 의미를 갖고 있는 마로니에 나무를 심었다.

모든 행위들은 우연이라는 작은 이름으로 하나씩 하나씩, 차곡차곡 쌓이며 필연을 향해 가고 있었다. 1946년, 일제가 물러나고 경성제국대학은 우여곡절 끝에 국립대학인 서울대학교가 되었다. 그리고 교정에 심어진 마로니에 나무는 서울대학교의 상징이 되었다. 마로니에 나무 아래에서 젊은 대학생들은 때론 낭만을 노래했고, 그 아래에서 또 다른 젊은이들은 '행동'을 고민했다. 그리고 행동을 고민하던 청년들은 박정희 유신 정권에 저항하는 중심에 섰다.

서울대 미학과를 졸업한 시인 김지하는 1970년, 마치 고산 윤선도가 잘못된 정치를 고발하는 상소를 올렸던 것처럼, '오적'이라는 시를 발표해 세상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 당시 그는 재벌, 국회의원, 고위공무원, 장성, 장차관 등 부패한 권력자들을 나라를 팔아먹은 을사오적에 비유해 비판했다. 그리고 상소를 올린 댓가로 유배를 가야만 했던 윤선도처럼 시인 김지하는 역시 ‘불온한 시’를 발표했다는 이유로 정권에 의해 구속돼야만 했다.

김지하는 김지하씨의 본명이 아니다. 본명은 김영일이다. 지하는 그의 필명이라고 한다. 그는 우연히, 아주 우연히 그의 필명을 지었다고 한다.

"5.16 군사 쿠데타 뒤니까, 아마도 22살 때였나 보다. 그때 나는 서울대학교 문리대학 미학과에서 공부하고 있었고 학교 앞에 '학림'이라는 음악다방이 하나 있었는데, 그 다방에서 곧 나의 시화전이 열리기로 되어 있었다. 그때가 여름이었다. 그때 내게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내 본명은 김영일(金英 一)인데 문단에 이미 같은 이름의 문사들이 여럿 있었다. 당시 서울대 학생이 개인 시화전을 여는 것은 마치 시집 한 권 내는 것만큼 '준문단적' 혹은 '준준문단적' 사건이었는지라 아무래도 필명이 하나 필요했던 것이다. 그랬다. 그런데 그러던 어느 날 동아일보사에서 일하던 한 선배가 점심때 소주를 사줘서 실컷 먹고 잔뜩 취해가지고 거기서 나와 동숭동 대학가의 아지트였던 바로 그 음악다방으로 가려고 호주머니를 뒤지니 돈도 버스표도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걷기로 했다.

여름 한낮의 태양은 뜨겁고 술은 오를 대로 올라 종로길을 갈지 자로 걸어올 때다. 그 무렵 막 유행하기 시작한 것이 있었는데, 요즘에도 흔한 것이지만 길가에 자그마한 입간판이 주욱 늘어선 것이다.  다방, 이발소, 이용실, 뭐 그런 것들의 입간판인데 술김에도 괴상하게 여긴 것은 그 간판 위쪽에 다 똑같은 자그마한 검은 가로 글씨로 모두 한글로 '지하'라고 하나같이 써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지하실에 다방, 이발소, 이용실이 있다는 얘긴데 왜 하필 유독 똑같은 한글, 똑같은 글씨로 맨 위쪽에 가로로 조그많게 써 있느냐는 것이다. 그런 똑같은 것들이 여기도 '지하' 저기도 '지하' 저기만큼 가서도 또 '지하', '지하', '지하'! 그야말로 도처에 유(有) '지하'였다. '옳다! 저것이다! 저것이 내 필명이다!' 이렇게 된 것이다."  <www.artnstudy.com 김지하 - '지하'라는 필명에 대하여 중에서>

시인 김지하는 그 뒤 많은 후배들에게 영향을 끼친다. '아침이슬' '친구'를 만들고 뮤지컬 '지하철 1호선'을 제작한 김민기씨, 극단 연우무대 대표인 정한용씨,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로 있는 연극연출가 이상우씨, 김석만씨, '나의 문화 유산 답사기'로 유명한 전 문화재청장인 유홍준씨, '나는 파리의 운전사'로 이름을 알린 홍세화씨, 영화감독 장선우씨, 국악인 김영동씨, 등등이 김지하씨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그리고 이들은 훗날 우리나라 대학로 연극을 비롯한 문화 운동의 한 축을 이루게 된다.

6백여 년 전, 학문을 높이 여기는 배움의 터전이었던 숭교방은 세월이 흘러 흘러 동숭동 대학로가 되었다. 산천도 변하고 지명도 변하고 이곳에 사는 사람들도 시대마다 달라졌지만 변하지 않는 것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깨어있는 젊음의 터'라는 땅의 공간성이 아닐까 싶다.

그 옛날 성균관 젊은 유생들이 걸었던 거리는 대학생들이 물려받아 '대학로'라는 이름으로 다시 태어났고, 그 시절 젊은 유생들이 지키고자 했던 선비 정신은 훗날 70,80년대 대학생들의 저항 정신으로 이어졌다. 지금의 마로니에 공원에서 태어나, 성균관에서 학문을 배우다 조정의 부정을 참지 못하고 상소를 올려 평생 유배생활을 했던 고산 윤선도가 있었다면, 서슬 퍼랬던 군사 정권에 맞섰던 김지하, 김민기 등으로 대표되는 젊은 대학생들이 있었다. 어쩌면 이 모든 것이 필연이 아닐까 싶다. 나는.

태조 이성계가 성균관을 설립한 것이나, 고산 윤선도 같은 사람이 태어난 것이나, 일제가 경성제국대학을 세운 것이나, 일본인 교수가 '행동하라'는 의미를 가진 마로니에 나무를 심은 것이나, 서울대학교가 들어선 것이나, 어쩌면 이 모든 것이 필연이 아니었을까 싶다. 이 땅의 '아주 특별한 공간성'이 오랜 세월 동안 연출해 낸 '필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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