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日成(김일성) 秘密敎示(비밀교시)
(1) 「日本人 拉致(납치)」를 指令(지령)
對韓 工作(공작)의 迂廻(우회) 루트(route)
美國 追放(추방)을 위한 戰鬪準備(전투준비)하라
産經新聞(산케이신문) 2004年6月22日 朝刊(조간)
[서울 = 久保田るり子] 10年前에 死亡(사망)한 北朝鮮(북조선)의 金日成(김일성) 主席(주석)이 남긴 政策傳言集(정책전언집) 「秘密敎示」가 새로운 각광(脚光)을 받으려 하고 있다. 側近(측근)이나 幹部(간부)에게만 直接傳達(직접전달)했다고 하는 獨裁者(독재자)의 敎示에 대해서는 지금까지도 그 存在(존재)만큼은 알려져 있었지만, 內容(내용)에 대해서는 明確(명확)하지 않았다.
産經新聞은 脫北(탈북)한 北朝鮮 幹部의 證言(증언)이나 流出(유출)된 資料(자료)에 의해 이 門外不出(문외불출)의 秘密敎示 全容(전용)을 밝혔다.
主(주)된 것만으로도 그 內容은 日本人 拉致를 包含(포함)한 對日 政策(정책)으로부터 核開發(핵개발) 推進(추진)까지 多方面(다방면)에 걸치고 있어 北朝鮮 國家(국가)의 本質(본질)에 다가가는 것이 되고 있다. 이 敎示를 紹介(소개)함으로써 拉致의 源流(원류)를 찾아간다.
本紙(본지)가 얻은 秘密敎示는 北朝鮮이 韓國에 侵入(침입)시키기 위해서 養成(양성)하고 있던 幹部 工作員(공작원)에게 金日成政治軍事大學(김일성정치군사대학)에서 强制的(강제적)으로 記憶(기억)시킨 內容으로, 複數(복수)의 前 工作員 證言과 韓國 情報(정보) 關係者(관계자)로부터 뒷받침을 얻었다.
▶ 金日成 은 1960年代, 工作 對象(대상)으로서 일본을 이렇게 分析(분석)하고 있었다.
『第三國(제3국)을 통한 迂廻浸透(우회침투)[韓國에 日本을 거쳐 工作員을 보내는 것]에서 흥미로운 對象國은 日本이다. 日本은 36年의 植民地(식민지) 支配(지배)와 略奪(약탈)의 罪意識(죄의식) 때문에 우리 共和國(공화국)[北朝鮮]에 강하게 나올 수 없다. 그리고 地理的(지리적)으로 가까워, 朝鮮總連(조선총련)이라고 하는 强力(강력)한 組織(조직)뿐만이 아니라 60萬명의 同胞(동포)도 있다. 얼마나 有利(유리)한 條件(조건)인가. 向後(향후), 日本을 迂廻浸透工作의 基地(기지)로서 大大的으로 利用(이용)할 必要(필요)가 있다』
『일본은 國內法上(국내법상), 스파이(spy) 防止法(방지법), 反國家行爲(반국가행위)에 대한 法的[禁止(금지)] 制度(제도)가 없다. 따라서 日本을 舞臺(무대)로 [工作] 活動(활동)이 發覺(발각)되어도 外國人登錄法(외국인등록법), 出入國法(출입국법) 違反(위반) 등 가벼운 罪 밖에 물을 수 없다』[모두 1967年4月, 對南擔當要員(대남담당요원)과의 對話(대화)]
日本은 2004年, 送金(송금)을 停止(정지)할 수 있는 改正(개정) 外爲法(외위법)[2월]과 北朝鮮 船舶(선박)의 入港(입항)을 禁止할 수 있는 「特定船舶入港禁止特別措置法(특정선박입항금지특별조치법)」[6월]의 對北 制裁(제재) 2개 法을 成立(성립)시켰지만, 아직까지 스파이 防止法은 없다. 北朝鮮은 이러한 日本 事情(사정)에 40年前부터 主目(주목)하고 있었다.
▶ 秘密敎示는 拉致工作을 指示(지시)하고 있었다.
『南朝鮮[남조선)[韓國]이 故鄕(고향)인 在日同胞(재일동포)가 우리 共和國에 歸國(귀국)하는 것 自體(자체), 政治的(정치적)으로 큰 成果(성과)다. 하지만 그 만큼으로 이 事業(사업)을 끝내서는 안 된다. 歸國船(귀국선)[1971年부터 萬景峰號(만경봉호)]이 新潟港(니가타항)과 共和國을 往復(왕복)하고 있다. 歸國船은 歸國 同胞를 옮길 뿐만 아니라 南朝鮮 革命(혁명)과 祖國統一(조국통일) 推進에 使用(사용)해야 한다. [배가] 新潟에 停泊(정박)하고 있는 동안에 同志(동지)들은 革命에 有利한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例(예)를 들면 南朝鮮 革命에 必要한 情報 材料(재료)를 入手(입수)하고, 必要하면 日本人을 對象으로 包攝工作(포섭공작)이나 拉致工作도 할 수 있지 않겠는가』[1969年11月3日, 3號 廳舍(청사) 擴大幹部會議(확대간부회의)]
北朝鮮은 朝鮮戰爭(조선전쟁)[韓國戰爭, 1950年-1953年] 後, 韓國의 赤化(적화)[共産化(공산화)] 統一을 目標(목표)로 한 工作 活動을 實施(실시)하고 있었지만, 1960年代는 韓國 朴正熙(박정희) 政權(정권)의 反共(반공) 政策으로 수많은 스파이 事件(사건), 地下黨組織(지하당조직)이 摘發(적발)되었다. 그러한 時代(시대) 背景(배경) 때문에 金日成은 이 時代, 日本을 「對南 工作의 迂廻 루트(route)」라고 評價(평가)하고 있었다.
1970年代부터 北朝鮮 專門家(전문가)로서 秘密敎示의 亡命者(망명자)로부터 聽取(청취) 등도 행해 온 康仁德(강인덕) 韓國 前 統一部長官(통일부장관)은 『北의 將來(장래)를 展望(전망)하기 위해서는 一級資料(일급자료)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韓國軍 情報機關(정보기관)의 前 北朝鮮分析室長(북조선분석실장) 李恒九(이항구)氏는 『美國과의 關係나 日本, 韓國과의 關係는 金正日(김정일) 時代에 戰術的(전술적)으로 變化(변화)했지만, 北朝鮮의 戰略的(전략적)인 原則(원칙)이나 革命의 基本(기본)은 「金日成의 秘密敎示」에 있다. 力點(역점)이나 方法論(방법론)이 바뀐 것뿐이며 戰略的으로는 지금도 같다』라고 評價하고 있다.
▶ 「核과 미사일」은 對美 戰爭 때문에 想起(상기)된 것이다.
『南朝鮮으로부터 美國 놈들을 내쫓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언젠가 미국과 한번 더 반드시 싸워야 한다고 하는 覺悟(각오)로 戰爭準備(전쟁준비)를 해야 한다. 무엇보다 서둘러야 하는 것은 美國 本土(본토)를 攻擊(공격)할 수 있는 手段(수단)을 가지는 것이다… 美國이 砲彈(포탄)의 洗禮(세례)를 받으면 어떻게 될까. 美國內에는 反戰運動(반전운동)이 일어날 것이고, 第三世界(제3세계) 諸國(제국)의 反美運動이 加勢(가세)하게 되면, 結局(결국), 美國은 南朝鮮으로부터 손을 떼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러므로 同志는 하루라도 빨리, 核武器(핵무기)와 長距離(장거리) 미사일을 自力生産(자력생산)할 수 있도록 積極的(적극적)으로 開發해야 한다』[1968年11月, 科學院咸興分院(과학원함흥분원) 開發팀과의 談話(담화)]
「迂廻工作」의 對象이었던 日本으로의 어프로치(approach)는 크게 變化했다. 2002年, 金正日 總書記(총서기)는 日本人 拉致事件을 「妄動主義者(망동주의자)와 英雄主義者(영웅주의자)가 한 것」이라고 謝罪(사죄). 當事者(당사자) 다섯 명과 家族(가족) 다섯 명이 歸國했다. 그러나, 金正日에 의한 對日 政策은 國交正常化(국교정상화)를 目標로 하는 外交戰術(외교전술)에 지나지 않고 國家犯罪(국가범죄)에의 對應(대응)이라고 하는 本質을 回避(회피)해, 行方不明者(해방불명자) 열 명의 수색문제(搜索問題) 등 전면해결(全面解決)에의 展望은 대단히 어렵다.
▶ 秘密敎示는 外交·交涉術(교섭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協商(협상)[交涉]과 對話도 하나의 戰鬪(전투)다. 敵(적)과의 戰鬪에서 讓步(양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비록 決裂(결렬)되어도 아까울 것은 없다. 어차피 決裂된다면, 壁(벽)도 門(문)이라고, 두들겨 無理(무리)하게 부수어도 敵의 肝膽(간담)이 서늘해지도록 하지 않으면 안된다… 對話가 決裂되는 경우는, 그 責任(책임)을 敵에게 轉嫁(전가)해야 한다』[1972年8월, 第一回(제1회) 南北赤十字會談(남북적십자회담)에 즈음하여 北朝鮮의 代表團(대표단)으로의 談話]
때마침 6月23日부터 第三回 6개國 協議(협의)가 시작되지만, 秘密敎示에 나타나는 原則은 現在(현재)의 北朝鮮 外交의 特徵(특징)을 凝縮(응축)해 놓은 것처럼 보인다.
≪秘密敎示≫ 北朝鮮의 黨(당), 政府(정부)의 路線(노선)을 審議(심의)·決定(결정)하는 全黨大會(전당대회)나 黨中央委員會總會(당중앙위원회총회) 등의 公式施策(공식시책)에 대해, 金日成이 口頭(구두)나 文書(문서)로 指示(지시)한 非公式(비공식) 指導施策(지도시책). 黨, 軍, 政府의 幹部 외에, 對南 幹部 工作員을 指導했다. 亡命者 證言 등으로 밝혀지고 있는 部分(부분)도 있다. 公式文書와 함께 秘密敎示도 記錄(기록)되어 그 大部分은 北朝鮮 北部 慈江道(자강도) 江界(강계)의 「國家文書庫(국가문서고)」에 保存(보존)되어 있다고 한다.
http://www.sankei.co.jp/news/040622/morning/22iti001.htm
# 金日成 秘密敎示
저는 그 소책자를 읽으며 참으로 많은 생각에 잠겼습니다. 이 영화뿐 아니라 오늘 날 전개되는 대한민국의 현실까지도 김일성 비밀교시의 지침과 구상대로 진행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착각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가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이와 같은 자료가 왜 아직까지 신문지상이나 TV등의 매체를 통해 국민들에게 널리 알려지지 않았는지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통탄스러운 것은, 김일성은 우리 사회 전 분야에 걸쳐서 약점을 파악하고 그 약점을 확대해나가는 비법을 남파하는 주요간첩들에게 교육해 왔고 지금은 김정일이가 계속하고 있을 터인데 우리는 6.15 정상회담의 약속으로 비전향 장기수 64명을 북으로 송환하면서도 대남 공작을 중지하고 공작기구를 없애 달라는 요구조차 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약속을 했다고 그대로 지키는 사람들도 아니지만!
그리고 김대중 정부 이후에는 거액의 공작금까지 무상으로 제공하는 결과를 초래했으니 우리는 지금 불행하게도 북한 대남공작의 제물이 되고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 한 것입니다.
그러나 한편 우리 국민들이 「김일성 비밀교시」의 내용 하나 하나를 확실히 이해하게 된다면 그 피해를 최소화 할 수 있으리라는 결론에도 도달할 수 있었습니다. 「김일성 비밀교시」는 우리에게 차라리 훌륭한 반면교사가 되어 우리의 국가사회발전에 크게 기여할 수 있을 것임을 확신하며 우선 몇 개의 교시내용을 인용 소개하겠습니다.
▶ 문예활동 공작 관련[1976년8월]
『남조선에서 들여온 영화, 비디오를 보니까 거기에도 재능 있는 작가, 예술인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 잘 나간다는 몇몇 작가들을 제외하고 절대다수가 실업자나 다름없는 형편입니다. 이들에게 혁명적 세계관을 심어주기만 한다면 훌륭한 걸작들이 얼마든지 쏟아져 나올 수 있을 것입니다.
작가, 예술인들을 더 많이 포섭하여 직업적 혁명가로 만들고 그들이 외롭지 않게 똘똘 뭉쳐서 혁명적 필봉을 들고 창작활동을 할 수 있도록 묶어 세워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창작한 한편의 시가 천만 사람의 가슴을 감동시키고 총칼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서는 우리의 혁명적 노래가 적의 심장을 꿰뚫을 수 있다는 긍지와 자부심을 불어넣어 주어야 합니다. 지금 남조선의 문예인들이 아주 잘 싸우고 있습니다.
그들이 더 높은 혁명적 열의를 가지고 활동할 수 있도록 많은 교양자료를 주고 창작방법을 가르쳐 주어야 할 것입니다』
『남조선 인민들의 머리 속에 박혀있는 숭미 사대주의 사상을 뿌리 뽑고 그들을 정치적으로 각성시키기 위해서는 작가 예술인들로 하여금 미 제국주의의 침략적 본성과 야수적 만행, 그리고 비인간적 각종 범죄사실을 폭로하는 작품들을 많이 창작하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작품들이 잘 팔리지 않을 경우에는 지하당 조직들이 책임지고 팔아주고 대대적으로 뿌려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들이 실망하지 않고 더 좋은 작품을 창작할 수 있습니다』
『소설뿐만 아니라 영화도 만들고 시도 짓고 좋은 그림도 많이 그리도록 해야 합니다.
어떤 동무들은 돈이 많이 든다고 난색을 표한다는데 우리가 항일 빨치산 투쟁을 할 때, 돈이 있어서 「피바다」 극본을 쓰고 연극 공연을 했겠습니까. 그러나 지금은 북반부에 강력한 사회주의 혁명기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무엇이 두려워 주저하겠습니까.
돈 드는 거 아까워하지 말고 대담하게 일을 벌려야 합니다. 남조선 인민들을 정치적으로 각성시키고 혁명투쟁에 동원할 수만 있다면 억만 금이 들어도 해야 합니다』
▶ 상층부 공작관련
『지금 남조선에는 5.16군사 쿠데타로 말미암아 폭삭 망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들 모두가 박정희 군사정권에 대해 이를 갈고 있으며, 그 중에는 정치인들도 있고 구관료도 있고 양식 있는 지식인, 종교인, 언론인들도 많은 데 김종태와 같이 우리하고 선이 닿기를 기다리는 사람이 얼마든지 나올 수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 혁명가들이 대담하게 접근해서 좋은 대상을 물색해야 합니다. 김종태와 같은 사람 서너 명만 잡게 된다면 남조선에서 혁명을 일으키는 것도, 조국 통일의 대 사변을 맞이하는 것도 시간문제입니다』[1963년12월]
『남조선에서는 고등고시에 합격되기만 하면 행정부 사법부에도 얼마든지 파고 들어갈 수 있는 길이 열려져 있습니다. 앞으로는 학생운동에서 검열된 학생들 가운데 머리 좋고 똑똑한 아이들은 데모에 내몰지 말고 고시준비를 시켜야 합니다. 열 명을 준비시켜서 한 명만 합격되어도 소기의 목적은 달성됩니다. 그러니 각급 지하당 조직들은 대상을 잘 선발해 가지고 그들이 아무 걱정 없이 공부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적극 지원해야 합니다』[1973년4월]
『중앙정보부나 경찰조직에도 파고 들어갈 수 있는 구멍이 있습니다. 공채시험을 거쳐 들어갈 수도 있고 지연 등 인맥을 이용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남조선에는 김종필, 이후락, 윤필용 간에 치열한 삼각암투가 벌어지고 있는데 이들의 알력과 갈등, 학연 지연관계를 잘 이용하면 권력핵심부에도 얼마든지 파고 들어갈 수 있습니다』[1973년4월]
『남조선에서 제일 뚫고 들어가기 좋은 곳이 교회입니다. 교회에는 이력서 보증서 없이도 얼마든지 들어갈 수 있고, 그저 성경책이나 하나 옆에 끼고 부지런히 다니면서 헌금이나 많이 내면 누구든지 신임 받을 수 있습니다. 일단 이렇게 신임을 얻어 가지고 그들의 비위를 맞춰가며 미끼를 잘 던지면 신부, 목사들도 얼마든지 휘어잡을 수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 공작원들이 남조선의 현지실정을 어떻게 잘 이용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1973년4월]
『남조선에는 흔한 것이 교수, 박사입니다. 그 가운데 빽이 든든한 몇몇 사람을 제외한 절대다수의 지식인들은 어렵게 박사학위를 따고서도 일자리가 없기 때문에 실업자나 다름없습니다. 요행 대학교수로 들어갔다 하더라도 인맥관계에 밀리어 연구활동의 기회가 하늘에 별 따기만큼이나 어렵다고 합니다. 이렇게 춥고 배고픈 교수, 박사들에게 접근하여 프로젝트를 하나 따주는 형식을 취한다면 그들은 얼마든지 끌어당길 수 있습니다』[1973년 4월]
▶ 노동계 침투공작관련[1976년4월]
『전태일의 분신자살! 이것이 얼마나 좋은 선동자료 입니까. 청계천 피복노동조합이라는 것이 보잘 것 없는 조직이지만 우리는 이 사건을 계기로 전태일을 영웅으로 만들고 추모 사업회도 가지면서 대대적으로 선전해야 합니다. 그래야 남조선 노동자들이 조직적으로 더 단결할 수 있고 그의 죽음을 헛되이 여기지 않고 그 정신을 본받게 됩니다』
▶ 남북 대화공작관련[1972년8월]
『남북적십자회담이 개최된다고 하니까 일부에서는 통일이 무르익어 가는 줄 알고 있는데···이산가족 찾기라는 그 자체로서는 흥미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적십자회담을 통해서 합법적 외피를 쓰고 남조선으로 뚫고 들어갈 수 있는 길이 트일 것 같으면 회담을 좀 끌어보고 그럴 가능성이 보이지 않을 것 같으면 남조선 측에서 당장 받아들일 수 없는 「반공법 철폐」, 「정치활동의 자유」와 같은 높은 요구조건을 내걸고 회담을 미련 없이 걷어 치워야 합니다. 그리고 회담이 진행되는 기간 이 회담장을 우리의 선전무대로 이용해야 합니다』
『적십자 이념도 좋고 인도주의 원칙도 좋지만 문제는 혁명의 이해에 부합되어야 합니다. 현 단계에서는 이산가족 상봉이라든가 서신교환, 자유왕래 같은 것은 우리에게 이로울 것이 없습니다.
반공법이 철폐되고 정치활동의 자유가 보장된다면 자유왕래도 해 볼만 하지만 그것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없습니다. 그러니까 적십자회담에서도 너무 서두르지 말고 시간을 끌면서 기회를 노려야 합니다.
만약 회담이 진척되어 이산가족 상봉단계에까지 간다 하더라도 판을 크게 벌리지 말고 이산가족 상봉도 우리의 감시 권 안에서 이루어지도록 해야 합니다』
『만약 남조선 측에서 우리의 요구조건을 받아들여 이산가족들의 자유왕래가 실현되고, 정치활동의 자유가 보장될 경우에 대비해서 월남자 가족들과 월북자들 가운데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을 선발해서 공작원으로 활동할 수 있도록 미리 준비시켜 두어야 합니다』
『혁명을 하다 보면 때로는 암초에 부디 칠 때도 있고, 계급적 원수들과 협상테이블에 마주 앉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어떤 경우에도 공산주의자들은 주도권을 튼튼히 틀어쥐고 계급적 원칙을 철저히 고수해야 하며 한치도 양보하지 말고 완강하게 밀고 나가야 합니다.
협상과 대화도 하나의 전투입니다. 적과의 전투에서 양보라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설사 협상이 결렬된다 해도 아까울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이왕에 결렬될 바에는 담 벽도 문이라고 두들겨 억지를 부려서라도 적들의 간담을 써늘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 혁명의 결정적 시기
『남조선 혁명의 결정적 시기는 저절로 오지 않습니다. 혁명정세는 오직 혁명가들이 끈질긴 노력에 의해 성숙됩니다. 혁명의 객관적 정세가 아무리 성숙됐다 하더라도 혁명들이 주동적으로 조성하지 않으면 결정적 시기는 절대로 오지 않습니다.
혁명적 대사변을 주동적으로 맞이하기 위해서는 각종 형태의 대중 투쟁을 적극 조직 전개하여 적들의 강경탄압을 유도해야 합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시위도중 경찰에 의해 살해된 것처럼 위장하여 자해공작을 할 필요도 있습니다. 시위군중들이 동료들의 피를 보게 되면 더 격렬하게 일어나기 마련입니다』「1976년8월]
『결정적 시기가 조성되었다 해도 그 시기를 포착하지 못하면 절호의 기회를 놓치게 됩니다. 4.19때의 교훈을 되풀이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때 우리가 좋은 기회를 놓쳤던 것처럼 평양에 앉아서 무전으로 보고나 받아 가지고는 서울에서 일어나는 결정적 시기를 제때에 포착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혁명정세를 자체로 분석평가하고 전략전술을 스스로 작성할 수 있는 노숙한 혁명가들을 파견하여 현지 당 지도부를 시급히 꾸려야 합니다.
조선혁명을 모스크바에서 지도할 수 없듯이 평양에 앉아서 남조선 혁명을 지도한다는 것은 혁명원리에도 맞지 않습니다』[1974년1월]
『결정적 시기가 포착되면 지체없이 총공격을 개시해야 합니다. 전국적인 총파업과 동시에 전략적 요충지대 곳곳에서 무장봉기를 일으켜 전신전화국, 변전소, 방송국 등 중요 공공시설들을 점거하는 동시에 단전과 함께 통신교통망을 마비시키고 임시혁명정부의 이름으로 북에 지원을 요청하는 전파를 날려야 합니다. 그래야 남과 북이 전략적 배합으로 혁명적 대 사변을 주동적으로 앞당길 수 있습니다』[1974년12월]
북한에서는 국가 위에 당이 군림하고 김일성은 영원한 주석임으로 그의 교시가 곧 최고의 법으로서 일사분란한 생명력을 발휘한다는 사실을 촌시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2004년4월10일
한 광 덕
성우회 안보평론위원
# 김일성 비밀교시 전체 자료
[資料] 對南 事業 關聯 金日成 秘密敎示 - 東北亞戰略硏究所(동북아전략연구소)
http://www.vietnamwar.co.kr/talk2/main.cgi/김일성교시.htm?down_num=1085368406&board=hankd&command=down_load&d=&filename=김일성교시.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