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과 정보의 축적은 세계를 점점 더 가깝게 만들고 있습니다. 국경의 의미는 차츰 퇴색되고 있고 그 문턱 또한 시간의 흐름과 비례하여 점점 낮아지고 있는 추세입니다. 미디어 매체를 통해 풍설로만 접해왔던 "개방"이 우리의 일상속으로 파고들 날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세계화의 대세 속에서 우리 한국의 경쟁력은 역시 인적 인프라의 구축에서 찾아야 할 것입니다. 대내외적으로 내실을 인정받는 교육을 통해 국제적 기준으로도 검증 가능한 역량있는 전문인력들을 키워 내어 이들이 세계 속에서 한국인의 위상을 드높일 수 있도록 모든 분야에서 착실한 준비가 필요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2년 전, 범 세계적인 시장 개방을 목적으로 하는 국제통상회의인 DOHA AGENDA에서 우리나라는 다가오는 2005년부터 보건의료시장을 단계적으로 개방하기로 잠정 합의한 바 있습니다. 최근 활발히 논의되고 있는 세계 유수의 명문의료시설의 한국진출, 앞으로 구축될 경제특구 내에서 내국인을 상대로 한 외국인력 보건의료 서비스 제공 여부도 이러한 국제적 움직임의 연장선상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입니다.
의료시장의 개방은 필경 "국경을 넘나드는 보건의료인력 이동"으로 이어지게 될 것입니다. 이는 지금까지 "한국인 의사, 한국인 약사"를 통해서만 이루어져 왔던 보건의료서비스가 "싱가포르인 의사, 미국인 약사", "호주인 의사, 캐나다인 약사"의 조합으로도 이 땅에서 얼마든지 합법적으로 제공될 수 있는 시대가 임박하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세계를 향한 의료시장 개방은 보다 장기적 관점에서 볼 때, 우리의 보건의료계에게 새로운 기회로 작용하게 될 것입니다. 좁은 "대한민국"의료시장의 틀 속에서 본다면 일시적 과잉경쟁의 우려가 있을 수 있겠습니다만, 우수한 인적 자원을 확보하고 있는 우리 보건의료계가 앞으로 다가올 미래에 조금만 더 관심을 갖고 "개방"을 충실히 준비한다면, 얼마든지 훨씬 넓은 "세계"의료시장을 우리 보건의료 인력의 진출가능 영역으로 편입시켜나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의계, 약계, 한의계 등 보건의료계의 축을 이루고 있는 제 인력들은 "소속 직능의 위상과 안위" 추구에서 벗어나 한국 보건의료 서비스의 경쟁력 확충에 대해 보다 대승적 차원에서 협력해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우리 보건의료인들의 경쟁 상대는 각자가 아닌 세계각지의 보건의료인력들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최근 논의되고 있는 약학대학 6년제로의 학제개편 추진은 결코 약학계만의 직능이기주의도, 추가적인 의료부담을 가져올 올무도 아닙니다. 코앞으로 다가온 의료시장 개방을 앞두고 있는, 그 속에서 한국 약학계 스스로의 경쟁력 확보를 위한 자구책이요 절실한 노력입니다. 2년간의 교육기간 연장을 통해 발생하는 추가적인 교육비용 또한 한국에서 약학의 길을 선택한 약학도들의 부담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현 4년제 교육제대로 의료시장 개방이 이루어질 경우, 한국 약사들의 활동 영역은 철저히 "국내"로 국한될 수 밖에 없습니다. 게다가 국내에서마저도 6년제 외국 약학인력들과 대등한 경쟁이 불가능한 상황에 봉착하게 됩니다. 가령 외국계 자본이 우리나라에 선진종합의료센터를 건립할 경우 4년제 학위를 받은 한국출신 약사들은 외국계열 의료기관에서 약사로서의 업무수행이 불가능하다고 판단되어 고용대상에서 제외되게 됩니다. 미국을 비롯하여, 우리나라에 의료시장 개방 request를 낸 외국의 약학대학 학제는 대부분 6년제이기 때문입니다. 단지 학제의 차이로 인하여 한국출신 약사는 불평등을 감수하여야만 하는 상황이 바로 눈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이미 한국 약학대학출신 약사인력은 미국에서 약사로서의 활동이 불가능하게 된 상황입니다. 외국약대 출신이 미국에서 약사 활동을 하려면 최소 5년제 이상의 약대를 졸업하여야만 한다는 규정이 2002년 신설되었기 때문입니다. 4년간의 대학교 과정을 마치고 2년간의 대학원 과정을 거친다 하더라도 "출신 대학교 과정의 학제가 4년"이므로 안타깝게도 6년제 연한의 교육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것이 현 상황입니다. 유럽의 약학계도 개도국의 4년제 외국 약사 유입으로 인한 약업유통시장 및 신약 정보 보호 등을 목적으로 미국 약업계의 이러한 시도를 주시하며, 유사한 학제 가이드라인 제정을 추진중에 있다고 합니다. 이는 학제의 차이를 빌미로 한국 출신 약사인력의 차별 현상으로 이어질 수도 있는 매우 민감한 문제이기도 합니다. 만일 이처럼 우리의 약사 인력 해외 진출이 원천봉쇄된 상황에서 의료 개방이 시행될 경우 우리나라 보건의료의 한 축을 형성하는 약업(藥業)은 그 국제경쟁력을 완전히 상실하게 되며, 지식과 인력의 공급을 외국에 전적으로 의존하게 될 가능성이 큰 상황입니다. 해외 거대 의료자본의 손에 우리 국민들의 건강이 전적으로 좌지우지되는 상황이 올 수도 있습니다.
약학교육을 4년제에 국한시키고 있는 나라는 OECD국가 중 우리나라가 유일합니다. 3~4년제를 병행하고 있었던 이웃나라 일본도 상황의 심각성을 깨닫고 지난 5월, 약학대학 6년제를 전면적으로 시행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한국의 약학도들에게 있어서 약학대학 6년제는 옵션이 아닌, 앞으로 다가올 "개방"앞에 주도적인 입장에 설 수 있느냐 없느냐, 국민 건강의 주도권을 외국 출신 보건의료인들로부터 지킬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매우 중대한 문제인 것입니다.
유감스럽게도 이러한 사정은 거의 보도되지 않고 있습니다. 6월 14일자 KBS 9시 뉴스는 6년제 쟁취를 목표로 약대생들이 수업거부에 돌입했다는 점만 보도하고 오히려 이익집단인 의협과 한의협의 반대 논거만 크게 보도하는 우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약대생들의 순수한 움직임이 "직능이기주의"로 비춰지지 않을까 우려되는 바입니다.
6년제는 기존 약학교육제도를 국제적 수준으로 끌어올리자는 데 그 주안점이 있지, 약사가 임의조제를 한다든지 한약을 건드린다든지 하는 발목잡기식 논의와는 전혀 관계가 없으며, 학제개편을 통해 늘어난 기간은 환자치료 서비스를 향상시키기 위한 임상약학과목 증설에 그 주안점이 두어지게 될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약학대학 6년제 학제개편은 한국에서 배운 보건의료인들이 우리 국민들에게 보다 수준높고 신뢰할 수 있는 의료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 초석이 될 것입니다.
의료시장 개방을 앞두고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부분이자, 대통령 공약사항이기도 한 약학대학 6년제 학제개편이 이루어지는 날까지 국민 여러분들의 많은 성원과 관계부처의 신속하고, 약속에 입각한 조치를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대구가톨릭대학교 약학대학
02 정민혁
[한겨레 논객의 글 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