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혼자가 아니랍니다. 어디에서든지
유희숙/서울시 양천구 목3동
승현아!
그 통장을 왜 그리 자주 들여보느냐고, 왜 그리 소중히 여기느냐고 물었니?
그 자리에서 대답하기에는 아직도 엄마에겐 상처로 남아 있는 부분이 있었나보다.
지금까지 너에게 아빠에 대해서 그리고 아빠가 남겨놓은 것들에 대한 많은 것들을 애써 피하며 말하지 않았었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이제 너에게 얘기를 해도 이해할 수 있겠다 싶어 이렇게 글로나마 표현해 보련다.
그 통장의 의미와 함께......
승현아! 너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지? 아빠의 자상함과 따뜻함. 특히 너에게 준 사랑은 네가 어른이 된 후에도 잊지 못할 만큼의 양이었지 않니? 그런 면에서 혜령이는 전혀 기억할 수 없는 아빠이기에 더욱 가엽단다.
봄이 되면 무척이나 설레고 생동감 넘쳐하던 이 엄마에게 94년의 봄은 유달리 시작부터 힘들더구나. 네 동생의 태어남, 직장생활의 고단함, 조각가이셨던 아빠의 작업실 마련에 대한 고민, 그 중에서도 너희들을 키워가며 직장생활을 계속해야하는 나의 고달픔은 어디에 하소연 할 데도 없이 엄마, 아빠의 마지막 봄을 무척이나 힘들게 만들었었지. 그러다가 아빠에게 갑작스레 찾아온 죽음은 엄마에겐 슬픔을 느낀다는 것조차 사치스런 감정이었단다.
어느 날 찾아온 심장마비라는 불청객은 엄마와 아빠에게 마지막 인사조차 나눌 기회도 주지 않고 그렇게 아빠를 데려가 버리더구나. 진공상태에 놓인 것처럼 아무생각 없이 실제로 눈물 한 방울 나지 않으며, 내가 지금 어느 세상에 사는지, 내 주변에 무엇이 있는지, 내게 남겨진 것이 무엇인지...... 이미 모든 것이 의미를 잃고 말았지.
넌 네 살, 이제 막 5개월에 접어든 혜령이, 내겐 너희들을 느낄만한 여력도 남아있지 않았단다. 어떻게 시간이 지났는지도 모르게 한달 여가 지날 무렵 너의 삼촌이 아빠와 관련된 서류들을 정리하다 할 일이 생겼다며 나가자고 했지. 내가 어떻게 다시 세상 밖으로 나갈 수 있을까? 세상은 아직도 그대로 일까? 온통 깜깜한 세상과 사람들은 이상해져 있지나 않을까? 겁이 나서 못 간다고 한참을 우겼지만 막무가내로 나가자고 하더구나. 그래서 너의 아빠로부터 버림받은 이후 (내게는 그 당시 버림받았다는 생각과 상실감뿐이었지)처음으로 바깥 세상에 발을 내디뎠단다.
세상은 모든 게 그대로였어. 달라진 거라곤 많은 사람들 중에 꼭 네 아빠가 있을 것 같아 자꾸 두리번거리는 엄마의 모습뿐이었지. 그렇게 겨우 겨우 이끌려 간 곳은 강남 어느 지역의 국민연금관리공단이었어.
승현아!
넌 아직 어려서 국민연금이라는 말조차 이해할 수 없겠지?
엄마도 교단에서 형, 누나들에게 가르쳐온 국민연금이란 모든 사람들이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는 사회, 모두가 인간답게 살수 있도록 보장해 주는 복지사회가 되기 위해 마련되어야만 하는 제도로서 보험과 같이 평소에 어느 정도 보험료를 내다가 우리가 늙고 힘이 없어 일을 못하게 되거나, 불의의 사고가 닥쳤을 때 경제적으로 도움을 주기 위한 제도라고 가르쳐 왔으면서도 사실은 나와는 별로 관계가 없는 제도라고 생각했었단다.
그런데 그렇게 나와는 아무 상관도 없을 것 같았던 그곳, 국민연금에서는 나를 너무도 힘겹게 하더구나. 국민연금 직원과 나누는 몇 마디 질문과 대답들은 아직도 인정하고 싶지 않은 아빠의 죽음이 다시 한번 부인할 수 없는 기정사실로서 엄마의 얼굴을 점점 더 굳어가게 하고 목소리는 들릴 듯 말 듯 잦아 들어가면서.....그 때 그 곳 직원이 나를 위로하며 많은 사람들의 명단을 보여주더구나.
'아주머니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이 혼자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여기 좀 보세요.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똑같은 이유로 여기에 들렀다 가셨어요. 힘내세요. 세상은 혼자가 아니랍니다. 어디에서든지.'
'세상에 이렇게 젊은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그제서야 나 혼자만이 겪고 견뎌 내야한다는 외로움을 추스리려는데 그 여직원이 유족연금을 받게된다고 하길래 난 웬 연금이냐고 물었단다.
평소에 아빠가 국민연금에 가입해서 매달 납입하고 계셨는데 가입한지는 얼마 되지 않아 많은 금액은 아니더라도 매달 연금이 나온다고 하더구나. 그래도 나에게는 직장이 있어 너희들 키우는데 당장 걱정이 없었기에 그 연금, 한 달에 13만원 정도 되는 그 연금이 내게 무슨 도움이 되고 의미가 있으랴 싶어 성의 없게 대답하고 나와 버렸지만, 어쨌든 그 날 국민연금관리공단은 나를 어두운 집안에서 세상 밖으로 다시 끌어내 주었던 거란다. 너와 동생 혜령이가 어떻게 되든 자포자기하며 그 처참한 상황에 무릎 꿇고 나를 내 던져 버리려고 했던 그 상황에서 나를 끌어내 준 계기가 되었지.
돌아오는 길엔 꽃들은 여기저기 눈부시게 피어있고, 새들은 생명의 소중함을 뽐내기라도 하듯 노래를 부르고, 햇빛에 반사되어 빛을 발하는 새싹들로 인해 눈물이 날 만큼 아름다운 그 날, 엄마는 삶의 환희와 큰 슬픔이 동시에 밀려오는 그 감정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 당황스럽기까지 했단다. 삼촌을 먼저 보내고 봄볕을 받으며 걷고 또 걸으면서 생각했지.
'너희들이 어떻게 태어났는데. '또 '내가 어떻게 태어났고 어떻게 살아왔는데 이렇게 힘없이 포기해도 되는 걸까?' 많이 생각하면서 걷고 있었단다.
그때 어느 집 담 너머로 흐드러지게 핀 목련이 내 눈에 들어왔단다. 내 머리 속에 퍼뜩 '떨어질 땐 영영 끝인 것 같더니, 저렇게 다시 예쁘게 필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스치면서 '그래 나도 떨어진 목련으로 그칠 수만은 없어'라고 외치고 있었지.
너희 아빠가 가버리고 난 후 얻은 두 달 병가 중 절반을 넘길 즈음 난 다시 일어서야겠다는 용기를 가지고 시작했단다. 병가를 마치고 학교에 나갔을 땐 나를 위로하려는 사람들을 오히려 위로하며 얼마나 어금니를 깨물었던지 집에 돌아와선 턱이 아파 턱 운동을 했어야 할 정도니까.
그리고 얼마 후 정말 연금이 나오더구나. 오래 전 일이라 정확한 액수는 기억나지 않지만 3개월에 39만원정도가 나왔단다. 이 돈을 어떻게 써야하나? 너희 아빠가 나에게 남겨준 것 중에 너희들과 함께 가장 오래 내 곁에 있을 소중한 이 연금을 어떻게 보관해야 할지 많이 생각했지. '그래, 키우자. 우리 아이들을 자랑스럽게 키우자.' 아빠가 곁에 있으면서 키워주지 못하는 아픔을 생각하며 아빠가 남겨준 소중한 이 연금으로 너희들을 키우자고 결심했단다.
아빠가 가고 난 후 나에게 남겨준 유품중, 나를 가장 가슴아프게 한 건 손때 묻은 아빠의 통장이었단다. 용돈을 남겨 통장을 만들어 넣어 두었던 30만원 가량의 통장. 돌아가시기 얼마 전 결혼기념일에 내게 더욱 예뻐지라며 사주었던 향수와 옷도 그 통장에서 돈을 꺼내 샀더구나.
너희 아빠는 지갑에 돈이 떨어져도 달라고 하질 않아 매번 내가 지갑을 확인하고 돈을 넣어 놓아야 했단다. 그 중에서도 아껴 썼는지 매번 얼마씩 저축해 30만원이 모여 있었지. 나중에 그걸 확인하고선 난 너희 아빠가 너무나 밉고 한동안 가슴이 아프기도 했지만 난 그 돈으로 두 개의 통장을 만들었단다.
이 승현, 이 혜령의 통장이 그렇게 처음으로 탄생한 거야. 난 그 두 개의 통장에 3개월만에 한 번씩 연금으로 나온 돈을 자동이체시켜 저축하기로 했단다. 떠나긴 했지만 아빠는 여전히 다른 모습으로 너희들과 계속 같이하게 된 거지. 너희들이 크는 동안 아빠의 몫을 조그맣게 나마 이 통장이 해주리라는 생각으로 난 소중하게 통장을 보관하고 또 자주 꺼내보곤 했지. 그 통장은 마치 너희 아빠가 나에게 말하고 있는 것 같단다. 항상 건강하고 즐겁게 살고 아이들 잘 키우라고 말야.
승현아!
아빠의 말처럼 난 무척 강하게 살고 있지 않니?
웃는 것이 죄가 되는 것 같아 한동안 웃음을 잃었지만 지금은 누구보다도 많이 웃고 많이 활동하고 또 너희들을 절대로 포기할 수 없는 그런 엄마가 되었단다.
나를 첫 외출로 이끌어낸 국민연금 전혀 만날 일이 없을 것 같던 그 생각 깊고 따뜻한 여직원.
나는 그때 이후 아무 의미 없었던 것들이 때론 이렇게 많은 의미와 힘을 던져줄 수 있다는 것에 대해 많이 놀랐고, 나도 역시 나아닌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 의미와 힘이 되는 그런 사람이 되고자 노력한단다. 이 통장에 들어가는 연금의 의미 또한 액수가 아니라 이미 가신지 오래 되었지만 내가 아직도 아빠와 대화할 수 있게 해주는 매개체가 되어주고 있고 또 너희들에게 아빠를 항시 기억할 수 있게 해주는 그런 의미가 아닐까하고 생각해본단다.
처음의도는 단지 교육비를 마련해 두어야겠다는 생각이 더 컸을지 모르는 그 통장이 지금에 와서는 계산할 수 없는 크기와 의미를 지닌 통장이 되어 버렸단다.
거기에서 아빠를 찾고, 남편을 찾고, 자식을 찾는 돈이 되고 있다는 것을 국민연금관리공단은 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승현아 넌 이제 알겠지? 이해하겠지? 내가 왜 그렇게 열심히 통장을 들여다보고 있는지 이제 알겠지?
'승현아! 혜령아! 내가 너희들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보여주지는 못하지만 느낄 수 있었으면 좋겠다. 항상 건강하고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해 지나고 나서 후회하지 말렴. 그리고 서로 사랑하면서 살아라. 아픈 사람 어루만져 주면서 살아라. 들리지 않니? 아빠의 목소리가......이 통장이 아니었으면 어떻게 이런 대화를 나눌 수 있었겠니? 다시 또 들여다보는 통장에 아빠의 얼굴이 떠올라 오늘도 가슴이 서늘하게 저미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