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일부터 22일까지 평양에서는 제13차 남북경제협력추진위원회(경추위) 회의가 열렸습니다.
그 두 번째 취재기를 올립니다. 이번에는 회담과 협상 이야기입니다.
우선 경추위 회의를 설명드리면 지난 2001년 1차 회의를 시작한 남북 간의 경제협의기구입니다. 이번 회담에서는 우리 측 진동수 재정경제부 제2차관이 북측에서는 주동찬 민족경제협력위원회(민경협) 부위원장이 각각 위원장으로 나섰습니다.
우리 재경부는 아실테고, 그럼 북측의 민경협은 어떤 단체인가?
민경협은 지난 2004년 북한 내각 산하에 구성된 남북 경제협력 전담 단체입니다. 민경협 위원장은 장관급이고, 부위원장들이 몇 명 있습니다. 주동찬 부위원장은 그 가운데 한 명입니다. 주 부위원장은 현재 개성공단을 총괄하는 북측의 중앙특구개발 총국장 자리도 겸하고 있습니다.
대북 협상은 늘 어렵다고 합니다. 북한의 협상 태도가 대부분 상식을 뛰어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밀고 당기기식 줄다리기를 하다가 갑자기 멋대로 줄을 놓아버리는 식입니다. 그럼 우리는 줄다리기한 시간과 노력이 아까워 북한을 다시 불러 줄다리기를 하자고 설득하게 되고, 이렇게 시작된 줄다리기는 우리가 이겨도 개운치 않습니다.
그런데 이번 경추위 회담을 취재하다보니 이런 북한의 협상 태도가 오히려 기존의 협상의 법칙을 철저히 따른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서울에 돌아와 취재 수첩과 허브 코헨의 저서 '협상의 법칙'(너무 오래된 책이네요)을 같이 펼쳐봤습니다.
협상의 법칙에 따르면 협상의 중요 요소는 힘, 정보, 그리고 시간입니다.
힘은 관행이나 기존 규칙을 이용해 상대방을 압박하는 것이고, 정보는 상대에 대한 정보를 최대한 많이 알아내는 것, 그리고 시간은 협상에 걸리는 시간과 상대를 기다리게 하는 시간 등 시간과 관련된 전략을 말합니다.
그럼 북한은 이런 법칙들을 어떻게 사용했을까요? 그리고 우리 협상팀은 어떻게 대응했을까요?
1. 관행의 힘을 무시하라.
북한의 전략은 평양에 도착한 다음달인 19일부터 시작됐습니다.
오전 10시 첫 전체회의가 시작되기 20분 전, 북한의 주동찬 부위원장은 연락관 접촉을 통해 갑자기 우리 측에게 전체회의에서 내놓을 기조발언문과 식량차관제공합의서, 공동보도문 초안을 내놓으라고 요구했습니다. 관행을 무시한 요구였습니다. 회담은 이후 7시간40분 동안 공전됐습니다. 우리 측이 버티지 못하고 일부라도 양보했다면 북한은 또 다른 관행을 무너뜨리며 우리를 몰아붙였을 겁니다.
2. 더 많은 정보를 이용하라.
19일 오후 5시40분에 시작된 전체회의. 주동찬 부위원장은 이번엔 2.13 합의 이행을 촉구하는 진동수 차관 앞에서 곧바로 회의장을 일방적으로 퇴장하는 돌출행동을 했습니다. 하지만 주 부위원장의 행동은 사실 남측의 2.13 합의 촉구 정보를 먼저 알고 실천한 철저히 계산된 행동이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회담 내용을 다른 곳에서 듣고 있는 북측 수뇌부에게 자신의 강력한 태도를 각인시키고 우리 측에는 2.13 합의 촉구가 '경추위 전체를 깨뜨릴 수도 있다'는 협박을 한 셈입니다.
이후 위원급 접촉(우리 측 김중태 통일부 남북경제협력본부장-북측 방강수 민경협 정책국장)에서 우리 측은 공동보도문에 2.13 합의 이행 문구를 넣자고 계속 주장했지만 북측은 콧방귀로 뀌지 않았다고 합니다. 결국 22일 최종 합의문에도 2.13 합의 이행 문구는 빠졌습니다.
정보를 이용한 북한의 또 다른 전략은 모르쇠였습니다. 열차시험 운행을 위한 군사적 보장 문제를 논의하자는 우리 측의 제안에 북측은 '우리는 모른다. 군부의 몫이다'라며 입을 다물었습니다. 우리 측에게 '우리에게 말해봐야 소용없다'는 정보를 흘리면서 우리 측의 의지를 꺽어버리는 식입니다.
3. 협상 시간 자체를 나의 전략으로
20, 21일까지 수차례 이어진 위원급 접촉도 성과 없이 끝났습니다. 호텔 3층 접견실에 양측 위원급들이 드나들 때마다 뛰어다닌 우리 카메라 기자들(SBS 이병주 기자와 MBC 오령 기자), 정말 고생했습니다.
경추위 협상의 하이라이트는 22일 새벽 2시15분부터 4시55분까지 2시간40분 간 진행된 위원장급 접촉이었습니다. 우리 측 진동수 차관과 북측의 주동찬 부위원장이 최종 담판을 위해 자리를 마주 앉은 겁니다. 밖에서 뜬 눈으로 밤을 지세운 취재팀도 그렇지만 안에 양측 위원장들도 보통 아니었습니다. 회담장 안으로는 계속해 물, 커피, 담배와 재떨이가 들어갔고, 수시로 실무진들이 서류를 들고 들락날락했습니다.
협상에 투입되는 시간이 많을 수록 협상 자체의 가치는 높아지게 됩니다. 밤샘 협상이나 마라톤 협상 끝에 합의나 타결이 이뤄지는 것도 협상을 깨는 것에 대한 부담이 커지기 때문입니다. 이 때 중요한 것은 상대방에게 여유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직 협상에 많은 투자를 하지 않았고, 우리 뜻대로 협상이 안 되면 지금까지 들인 시간과 노력을 포기할 수도 있어'라는 모습을 상대방에게 보여주는 겁니다.
하지만 사실 적진인 평양에서 협상을 진행하는 우리팀은 불리할 수 밖에 없습니다. 낯선 평양에서 그리고 통제된 호텔 안에만 있다보면 무의식적으로 빈틈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진 차관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인내와 끈기로 여유있게 주 부위원장을 대했습니다. 진 차관은 밤샘 위원장급 협상이 끝난 뒤에도 곧바로 합의문 문구 조정을 위한 위원급 접촉을 지시했고, 위원급 접촉 이후에는 역시 곧장 오전 8시반 종결회의 일정까지 잡았습니다.
최종 협상 결과는 1. 쌀 차관 지원 약속하되 2.13 합의 이행과 연계하겠다는 뜻을 북측에 분명히 전달했다는 것 2. 열차시험운행 날짜(5/17)를 확정하면서 군사적 보장조치 부분은 추가 노력하기로 한 것. 3. 그리고 열차시험운행이 이뤄진 후에 경공업.지하자원 사업이 실시된다는 점을 명문화한 겁니다.
협상 결과에 대한 평가는 엇갈리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협상장에서 직접 북한을 보니 결코 만만한 대상은 아니었습니다.
모든 협상팀 관계자분들, 정말 고생하셨습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