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파일] 이란, 56일째 한국 선박 억류한 의도는?
...이란과 미국의 관계가 틀어지게 되는, 두 가지의 결정적 사건이 1979년에 발생합니다. 당시 이란에서는 '부패하고 무능력한 독재 정권'으로 평가 받았던 팔레비 왕조를 무너뜨리는 이슬람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장지향 아산정책연구원 중동센터장은 '당시 이란인들의 미국에 대한 증오가 대단했다'며 '종교지도자 호메이니를 비롯해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 자유주의자들이 함께 힘을 모아 부정부패에 물든 친미 팔레비 왕조를 몰아냈다'고 말했습니다. 이란 국민들의 정신적 지주였던 호메이니는 팔레비 국왕이 기독교 위주의 서방 세계에 경도됐다며 왕권과 신권을 하나로 합친 이슬람 국가 설립을 주창했고 결과적으로 반미 이슬람 정권을 세우는데 성공했습니다. 그 해 11월에는 미국으로선 용납할 수 없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슬람 혁명 추종세력들이 테헤란 주재 미국대사관에 난입해 미국인 50여 명을 1년 넘게 인질로 붙잡는 사태가 일어난 겁니다. 이 사태는 훗날 '아르고'라는 영화 소재로 쓰였을 정도로 미국인들에겐 잊을 수 없는 충격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장지향 아산정책연구원 중동센터장은 '미국에서 가끔씩 여론조사할 때 가장 치욕적인 사건을 꼽으라고 한다면, 베트남전쟁이 아닌 주이란대사관 사건이 1위를 차지했다'며 '미국인들로선 면책특권이 있는 외교관들을 444일 간 구출도 못하고, 나중에야 캐나다 정부 도움으로 구출할 수 있었다는 것 자체가 치욕스러웠던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실제 미국은 이 사건을 계기로 1980년 이란과 단교하기에 이르렀고, 그 때부터 이란을 강력히 제재하기 시작했습니다. 미국 클린턴 대통령은 1995년 미국기업의 대이란 금수조치에 관한 행정명령을, 1996년에는 이란의 석유 · 가스 개발사업에 대한 제3국 투자기업 제재를 골자로 한 경제제재법을 채택하며 이란을 경제적으로 옥죄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부시 대통령은 2002년 연두교서에서 이란을 북한 · 이라크와 함께 '악의 축'으로 지목했습니다. 2002년 말에는 이란 반정부 단체에 의해 이란의 비밀 핵프로그램이 폭로됐는데, 이는 미국의 대 이란 제재를 더욱 강력하게 만드는 결정적 계기가 됐습니다. 미국은 기존의 독자 제재는 물론 유엔 결의안을 수차례 통과시키며 이란 경제를 피폐하게 하는 고강도 제재를 10년 넘게 지속했습니다. 이에 이란 경제는 차츰 무너지기 시작했고, 참다 못한 이란 국민들은 2013년 이란 대선에서 '미국과 대화해서 경제를 살릴 수 있는' 중도파 대통령 후보를 선출하는 정권 교체를 이뤄냅니다. 이 인물이 바로 현재의 하산 로하니 이란 대통령입니다. 2013년 당시 미국 오바마 행정부는 하산 로하니 정권 출범을 이란의 핵 무기 개발을 억제할 수 있는 기회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미국은 영국과 프랑스, 러시아, 중국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 P5)는 물론 독일과 함께 이란 정권과 핵 협상을 벌이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는 2015년 7월 '이란 핵 합의'로 이어졌습니다. (공식 명칭은 포괄적 공동 행동 계획이지만, 통상적으로 '이란 핵 합의'라고 불립니다.) 이 합의는 이란이 향후 15년 간, 그러니까 2030년까지, 6개국의 요구대로 핵무기를 개발하지 않는 수준으로 핵 활동을 제한하고 IAEA의 핵 사찰을 충실히 받으면, 미국과 유럽연합, 유엔의 제재를 완화해준다는 게 골자입니다. 이란이 이 합의만 잘 따르면 미국 등 6개국이 이란을 잘 살게 해주겠다는 내용인 것입니다. 이 합의는 당시 오바마 행정부도 큰 외교 업적으로 손꼽았던 협상의 결과물이었지만, 합의는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이란의 핵을 완전히 없애는 게 아니라 평화적 이용에 한해 핵을 유지할 수 있게 한 합의라며 미 강경파들이 불만을 제기한 영향이 컸습니다. 이들은 이란이 여전히 핵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게 우려스럽다며 협정이 비준된 이후에도 이 합의를 반대했습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 트럼프 대통령이 당선됐고, 트럼프 대통령은 자신이 후보 시절 공언한 방향대로 2018년 5월 '이란 핵 합의 탈퇴'를 선언했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전임 오바마 정부가 만든 이 합의가 2030년이면 효력을 다해 이란 핵 개발을 영구적으로 막을 수 없다는 것, 그리고 이란의 탄도미사일 폐기 내용이 빠져 충분하지 않다는 이유 등을 탈퇴 근거로 내세웠습니다. 이후 상황은 악화일로로 치달았습니다. 트럼프 행정부는 이란에 대한 제재를 복원했습니다. 그 여파로 이란의 원유수출 대금은 한국, 일본 등 곳곳에서 동결됐습니다. 이란은 즉각 반발했습니다. 일련의 사태가 미국의 일방적 핵 합의 탈퇴에 따른 것이므로 자신들에 대한 '불법적' 제재를 철회하라고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미국과 이란 간 갈등은 점점 더 격화됐습니다. 트럼프 행정부는 이란 내 강경파의 상징과도 같은, 이란혁명수비대 정예군인 쿠드스군 전 사령관 가셈 솔레이마니를 폭사시켰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우리가 그렇게 한 이유는 그들이 우리의 대사관을 폭파하려고 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후 이란도 솔레이마니 사망 닷새 만에 이라크 내 미군기지 폭격에 나서는 등 이란 내부의 미국에 대한 반발심은 더욱 거세졌습니다. 이란의 하산 로하니 정권 입장에선 자신들이 추진했던 이란 핵 합의가 좌초돼 미국의 제재와 경제 악화, 코로나19 피해뿐 아니라 미국의 이란 공격까지 사면초가에 내몰린 상황이라 오는 6월 대선에서 재집권 가능성은 매우 희박해진 상태입니다. ● 타이밍 저울질 하는 바이든…6월 이란 대선 전 '숨통' 틔우나 이런 상황에서 미국에선 '이란 핵 합의 복원'을 공약으로 내세운 바이든 행정부가 지난 1월 취임했습니다. 바이든 행정부엔 이란 핵 합의의 밑그림을 그린 핵심 당사자들이 요직에 포진해있습니다. 이미 바이든 대통령은 이란이 기존의 협약을 지키기만 한다면 이란에 대한 제재를 풀겠다고 선언한 바 있습니다. 물론 최근까지도 미국과 이란 모두 서로를 향해 '핵합의 우선 준수'와 '제재 우선 해제'를 요구하며 맞서는 상황이지만, 분위기는 지난 주부터 조금씩 달라지고 있습니다. 앞서 인남식 국립외교원 교수는 SBS 8뉴스 인터뷰에서 '아직 결과는 예단하기 어렵다'면서도 '미국 측에서는 친이란 인사인 로버트 말리 협상 대표를 내세웠고, 이란 측에서는 유럽 측에 중재를 요청했는데, 이런 점을 보면 미국과 이란 모두 핵 합의 복귀 의지는 다 갖고 있다는 것 같다'고 언급했습니다. 일각에선 미국이 친이란 시리아 민병대를 당초 국방부 계획보다 규모를 줄여 진행한 것도 이란 핵 합의 복귀를 염두에 둔 '수위 조절' 아니냐는 관측도 제기됐습니다. 관건은 오는 6월 이란 대선이 될 것으로 보입니다. 바이든 행정부로선 이란 핵 합의 복귀를 원한다 하더라도 이란의 새로운 대통령이 강경파라면 이란 측이 복귀를 거부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장지향 아산정책연구원 중동센터장은 '바이든 행정부가 이란 핵 합의를 복원하고 싶다면 뭔가 큰 진전을 보여줘야 한다'며 그 마지노선에 대해서는 '이란 헌법소위원회가 대선 입후보자들을 걸러내는 5월 초가 될 것'이라고 내다봤습니다. 장지향 센터장은 또 '현재 온건 개혁파 대통령 후보로 자리프 현 이란 외무장관 이야기가 많이 거론되고 있다'며 '미국이 보기에도 자리프가 가능성이 높아보인다면, 최소 5월 초까지는 자리프를 특정해서 분위기를 띄워줘야 할 것이다. 그래서 자리프가 대선 후보가 된다면 그 때부터는 제재를 완화시켜줄 의향이 있다는 것을 적극 홍보해야 온건파가 집권할 가능성이 그나마 생길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만큼 이란 핵 합의 복원을 위한 이란 내부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도 쉽지 않은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모를 리 없는 바이든 행정부는 이란 대선이 임박하기 전까지 이란 핵 합의 복원에 유리한 방안과 그 방안을 실행할 타이밍을 계속 고심할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필요하다면, 중도파의 재집권을 위한 '깜짝 선물'을 조만간 이란에 건넬 수도 있습니다. 이 선물 중에는 한국에 묶인 이란 자산을 풀어주는 것도 충분히 옵션이 될 수 있습니다. 한 정부 당국자는 '미국이 결심만 한다면, 이란 동결자산이 이란에 전달되는 게 당장 내일일 수도 있고, 아니면 수 개월 뒤가 될 수도 있다'며 '아직은 예단하기가 어렵다'고 했습니다. 결국 선박 나포의 배경이 된 이란 동결자산 문제를 미국이 언제 승인해주느냐에 따라, 이란에 56일째 억류된 한국케미호와 선장·선원 19명도 조속히 풀려날지 가늠할 수 있을 걸로 보입니다.
SBS 뉴스
|
김혜영 기자
|
2021.02.28 |
정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