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요일 오후, 연세대 오세철 명예교수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체포됐습니다.
'사회주의 노동자 연합'이란 단체의 활동이 국가보안법에 어긋난다며 경찰이 운영위원장인 오 교수 등 사노련 회원 7명을 체포한 겁니다.
체포된 이들은 서울 종로경찰서와 남대문경찰서 유치장에 입감되고 효자동사무소 건너편 후미진 곳에 자리잡은 옥인동 보안수사대에서 조사를 받았습니다.
순간 머리가 멍해지면서 '20세기의 망령이 21세기 대한민국에 다시 나타났구나'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경찰이 이들에게 적용한 혐의는 3가지입니다.
우선 국가보안법 7조 3항과 5항입니다.
찬양-고무죄인데요.
- 국가의 존립·안전이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위태롭게 할 목적으로 단체를 구성하거나 가입한 자는 1년 이상의 유기 징역에 처한다.
- 위의 목적으로 문서·도화 기타의 표현물을 제작·수입·복사·소지·운반·반포·판매 또는 취득한 자는 그 각 항에 정한 형에 처한다.
흔히 이적단체 구성과 이적물 배포라고들 말하죠.
진보 단체들은 국가보안법 폐지를 논의하기 전에 경찰의 이번 수사가 무리하기 짝이 없다고 비판했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이적행위'란 것 때문입니다.
'이적행위'란 '적을 이롭게 하는 행위'를 뜻하죠.
지구상에 하나밖에 남지 않은 분단 국가 대한민국의 주적은 '미수복지구'인 '북한'입니다.
따라서, 국가보안법의 대상은 '북한을 이롭게 한 행위'를 한 주체여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사노련이란 단체는 출범 당시 '북한 정권 역시 북한 인민을 착취하는 반동적 존재'라며 김정일 정권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명백히 밝히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이적행위'가 성립할 수 없다는 논리입니다.
경찰은 '이적 행위'란 법률 용어가 아니라며 사노련은 법률에 명시돼 있는 '반국가단체'로 볼 수 있고 '자유민주적 기본 질서를 위태롭게 할 목적을 가진 단체'로 볼 수 있다고 해석했습니다.
국가보안법은 2조에서 '정부를 참칭하거나 국가를 변란할 것을 목적으로 하는 국내외의 결사 또는 집단으로서 지휘통솔체제를 갖춘 단체'를 '반국가단체'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사노련은 정강에서 '혁명적 사회주의 노동자 정당 건설을 목표로 하고, 자본가들의 생산 수단을 몰수하고 모든 토지는 국유화할 것을 추구한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경찰은 이것은 대한민국의 근간인 '자본주의 체제'를 뒤흔드는 것이기에 광의로 '반국가단체'로 볼 수 있다고 해석했습니다.
또, 촛불 시위에서 사노련이 의제를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에서 현 정부의 경제 실책 심판으로 확대하고 자본가가 아닌 노동자에게 이익이 되는 경제 정책을 펴나가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유인물을 배포한 것은 '반국가적 목표를 가진 유인물 배포'에 해당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경찰은 이걸 입증하기 위해 사노련 사무실과 사노련 회원들의 집을 압수수색하고 이들이 만든 문건들을 압수해갔습니다.
경찰은 또 사노련이 촛불 시위에도 여러차례 깃발을 앞세우고 참가했다며 집시법도 위반했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법원은 이들에 대한 영장실질심사에서 사노련을 반국가단체로 보는 경찰의 범죄 소명이 부족하다며 구속영장을 기각했습니다.
반국가적 행위. 달리 말하면 매국노이고... 매우 무시무시한 말입니다.
어쩌면 자유민주주의-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가 타파를 외치며 사회주의를 주장하는 건 반체제 행위가 맞을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자신의 양심과 사상을 누군가에게 강요당할 이유는 없죠.
그렇기에 이 문제는 결국 '표현의 자유'와 '사상의 자유'의 문제로 이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수많은 이들이 국가보안법의 위헌성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과거 정치적인 목적으로 사용됐던 이 법의 효력이 21세기 대한민국에도 적용돼야 하는 가에 대해서도 많은 이견이 있습니다.
하지만, 어쨌든 실정법으로 존재하고 있기에 경찰은 법 조문대로 집행할 뿐이란 반론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은 이 사건이 터져나온 시점에 주목합니다.
왜 하필???
물론 경찰은 정치적 고려없이 쭉 해오던 사건일 뿐이라고 주장합니다.
사노련이 올해 2월 출범한 뒤 3월부터 쭉 내사를 해왔다는 겁니다.
하지만, 많은 이들은 이번 사건에서 또 간첩 사건과 함께 터져나온 공안 사건을 보면서 당국이 이른바 '공안 정국'을 조성하려는 듯한 냄새가 난다고 우려합니다.
국가보안법 위반...
21세기 대한민국엔 너무도 어울리지 않아 보입니다.
더구나 1라운드에선 '국가보안법의 망령'이 걷히는 쪽으로 결론이 났기에 경찰 수사가 무리한 것 아니었냐는 여론이 더 많을 것 같습니다.
다시 망령된 그림자를 길게 드리운 국가보안법, 그 꼬리는 언제쯤 걷히게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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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유재규 기자는 2005년 SBS 기자로 입사해 국제부를 거쳐 사회2부 사건팀 기자로 취재 현장을 누비고 있습니다. 따뜻한 시선과 섬세한 취재로 우리 일상의 사건.사고와 숨은 이야기들을 전하고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