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프] 유쾌하고 또 유쾌한 사람, 작가 정지아
...외동딸이 이 사람, 작가 정지아다. ‘지아’라는 이름은 자신들이 빨치산 투쟁을 벌였던 지리산의 ‘지’와 백아산의 ‘아’를 따 지었다. 어머니 나이 마흔, 아버지 나이 서른여덟 살에 본 외동딸에 대한 부모의 사랑은 극진했다. 어린 시절 아무리 추운 날에도 차가운 신발을 신은 적이 없다. 어머니는 신발을 가슴에 품어 체온으로 따뜻하게 해 줬다. 아버지는 딸이 좋아하는 채소를 손수 길러 타계하기 직전까지 입 짧은 딸의 먹거리를 챙겼다. 아버지가 ‘빨갱이’이었다는 것을 안 것이 1974년, 초등학교 4학년 때였다. ‘반공방첩’, ‘때려잡자 공산당’이라는 구호가 곳곳에 붙어있고 공산당은 머리에 뿔 달린 도깨비로 묘사되던 시절이었다. 아버지가 빨치산이라는 사실을 알고 어머니를 졸라 초등학교 5학년 때 서울로 이사했다. 아버지는 교도소에 수감 중이었다. 서울은 아버지가 ‘빨갱이’라는 사실을 아무도 모르는 곳이었지만 그 대신 가난이 기다리고 있었다. 화장실도 없는 셋집에 살면서 처참한 가난을 경험했다. 그러나 가난은 그다음에 닥친 시련에 비하면 어려움도 아니었다. 중학교 1학년 때 어머니 역시 빨치산이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아버지만이 아니라 어머니까지 사회주의자라는 것을 알게 된 사춘기 소녀의 심정이 어땠을지 상상하기 쉽지 않다. 공부 잘하고 나가는 백일장마다 상을 독차지하던 똑똑한 ‘백일장 소녀’가 반공이 국시인 나라에서 자신의 미래가 어떠리라는 것을 모를 리 없었다. 나라 전체가 ‘반공만이 살길이다’고 외치던 1970년대 ‘사회주의자’ ‘빨치산’이라는 말은 입에 올리는 것조차 두려운 단어였고 당사자와 그 가족에게 ‘빨갱이’라는 낙인은 벗어날 길 없는 천형이었다. 그 천형에서 벗어나고 싶어 닥치는 대로 책을 봤고 절을 찾고 교회를 다녔다. 그렇지만 누구도, 어디에서도 이 문학 소녀의 절망을 위로해 주지도, 가야 할 길을 가르쳐 주지도 못했다. 중고등학교 시절은 부모와의 불화, 좌절과 방황의 시기였다. 학교 성적이 제대로 나올 리 없었다. 재수 끝에 1984년 중앙대학 문예창작과에 입학했다. 외동딸이 법대에 가서 기자가 되기를 바랐던 아버지의 소망과는 어긋나는 선택이었지만 작가의 길은 어쩌면 운명처럼 예비된 길이었다. 현실적으로 ‘빨치산의 딸’이 선택할 수 있는 길도 많지 않았다. 대학에 들어가 한국 현대사를 공부하면서 ‘혁명가’ 부모의 삶을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고 부모와도 화해할 수 있었다. 자신이 ‘가장 깨끗하고 건강한 핏줄을 이어받은 민중의 딸’이라고 생각했고, 학생 운동은 정해진 길이었다. 1988년 이태가 쓴 &<남부군&>을 시작으로 한국 현대사에서 잊힌 존재였던 빨치산 관련 수기가 쏟아졌다. 조정래의 &<태백산맥&>이 나온 것도 그즈음이었다. 1988년 실천문학사 대표였던 소설가 송기원이 아버지를 찾아와서 당신들 사연을 소설로 쓰고 싶으니 도와 달라고 부탁했다. 아버지는 “내 이야기는 내 딸이 쓸 거요”라며 거절했다. 그 무렵 이 사람은 지하 조직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 이른바 사노맹의 문학 기관지 &<노동해방문학&>에서 일하고 있었다. 출판사는 문단에 등단한 적도 없는 이 사람에게 매달 집필료 30만 원에 집필실까지 제공했다. 그렇게 해서 나온 &<빨치산의 딸&>은 소설의 형식을 빌렸지만 빨치산 출신 아버지와 운동권 딸이 함께 쓴 역사 기록이다. 몇십 년 전 이야기를 어제 일처럼 말하는 아버지의 기억력에 딸이 문학적 표현을 입히고 시대 상황을 더했다. “아버님 기억력이 매우 좋으셨습니다. 그래서 몇 월 며칠 무슨 전투에서 남부군 대대장은 누구 휘하 몇 명 인솔하고 총 몇 정 획득, 이렇게까지 기억을 다하셨습니다.” 아버지는 그 책을 보고 ‘읽을 만은 하더라’고 했고, 어머니는 ‘너무 잘 썼다’면서도 혹시라도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을지 염려했다. 자신들의 가장 빛나고 뜨거웠던 청춘을 딸이 기록해 준 것만으로도 부모는 감동했을 테고, 딸은 읽을 만하다는 부모의 말 한마디로 집필의 수고를 보상받았다. &<실천문학&>에 연재된 이 글은 나올 때마다 화제를 모았고, 1990년 3권으로 출판돼 한 달 만에 10만 권이 팔렸다. 한 순간에 유명인이 되었고 ‘작가님’ 소리를 들었다. “제가 그때 스물다섯 살 어린 나이였는데 세간의 관심을 받아서 여성지 인터뷰도 하고 그랬는데 정말 그런 거 싫었거든요. 그렇지만 조직에서 널리 알려서 책 많이 팔아서 돈 모아야 되니까 하라고 해서 나갔단 말이에요. 사람들이 제 글 좋다고 하고, 저 스스로 소설가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는데 작가님, 작가님이라고 하는데 좀 무서워졌어요. ‘이거는 내 진짜 모습 아니다, 이런 게 필요한 시기에 이런 글이 나왔을 뿐이고 이런데 휘둘리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앞으로는 내가 쓰고 싶은 글, 좋은 글만 쓰겠다, 그리고 그것으로 돈을 벌거나 명예를 탐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습니다.” 20대 청년 시절 혜성 같이 등장했지만 빛나던 시절은 길지 않았다. 이후 출판사에도 다녔고 대학에서 공부를 계속해 석사,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96년에는 조선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정식으로 등단했다. 민족사관고 교사로 교단에 선 적도 있고 중앙대를 비롯해 몇 개 대학에서 꾸준히 강의했고 지금은 조선대학교 초빙교수로 있다. 한번 결혼해서 아들 하나를 두었고 지금은 혼자 지낸다. 본인은 열심히 살았다고 했지만 &<빨치산의 딸&> 이후 삶은 곳곳이 공백처럼 느껴진다. - 1990년대 이후에는 단체나 조직 활동을 하신 거 같지는 않더군요. “저는 글을 쓰는 사람이어야 되겠다는 생각을 했고요. 조직 활동은 때로는 원칙을 무시하고 막 깨고 나가야 되는 측면도 있는데 저는 그런 거 하나하나가 굉장히 불편했고요. 저는 삶 속으로 스며들지 않는 이론 이런 게 불편했어요. 그런데 조직에는 그런 사람뿐이더라고요. 조직 활동이 내게는 안 맞는 거 같다, 나는 글로 말하면 되지 않나 하는 생각도 있고요.” 매년 두세 편의 단편을 발표했고 몇 권의 소설집을 냈지만 다작은 아니었다. 김유정문학상, 이효석문학상, 요산문학상 등을 받았고 평단의 평가도 나쁘지 않았지만 &<아버지의 해방일지&>가 터지기 전까지 흥행에 성공한 작품은 찾기 어렵다. &<아버지의 해방일지&>가 나오기 전까지 ‘정지아’ 하면 여전히 &<빨치산의 딸&>이었다. “저는 글을 많이 써야 된다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문학이라는 것만 붙들고 고민하는 것이 저는 조금 아닌 거 같았어요. 저는 ‘문학의 고통은 삶의 고통을 뛰어넘을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사람으로 잘 살면 그 성장이 내 글에 담기겠지 뭐 이런 마음이었어요. 그러니까 뭐 급할 거도 없었고요. 그냥 진짜 쓰고 싶은 거, 내가 세상을 보는데 달라진 것 이런 것들을 일 년에 두 편, 많을 때는 서너 편 쓰면서 세월을 지내왔던 거 같아요” 청소년용 위인전을 많이 썼고 &<천국의 이야기꾼 권정생&>같이 정성을 기울인 만큼 호평을 받은 책도 있지만 어떤 책들은 돈을 벌기 위해 쓴 것도 사실이다. 이번 책이 뜨기 전까지는 성공과는 거리가 먼 삶이었다. 열심히 살았지만 가난했고, 공부를 했지만 대학교수가 되지 못했고, 작가지만 내세울 만한 작품을 남기지 못했다. 무엇보다 빨갱이의 딸이었다. 한 번도 주류인 적이 없었고, 주류일 수도 없었다. -젊은 나이에 대단히 화려하게 등장하신 셈인데 그 이후 30년이 넘는 세월은 크게 이름이 나는 삶은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삶이 초라해 보일 수도 있겠다 싶은데 좌절감 같은 것은 없었습니까. “그런 좌절감 같은 것은 별로 안 컸습니다. &<빨치산의 딸&>이 준 명예 같은 것은 가짜라고 생각했고 그런 것에 휩쓸리면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저 스스로 도망쳤거든요. 제가 만약 그런 명예 같은 것을 원했다면 그런 사회적 이슈를 건드리는 소설들을 계속 발표해서 이름 있는 삶을 살 수 있었겠죠. 그런데 저는 그런 삶을 원했던 적은 한 번도 없는 거 같아요. 부자가 되기를 원했던 적도 없고요. 다만 그때그때 필요한 돈이 있어 열심히 일했습니다.” 진보는 진보해야 지난해 9월 출간한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지금까지 25만 권이 넘게 팔렸다. 1만 권만 팔려도 베스트셀러라는 말을 듣는 시절에 25만 권은 초 대박이다. 아버지 장례식을 소재로 쓴 이 책을 구상한 것은 10년 정도 되었지만 쓰는 데는 두 달 밖에...
SBS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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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춘호(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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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3.25 |
생활 · 문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