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신사는 이른 아침 손수 운전대를 잡아 경기도 용인시 양지면 자택을 출발해 눈길을 갈랐다. 맞춘 지 그리 오래되지 않은 잿빛 차이나 칼라 양복 차림.
21일 '록의 살아있는 전설' 신중현(70)의 서울 행은 마지막 음반이자, 50년 음악 인생을 10장의 CD에 101곡을 집대성한 '신중현 앤솔러지(Anthology) 파트Ⅰ.Ⅱ 1958~2006' 발매 인터뷰를 위해서였다.
6개월 간 리마스터링 작업을 거쳐 히트곡과 희귀 트랙으로 구성, 대중음악계 사료로서의 가치도 있다.
덩 샤오핑처럼 차이나 칼라 양복을 입은 그는 "난 넥타이는 못매. 목이 졸리는 것 같아, 매번 답답해"라며 너털 웃음을 짓는다.
"가장으로선 최악"이라며 "밥만 먹으면 기타를 잡았다"는 그의 얘기는 동네 할아버지 무릎을 베고 듣는 옛날 이야기 같다. 중간 중간 "내가 너무 열내서 얘기하나"라며 머쓱해 하는 표정에는 아이같은 천진함도 묻어난다.
그러나 무대 조명에 반사됐던 작은 체구의 카리스마는 촌철살인의 행간 속에 그윽히 드리워졌다.
"예술적 감각 없으면 정치하면 안된다", "유신정권 이래 잔재한 음악계 규제 풀면 100만 실업자를 구한다"고 힘줘 말하는 모습은 '대중음악계 거장'의 이상이었다.
--2006년 12월 막을 내린 은퇴 공연 이후 어떻게 지내셨나. 아쉬운 마음도 있었을텐데.
▲공연 후 무대에서 내려올 때면 매번 허하다. 이런 기분은 아예 몸에 배어 있다. 50년간 늘어놓은 게 많으니 정리하며 보냈다. 악보가 없는 건 머릿속에 있으니 다시 토해냈고, 집도 시골이어서 바람들어오는 데는 비닐로 막고, 나무로 땜질도 하며 보냈다.
--왜 공연 무대 은퇴를 결심했나.
▲우리나라에선 공연을 제대로 할 수 있는 여건이 힘들다. 이번에도 어거지로 하다시피 했는데 나이도 들고 이제 늙은 모습도 보여주기 싫었다.
--'빗속의 여인' '님아' '커피 한잔' '아름다운 강산' 등 10장의 CD에 담긴 곡들은 50년 인생의 분신들이다. 음악인, 또한 가장으로서의 길을 평가한다면.
▲인간에게 후회는 연속이지만 나로선 더 이상 바랄 게 없다. 1957년 미8군 무대, 58년 첫 음반 작업, 62년 결성해 64년 데뷔 음반을 낸 애드 포(Add 4) 시절까지 지금도 필름 돌아가듯이 다 보인다. 음악하는 과정 밖에 기억나는 게 없다. 인간이면 그렇듯 난 항상 외로웠고 음악이 있어 버텼다. 인간적으론 '제로'다. 독단적이고 내성적이고 사교성도 없고 냉정한 모습도 많이 보였다.
가장으로서도 최악이었다. 허허. 습성이 밥 먹으면 기타를 잡았으니. 아내, 애들 쳐다도 안보고 밥만 먹으면 기타를 쳤다. 가족들도 그러려니 했다. 아들 셋도(신대철ㆍ윤철ㆍ석철) 음악하고 있고, 무난하게 사는 게 어려운데 건강하게 살고있으니 감사하다.
--6개월에 걸쳐 리마스터링 작업을 하며 작곡 및 연주했던 기억들이 새록새록 했을 법하다.
▲옛날 곡을 심각하게 들을 기회가 없어 전곡이 그랬다. 창고에서 1950년대 릴 페이프를 찾아내는 등 이런 과정이 전부 새로웠다. '과연 내가 이렇게 했었나', 당시 내 음색과 연주는 지금 체질로는 못 낸다. 신기하고 가치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창작 때의 에피소드는 별로 없다. 늘 정신적으로 '피크(Peak)'여서 끝나면 스트레스를 받았다. 술도 엄청 먹었고 담배 꽁초도 수북이 쌓였다. 지금은 술 담배를 끊었지만….
--1957년 미 8군 무대에서 재키(Jacky)란 이름으로 음악 활동을 시작했는데.
▲고 2때 중퇴 직후 6개월 간 굶으면서 서울 거리를 헤맸다. 운이 좋아 미8군에 들어갔다. 15~20인조 풀 밴드에 소속돼 뒷 자리에서 조명도 못 받고, 열심히 기타 코드를 눌렀다. 키가 작아서 보이지도 않았다. 밥값이 50원, 100원 할 때였는데 처음 월 3천원을 급료로 받았다. 겨우 한달 끼니는 해결할 수 있었다. 잠자리가 없어 악기 창고에서 잤지만 극락이었다. 음악하며 생존하는데 더 이상 바랄 게 없었다.
--애드 포, 덩키스(Donkeys), 퀘스천스(Questions) 등 그룹 사운드 시절은 어떻게 돌아보나.
▲그때 뮤지션은 진짜 음악가다. 미8군 무대는 6개월에 한번 오디션을 본 후 소속이 되고 급료를 받으니 안정됐다. 설 자리가 없어 쫓겨나는 시대가 아니니 음악에 열중할 수 있었다. 잡념이 없으니 추구하는 음악성에 근접하기 위한 노력을 많이 했다. 그때 음악은 인간성이 살아있었다.
--김추자, 펄 시스터즈, 장현 등 수많은 가수들과 작업했다. 가장 매력적인 보컬은 누구였나.
▲난 늘 신인을 '피크 업(Pick Up)'했고 그들은 내 노래로 유명해지면 나갔다. 가수가 가진 음악성만으론 힘들었다고 생각한다. 내 모든 것을 주입하며 뜯어고쳤다. 그들의 목소리만 빌린 것이다. 나에게서 받은 걸 소화하면 스타가 돼 있었다. 그래서 가수보다 곡에 대한 애착이 크다.
--1970년대는 신중현의 음악인생에 명암이 혼재된 시절이었다. 유명세를 떨치던 전성기였던 동시에, 유신정권 시절인 74년 대마초 파동을 겪었고 이후 노래들이 퇴폐적이고 불온하다는 이유로 금지됐는데.
▲명암이 엇갈린 시기다. 1970년대는 음악 인생의 '피크(Peak)'였다. 가수들이 내 노래로 인기를 끌며 '신중현 사단'이라 불렸고 난 유명한 사람이었다. 허허. '피크'는 꺾이기 마련이니 대마초 사건에 휘말려 하루 아침에 낙인이 찍혔다. '미인' '거짓말이야' 등 내 노래는 무조건 금지되며 표적이 됐다.
이때 미8군 계통에서 숨어서 음악한 적도 있다. 미8군 클럽 NX1에서 책임자들이 허가를 내줘 연주하도록 보호해줬다. 오산-송탄 인근 기지촌에서도 미군을 대상으로 연주했다. 이때는 관객의 비위에 맞추는 작업이니 외국 음악을 카피해 연주한데다, 그런 시기가 10년ㆍ20년이 될지 모르니 심적으로 고통이 컸다. 낮에는 동료들과 낚시를 해서 붕어 매운탕을 끓여 먹곤 했다. 나, 붕어 매운탕 끝내주게 잘 끓인다. 밭에서 고추, 무 뽑아다가 손으로 쪼개 넣고 소금에 고춧가루만 있으면 됐다. 요리 시간을 못 기다리는 동료들은 강에서 물고기를 잡아 날걸로 먹기도 했다. 이때는 워낙 고생을 해서 기억이 또렷하다.
--당신의 기타 주법은 독창적이다. 후배 뮤지션들에게 조언한다면.
▲기타의 코드는 모두 같아 새로운 테크닉이 나오기 어렵다. 누가 잘 치느냐는 개인적인 능력이다. 이걸 탈피하고 싶어 3-3 주법을 개발했다. 이건 기존 주법과 무관한 체계여서 후배들에게 강요할 수 없다. 단지 내가 이런 걸 하고 있다는 것이며 한권의 기초 교본을 인터넷에서만 낸 적이 있다. 다음 교본을 낼 고려도 하고 있다. 얼마나 열심히 하고, 감정을 녹이느냐 등 인격에 따라 소리가 다르다.
--디지털 음악시장으로의 전환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나.
▲음반 시장이 고전한 이유는 CD의 개념을 나쁘게 봐서 그렇다. 음악이 대중에 멀어진 것도 차갑게 느끼는 디지털화 때문이다. 그러나 업그레이드 된 컴퓨터 프로그램을 최대한 이용해 옛날 인간적인 아날로그 사운드를 더 좋게 들려줄 수 있다. 대중의 감정을 변화시켜 음악을 사고 싶은 욕망이 생기도록 해야 한다. 앞으로는 더 좋아질 것이다.
무엇보다 우리에게 지금 상실된 것은 인간만이 가진 '예술의 감각성'이다. 요즘 음악은 예술성이 없다. 복받침, 눈물 등 인간 감정을 아우르는 힘이 없어 외면 당한다. 유럽인들처럼 예술적 감각을 싹틔우려면 교육부터 달라져야 한다. 그래야 창작이 되고 사회가 세련되진다.
--록 음악의 퇴조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나.
▲결정적인 건 유신정권 이후 그대로 남은 규제들 때문에 연주를 마음대로 못한다는 것이다. 죽기 전 (규제를) 푸는 게 숙제다. 뉴욕에선 길에서도 밴드가 연주한다. 음악을 규제하는 나라는 우리 밖에 없다. 우린 공무원 마인드부터 바뀌어야 한다. 이승만 자유정권 시절 난 명동 식당과 살롱에서도 공연했다. 널린 게 음악감상실이었다. 유럽, 미국 등지처럼 클럽 문화가 활성화 돼 카페에서도 밴드 연주를 할 수 있어야 한다. 음악계 규제를 풀면 음악하던 100만 이상 실업자를 구제할 수 있다. 우리나라엔 멋있는 뮤지션이 많다. 내성적이고 자기 표출 못하고 찌든 생활을 하니 퇴폐, 마약쟁이 등 나쁜 이미지로 전락한다. 또 설 자리가 없으니 사회적인 인재가 폐인으로 몰리는 것이다. 콘크리트 문화에 음악을 불어넣어 인간들이 활력을 가지면 문화가 꽃피고 예술성이 살아나는 도시가 된다. 외국에선 음악 못하면 대통령도 못한다. 예술감각 없으면 정치하면 안된다. 이번에 대통령이 바뀌니 '잘해주겠지' 희망 갖고 있다. 대통령 만나고 싶은데 안 만나줄테지. 허허.
--엔터테인먼트 콘텐츠를 '딴따라' '저급 문화'로 여기는 인식도 문제가 있지 않나.
▲연예 감각이 없는 것이다. 미8군 쇼할 때 우리가 탄 버스는 비포장길을 따라 먼지를 온통 뒤집어쓰고 갔다. 그러면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이 우리들이 내릴 때 손을 잡아주고, 식사 대접하고 악기를 날라줬다. 특등 대우였다. 엔터테인먼트 콘텐츠를 높게 평가했다. 그만큼 음악은 그들에게 중요한 개념이었다. 우리같이 음악인이 천대받는 나라는 없다.
--앞으로의 음악 활동 계획은.
▲50년간 벌려놓은 걸 정리하는 단계다. 음악의 근본적인 것, 음악은 한차원 다른 게 있다. 나만의 인터넷 공간에서 발표할 음악을 준비할 것이다. 기록이 될테니 남겨두면 언젠가 검색이 되겠지.
--김완선의 '리듬 속에 그 춤을' 등 트렌디한 음악도 썼다. 최근 원더걸스 '텔 미(Tell Me)' 열풍이 일었다. 후배들의 음악을 보며 느끼는 것은.
▲후배들의 음악도 감동을 준다면 보고 듣는다. 노래가 진짜 마음에 와 닿고 날 움직이면 왜 안 듣겠나. 들으려고 노력했지만 몇소절 듣다가 돌려버리게 된다. 뭔가 어떻게 해야한다는 주문이 아니라 단지 나한테는 와닿지 않는다는 것이다.
(서울=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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