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람] '개혁보수' 되새기며 마지막 도전…유승민의 길
...겪은 풍찬노숙의 시간에 대해 들어보고 싶었고 그 과정에서 이 사람이 얼마나, 어떻게 달라졌는지 살펴보고 싶었다. 이 사람이 쓴 <나는 왜 정치를 하는가>라는 책을 보면 고마운 사람에 대한 이야기도 미운 사람에 대한 이야기도 거의 없다. 다른 사람에 대한 이야기는 애써 아끼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이 부분이 특이하게 느껴졌다. 그 이유를 알고 싶었고 그가 정치를 하면서 만난 사람들에 대한 평도 듣고 싶었다. 지난 7월에 한 번, 지난 9월에 한 번, 모두 두 차례에 걸쳐 인터뷰를 요청하는 문자를 보냈다. 답은 없었다. 지난달 27일 이 사람에게 문자가 왔다. 답이 늦어 미안하다, 시간이 되면 차나 한 잔 하자는 내용이었다. 그의 뒤늦은 문자가 반가웠지만 조금 난감하기도 했다. 이 사람은 분명히 대선 캠페인의 한 방법으로 인터뷰에 응하는 것일 텐데, 아직 대선 경쟁 구도가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이 글이 한 후보의 주장이 일방적으로 전달되는 모양새가 되는 것이 조심스러웠다. 그런 부담이 없지 않았지만 한 번 만나보고 싶었던 인물을 피할 이유가 되지는 못했다. 3. 지난달 16일 유승민은 여의도에 '희망22'라는 이름의 사무실을 열고 대선 출마를 선언했다. 지난 2월 자유한국당과 새보수당의 합당과 총선 불출마를 선언한 이후 여의도 복귀는 9개월 만이었다. 유승민은 이번 도전이 자신의 마지막 대권 도전이 될 것이라고 했다. 그가 몇 차례 기자들을 만나 했던 이야기를 다시 듣고 싶은 생각은 없었고 그 말을 이 지면에 옮겨 적을 이유도 없다. 그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9개월 동안 무엇을 했는지, 무슨 생각을 하고 지냈는지 알고 싶었다. 2015년 원내교섭단체 대표 연설 이후 드라마틱하게 전개된 그의 지난 5년 남짓한 이야기가 그의 미래보다 훨씬 궁금했다. 지난 9개월의 공백기에 대해 자세히 말하지는 않았다. 말하자고 들면 말할 게 꽤 있을 법한데 그는 말을 아꼈다. 정치권에 들어와 조용히 보낸 시간이 없어 맘 먹고 쉬었고 자신의 정책 비전을 담은 책도 준비했다고 했다. '지난 9개월 동안 저한테 권력 의지가 있느냐. 2016년 탈당 이후에 이렇게 실패를 했는데 이런 상황에서 저한테 다시 대통령에 도전하려는 의욕이나 용기나 기운이나 에너지가 여전히 남아있는지 스스로 점검한 시간이었습니다. 내가 왜 대통령이 되려고 하는가, 내가 대통령이 되면 뭐가 더 달라지고 국민들에게 뭐가 더 좋아진다고 설득을 할 거냐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지난 시간에 대해서는 말을 아꼈지만 향후 비전에 대해서는 할 말이 차고 넘쳤다. 그는 대권에 도전하는 이유, 보수 진영의 지지율 회복 방안, 자신에 대한 보수층의 거부감 등에 대해 구체적인 숫자를 들어가며 상세히 설명했다. 대권 도전을 선언하면서 그가 야심 차게 준비해서 들고 나온 것은 '경제'였다. '제가 대선 슬로건으로 내세우려는 게 '결국은 경제다'라는 말입니다. YS정권 이후 매 정권 5년을 거칠 때마다 1%포인트씩 성장률이 떨어지고 있습니다. 저출산, 양극화를 비롯한 우리나라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신성장 시대를 열지 않으면 안 됩니다.' 경제 성장, 그 자체가 시대의 최우선 가치가 되어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2015년 원내교섭단체 대표 연설에서도 확인되니 새로운 주장은 아니다. 보수는 성장, 진보는 분배라고 하면 그는 신성장 시대라는 슬로건을 내세우는 것으로 보수주의자의 정체성을 유권자에게 호소하려는 의도도 있어 보였다. 저성장이 대세로 자리 잡은 거 아니냐, 이 시대에 웬 성장 타령이냐는 반론을 그는 예상하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이미 성장 시대는 끝나고 지금은 분배나 복지가 중요할 때 아니냐 우리나라 경제는 낙수효과도 없고 고용 없는 성장이 자리를 잡아서 과거와 같은 고성장 시대로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하는데,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저성장을 극복하지 않으면 저출산, 양극화 같은 핵심 과제는 해결이 어렵습니다.' 따뜻한 보수를 말하며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배려를 강조하고 공화의 가치를 높이 들었던 그가 성장만이 문제의 근본 해법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다소 퇴행적인 것이 아닌가 싶었지만 이에 대한 그의 소신은 확고했다. 이런 정책 비전을 담은 책을 다음 달쯤 낼 예정이라고 했는데 자신이 던지는 의제가 활발한 논쟁의 대상이 되기를 기대하는 눈치였다. '지난 대선에서 사람들이 이게 표가 됩니다, 저게 표가 됩니다, 라고 저한테 던져준 공약들, 이번에는 안 하려고 합니다. 대선이 가까워질수록 여야 후보들이 거의 비슷한 공약을 하지 않습니까. 그게 다 사실은 매표성 공약입니다. 저는 그런 것에서 탈피해서 대선을 치러보고 싶습니다. 저는 이번에 이런 개혁하지 않으면 우리는 망한다 , 저는 이런 개혁을 하겠다는 것을 밝히는 것으로 승부를 보려고 합니다. 그러면 제가 나중에 결과가 좋지 않더라도 제 스스로에 대한 후회가 없을 거 같습니다.' TK 지역 유권자를 비롯한 일부 보수 유권자들의 거부감을 극복하고 자신이 중심이 되어 보수가 정권을 잡는 방안을 말할 때 이 사람의 몸에서는 열기가 느껴졌다. 그의 꽤 길었던 이야기를 요약하자면 2012년 대선에서 박근혜 후보 득표율과 지난 총선에서 야권이 받은 득표율을 비교하면 아직도 10%의 유권자들이 보수 정당 지지로 돌아오지 않고 있다는 것, 돌아오지 않은 10%의 유권자는 수도권의 젊고 중도적인 사람들로 볼 수 있는데 이들을 보수로 끌어오는 데 자기 만한 적임자가 없다는 것, 자신이 수도권과 젊은 유권자들에게 통하는 것이 입증되면 TK 지역 유권자들도 정권 교체를 위해 자신에 대한 거부감이 있더라도 결국 자신을 선택할 것이라는 논리였다. 4. 역시 이 사람의 전성기는 2015년 새누리당 원내대표 시절이었다. 국회 본회의장은 그동안 이 땅의 기라성 같은 정치인들이 숱한 웅변을 쏟아낸 무대지만 유승민의 2015년 연설을 능가하는 것은 찾기 어렵다. 이 글을 쓰기 위해 그 때 연설문을 다시 읽어봤고 영상을 찾아봤다. 역시 명문, 명연설이다. 44분이 넘는 연설 시간이 짧게 느껴진다. 저런 글 한 편, 저런 연설 한 번 하려고 정치를 하는 것일 수 있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이 글이 왜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과 영감을 주고, 당시 야당 대변인까지 나서 보수의 갈 길을 보여준 명연설이라는 찬사를 던졌을까. 말하는 사람이 정의를 독점하려 들지 않기 때문이다. 자신과 생각이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유승민은 당신들이 틀렸다고 말하는 대신 말한 사람의 진의가 무엇인지를 먼저 헤아리려고 했다. 소득주도성장론을 포함한 야당의 주장도 국가의 미래를 위한 고민과 진정성이 담긴 것이라고 평가했다. 결코 짧지 않은 이 글에서 유승민은 누구도 비난하지 않는다 . 경쟁자는 악이고 나만이 선이라는 이분법이 아니라 내가 틀리고 당신이 맞을 수도 있다고 인정한다. 용기가 있기 때문이다. 증세 없는 복지는 허구라며 최고 권력자에게 현실을 직시할 것을 촉구하는 것, 우리 당의 공약을 지킬 수 없게 됐다고 고백하는 것, 양극화 문제를 시대의 과제로 제시한 전직 대통령에게 찬사를 보내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말이 아니었다. 진영을 넘어 옳은 것은 옳다 하고,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하는 용기가 있기에 그의 글과 말은 울림이 컸다. 철학이 있기 때문이다. 남이 써준 글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을 자신의 글로 표현한 이 글에는 보수의 새로운 길을 진지하게 모색하는 한 지식인의 고뇌가 그대로 담겨 있다. 공동체가 당면한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공화의 가치를 역설한 그의 제안은 몇 마디 그럴 듯한 슬로건과 책략으로 정치를 하던 사람들의 말과는 차원이 달랐다. 이 글이 좋은 글인 또 하나의 이유는 쉽게 쓴 글이기 때문이다. 그의 연설은 누구나 들으면 이해할 수 있다. 어려운 단어를 쓰지 않고 단문으로 의미를 자연스럽게 쌓아 올린다. 긴 글이지만 장황하지 않다. 글이 꽉 차 있지 않고 곳곳에 여백이 있으니 울림의 공간이 크고 넓다. 전업작가들의 뺨을 때릴 만한 솜씨다. '대학 다닐 때 제가 경제학을 공부하지 않는다면 소설을 써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한 적은 있습니다만 그런 쪽으로 훈련을 받은 적은 없습니다. 다만 제가 글을 보는 기준은 되게 엄격하고 높은 거 같습니다. 글이 명료하지 않으면 싫어합니다. 읽기 쉽게, 알기 쉽게...
SBS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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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춘호(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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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2.18 |
정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