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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반장, 정치부 정준형 기자입니다.
배은망덕이라는 말의 정확한 뜻을 아십니까? 인터넷으로 사전을 찾아보니 이렇습니다. "남에게 입은 은덕을 저버리고 배신함. 또는 그런 태도가 있음."
공동체를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절대 들어서는 안될 말 가운데 하나가 아닐까요? 실제로 저나 여러분이 배은망덕한 행동을 저질렀다면 모를까, 어찌됐든 다른 사람들로부터 '배은망덕'하다는 말을 듣는다면 그 기분이 어떨까요? "내가 왜 사나!"하는 참담함마저 느껴질 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 '배은망덕'이라는 말이 정치권에서 나왔습니다. 그것도 전직 대통령을 향해서 말이죠. 언론 보도를 통해 아시는 분은 누군지 이미 아시겠습니다만, '배은망덕'이라는 말을 들은 사람은 바로 '노무현 전 대통령'입니다. 또 배은망덕이란 말을 한 사람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핵심측근인 민주당 박지원 의원입니다.
오늘은 '배은망덕'에 대해서 말하고자 한게 아닙니다. 오늘 여러분과 의견을 나누고 싶은 내용은 '호남'에 대해서입니다.
지난 18일 민주주의 2.0이라는 토론사이트가 문을 열었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만든 인터넷 토론사이트입니다.
노 전 대통령은 지금까지 20건이 넘는 글을 직접 올렸는데요, 지난 22일에는 밤 11시가 훨씬 넘어 자정이 가까운 시간에 <감정상의 문제는 아닙니다>라는 제목의 글을 올렸습니다.
그런데 글 내용 가운데 이런 내용이 문제가 됐습니다. (**시간 되시면 직접 사이트에 가서 확인해보셔도 됩니다. ☞원문 보러가기)
"호남의 단결로는 영원히 집권당이나 다수당이 될 수 없습니다. 호남이 단결하면 영남의 단결을 해체할 수 없습니다. 호남에서도 정당간 경쟁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호남이 포위에서 풀려날 수 있습니다.
안방정치, 땅 짚고 헤엄치기를 바라는 호남의 선량들이 민주당을 망치고 있습니다. 호남표로 국회의원이 되겠다는 수도권의 정치인들이 민주당을 망치고 있습니다. 저의 희망은 제발 민주당이 선거구제 개혁에 전력해 주었으면 하는 것입니다."
언뜻 보면 참으로 맞는 말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옛민주계를 중심으로한 호남 지역의원들은 노 전 대통령 글에 대한 소식을 접하고 아주 불쾌하다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이유를 들어보니 대략 이렇습니다.
"왜 호남이냐, 영호남 지역주의가 함께 문제 아니냐. 오히려 영남 패권주의가 더 문제다. 영남지역 의원들을 봐라, 그런데 왜 영남은 이야기하지 않고 호남만 희생하려드느냐. 호남에 지역주의의 책임을 돌리려는 아주 부적절한 말이다."
특히 박지원 의원은 24일 한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 독한 말을 쏟아냈습니다. "해도 해도 너무 하신 것 같다. 노무현 대통령 자신은 어디표로 당선을 했습니까? 호남표로 당선을 하고, 이건 진짜 전직 대통령께 말씀드리기 곤란한 말씀 같습니다만, 배은망덕한 말씀 아니겠습니까?"
문제의 '배은망덕'이란 말은 여기서 나왔습니다. 조금 더 깊이 들어가보면 이런 이유도 있습니다. 역시 박지원 의원의 말을 통해 보면 이렇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님 자신이 받았던 지지표를 이번 선거(지난해 대선)에서 반토막 내서 한나라당에 정권을 바쳐준 꼴이 아닙니까?"
다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민주당이 정권을 잃고, 지금의 정당 지지율이 10%대에서 답보상태를 보이고 있는 근본적 원인은 뭐냐? 호남사람들의 절대적 지지로 대통령이 되놓고선 민주당을 분열시키고, 지지층을 분열시킨 노 전 대통령 책임이 있는 것 아니냐. 그런데 자기 책임은 몰라라하고, 이런 식으로 말하면 되겠냐"
라는 것입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해 대체로 호남지역의 정서는 서운하다는 평가가 많았습니다. 2003년 9월 17일, 당시 광주를 방문해 광주·전남지역 언론사 간부들과 간담회 자리에서 노 전 대통령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호남이 이회창 후보를 이길 사람 필요했습니다. 호남사람들이 내가 예뻐서라기보다, 이회창 후보가 싫어서 나를 찍은 것 아닙니까?" 이 말은 두고두고 노 전 대통령의 대표적 호남 비하발언으로 꼽혔고, 지금도 호남과 관련해 회자되고 있는 말입니다.
위에서도 언급했습니다만, 노 전 대통령은 사실 호남사람들의 절대적 지지로 2002년 대선에서 승리했습니다. 대선 후보 경선 당시 광주에서 1위로 올라서며 돌풍을 일으켰고, 이를 계기로 대세론을 내세웠던 이인제 후보를 꺾고 후보로 확정됐습니다. 이 과정에서 이인제 후보가 당시 청와대의 여론조사 조작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고, 여론조사 조작 의혹의 핵심 당사자로 박지원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을 지목하기도 했습니다.
역사란게, 정치란게 참 아이러니 합니다. 당시 노무현 후보를 후보로 선출하기위해 여론조사를 조작했다는 의혹까지 받았던 박지원 의원이 몇 년이 지나서는 노 전 대통령에게 '배은망덕'이라는 말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후 대선에서도 노 전 대통령은 광주에서 95%, 전남 전북에서 90% 넘는 지지를 받았습니다. 이런 호남의 절대적 지지로 대통령에 당선됐지만 노 전 대통령에게 호남은 늘 부담이었습니다. 자신의 정치인으로서 평생 투쟁해온 지역주의를 타파하기 위해서는 호남의 희생이 불가피했기 때문입니다.
곧, 민주당의 한계.호남 소외론을 극복해 민주당의 외연을 확대해야 전국정당을 만들 수 있다는게 노 전 대통령의 생각이었고, 지금도 그 생각을 고집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노 전 대통령이 대통령에 취임한 이후 2003년 대북송금 특검을 도입한 것도, 당시 민주당의 핵심세력 가운데 하나로 호남세력으로 대표됐던 동교동계 세력과의 단절을 위한 방편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이후 열린우리당을 창당해 정책과 이념 대결로 지역구도를 타파하려 했지만, 노 전 대통령의 정치실험은 실패로 끝났습니다.
열린우리당과 당시 쪼개졌던 옛민주당은 다시 돌고돌아 지난 3월 총선을 앞두고 '민주당'으로 다시 합해졌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22일 민주주의 2.0에 올린 글을 보면 호남표로 국회의원이 되겠다는 정치인들을 욕하고 있지, 호남 사람들을 비난하고 있지는 않아 보입니다.
다시 말해 호남 민중을 욕하는게 아니라 호남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호남 정치인'을 기득권 세력으로 보고 비판하고 있습니다. 자기는 지역주의 타파를 위해 정치인으로서 엄청난 희생을 감수해가며 정치를 했는데, 당신네들은 왜 지역주의에 기대어 편하게 정치만 하려하느냐라는 질타일 것입니다.
문제는 호남을 분열시킨 만큼 다른 지역에서 민주당에 대한 지지가 높아져야하는데 그렇지 않다는데 있습니다. 다른 지역에서 '플러스 알파'를 얻기는 커녕 오히려 ' 마이너스' 효과만 봤다는 말입니다. 참여정부 5년동안 노 전 대통령의 갖은 시도에도 불구하고 영남 민심은 꿈쩍도 하지 않았고, 지난해 대선과 총선은 민주당의 참패로 막을 내렸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과 호남지역 정치인들이 벌이고 있는 이번 논란의 뿌리는 여기에 있습니다. "호남 기득권을 버려야 다른 지역에서 지지를 끌어올 수 있다"는 주장과 '호남을 깨봤자 얻은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라는 뿌리깊은 인식과 노선의 대립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특히 지난 대선과 총선 참패이후, 호남인들의 소외감과 ' 호남 고립화'에 대한 두려움과 당혹감은 더욱 커졌다고 볼 수 있고, 이런 상황에서 노 전 대통령의 '호남 해체' 주장에 대한 호남인과 호남 정치인들의 반발이 커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민주당내 친노진영과 비호남권 의원들은 노 전 대통령의 '호남 해체' 주장에 대해 "전국정당화를 바라는, 민주당에 대한 애정어린 비판"이라면서 새겨들을 필요가 있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런 가운데 최근 민주당 안팎에서는 '영남 신당설'이 솔솔 흘러나오기도 합니다. 민주당내 친노 세력과 지난 4월 총선당시 대구 수성을에 출마했다 낙선한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 등 영남출신 친노 세력이 뭉쳐서 신당을 창당한다는 소문입니다. 한나라당의 '영남 패권주의'를 깨기위해서는 영남을 기반으로한 별도의 개혁정당이 나와야한다는 이유로, 노 전 대통령이 22일 인터넷에 게재한 글과 관련해 신당설이 계속 흘러나오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친노 진영은 근거없는 소문이라며 부인하고 있고, 현재로서는 실현 가능성도 아주 작아 보입니다만, 민주당 지지율이 계속 답보상태에 머물 경우 영남 신당설이 다시 수면위로 고개를 들고 나올지 모릅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노무현 전 대통령은 호남의 배신자일까요?
여기서 잠깐 민주당의 앞날을 어떻게 예측할 수 있을까요? 10%대 답보상태인 지지율을 끌어올 릴 수 있느냐, 2009년 국회의원 재보궐 선거와 2010년 지방선거 결과가 어떻게 되느냐? 국민적 관심을 끌 대권주자를 만들어낼 수 있느냐 등이 주요 변수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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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90년대 SBS 사회부의 민완기자였던 정준형 기자는 법조팀과 경제부 등을 거쳐, 사회부 사건팀을 이끄는 시경 캡을 역임한 뒤 지금은 정치부 야당팀의 현장반장으로 맹활약하고 있습니다. 때론 거칠면서도 정이 듬뿍 넘치는 인간미가 담긴 뜨끈뜨끈한 기사들을 보내오고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