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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보다 귀여운 "도둑"

자식보다 귀여운 "도둑"

변 영 훈/부산광역시 북구 구포2동



나는 국민연금을 '도둑'이라 불렀던 사람이다. 남에게 말하기조차 부끄러운 박봉으로 힘겹게 한 달을 꾸려가던 당시로선 단돈 한푼이 아쉬웠기에 월급날 봉투에 공제된 국민연금 보험료는 내 생살이 떼여나간 것만큼이나 아깝고 쓰라렸다. 마치 도둑맞은 느낌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국민연금과 인연을 맺었던 10여년 동안 내 인생을 통틀어 가장 어둡고 고단한 세월이었기 때문이다.



15년 전 젊음을 바쳐 근무하던 직장이 부도로 폐업이 되었을 때 나는 늙지도 또 그렇다고 젊지도 않은 나이로 별로 가진 것도 없이 세상에 던져졌다. 이런 저런 장사도 해보았고 경기 좋다는 집장사(소규모 건축업)도 해 보았지만 평생 월급쟁이로 요령없이 살아온 나에겐 세상이 녹녹치 않았다. 고전을 거듭하고 있던 중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장남으로서 모시고 있던 부친이 심장협심증, 중풍후유증, 전립선염 등 여러 합병증이 와, 나는 간병까지 도맡아야 했다.



아버님에겐 내가 절실히 필요했고 병원 통원치료를 위해서는 밤 근무만 가능한 일자리를 찾아야 했다. 그래서 시작한 일이 아파트 관리사무소 경비원이었다. 근무한지 얼마 안되어 사무실에서 국민연금을 가입해야 한다고 했다 당시의 국민연금 보험료는 이율이 낮아 최근에 비하면 절반도 안 되는 낮은 금액이었지만 나는 워낙 적은 월급이라 주저했으나 어쩔 수 없이 납부해야 했다. 그러나 국민연금에 대해서는 기대하는 것도 아는 것도 없었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중도에 그만둘 수 있다면 취소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생활을 꾸려나가기도 힘든 월급으로 아버님의 병원비까지 충당하자니 그저 하루하루 버텨나가는 것이 신기할 뿐 나에게 노후 설계란 먼 별나라 이야기였다.



그렇게 10년의 세월이 흐르고 2년 전 아버님께서는 긴 투병 끝에 여든 여섯의 연세로 세상을 떠나셨다. 아버님이 떠나신 후 주체할 수 없는 슬픔과 회환 세상살이에 대한 허망함에 빠져 허덕이다 문득 거울을 보니 나는 어느덧 지치고 늙은 육십 노인으로 머리엔 하얗게 서리가 내려 있었다. 그 때 한 가닥 기쁨으로 나를 일으켜 준 것이 국민연금이다.



2000년 4월 4일부로 만 60세가 되어 5월부터 매월15만원 가량의 연금을 죽을 때까지 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가입기간이 10년이 채 안되지만 특례노령연금 혜택을 받게 되었다고 한다. 내가 납부한 보험료에 비하면 너무나 큰 금액이었다.



'도둑 맞는 기분으로 마지못해 넣었던 몇 천원, 몇 만원의 보험료가 평생의 동반자가 되어 되돌아 오다니, 월급이 많았으면 더 넣을 수도 있었을 텐데' 아쉬움 까지 생겼다. 돈 많은 사람들에겐 한자리 술값 밖에 안될 수 도 있지만 나에게 한달 15만원의 연금은 결코 적은 돈이 아니다. 평생 박봉으로 5남매를 공부시키느라 고생하시던 부모님을 곁에서 지켜본 나로서는 근검절약을 교훈처럼 배웠으며 나 역시 넉넉지 않게 살아왔기에 돈의 가치가 쓰는 사람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매 주말이면 가장 관심을 갖고 지켜보는 TV프로그램인 사랑의 리퀘스트에 나오는 소년소녀 가장들, 그리고 무의탁 노인들, 장애인들... 몇년 전 TV에서 보았던 기억에 의하면 현재와는 차이가 나겠지만 그들에게 지급되는 국가 보조금이 오만원 정도 된다고 한다. 그 돈으로 어떤 장애인 가정은 한 달을 산다고 했다. 돈은 그것을 쓰는 사람에 따라 가치가 달라지는 요술을 부리는 것이다.



얼마 전 겨울이었다. 내가 사는 아파트 노인정 앞에 80세 전후의 할머니들이 몇 명 앉아서 햇볕을 쬐고 있었다. 나는 그 중 어느 할머니에게 물어보았다. 자식들이 한 달에 용돈을 얼마나 주느냐고. 그 할머니는 한달 용돈으로 아들이 삼 만원을 주는데 그 돈으로 하루 천 원씩 꺼내 점심때 노인정에서 라면 사서 끊여 먹고 나머지는 과자 사서 먹는다고 하셨다. 대답하는 할머니의 얼굴에는 '만족한다'는 빛이 역력했다.



'그래, 저것 봐라. 저 할머니는 천 원으로 하루를 소일한다. 행복이란 얼마나 많이 갖고 있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분수를 알고 만족해야 하며 감사할 줄 아는 삶에 있는 것'이라고 나는 그때 그렇게 생각했었다. 엄청나게 많은 재산과 놓은 지위에 있으면서 더 가지려고 죄를 짓다가 묶여 가는 지위 높은 사람들의 표정에 어디 행복의 빛이 보이던가.



10년 가까이 경비원 생활을 하며 밤잠 못 자가며 이룩한 국민연금. 내겐 그 무엇보다 대견하고 자랑스러운 보배다. 내가 국민연금을 넣은 것은 재산이 많아서, 수입이 많아서가 아니다. 추운 겨울 밤하늘의 별을 벗삼아 지새우던 괴롭고 긴 경비원 생활, 형편없이 적은 월급에서 넣은 것이기에 더욱 더 값지고 보람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금은 밤에 일하는 경비원이 아닌 항만회사에 임시직으로 취업해 낮에 일하고 있다.주위에서 가끔 국민 연금에 대해 부정적 견해를 가진 사람들을 볼 때면 예전의 내 모습이 떠올라 슬며시 웃음이 나오지만 꾹 참고 나는 열심히 그들의 잘못된 견해를 지적해주고 내가 처음 국민연금을 받을 때의 그 흡족하고 고마운 마음을 설명해 준다. 그러면 대개 그들은 곧 수긍하면서 동감한다.



육십이 넘은 나이에 아직 직장을 다닐 수 있어 행복하지만 임시직이라 월급이 많지는 않다. 월급 봉투를 받을 때 마다 여기다 조금만 보태면 백 만원이 되는데 하고 생각할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어김없이 내 연금이 튀어나온다. '나 여기 있소' .'그래 너를 보내면 백 만원 가까이 되는구나. 너야말로 내 효자다'.



요즘은 은행금리가 내려 1억을 은행에 예금해도 월 사십만원 정도 받는다고 하는데 매월 몇 만원 연금 불입하고 평생 월 몇 십만원을 받으면 그것을 받아본 사람만이 그 감동의 무게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국가가 보장해 주니까 부도날 염려 없고 떼일 염려 없는 안심되는 노후생활 아마 시간이 지날수록 그 고마움이 더욱 더 절실하게 와 닿지 않을까?



노인에 대한 국가적인 보장제도가 없는 우리 나라에서 국민연금은 우리가 노년에 기댈 수 있는 유일한 자식이기에 국민 모두가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보호하며 키워가야 할 것이다. 그것은 곧 자신들의 미래를 위한 것이니까. 다른 사람들의 불행은 언제든지 나에게도 올 수 있다는 마음가짐으로 항상 준비된 생활을 해야 한다. 국민연금을 꺼리는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다. 수입이 적고 가난한 사람일수록 국민연금을 열심히 넣어야 한다고.





노후대책은 자신을 위해 준비하는 것

통장에 차곡차곡 연금이 쌓일 때마다 돌아가신 아버님 생각에 가슴 아프다.육십이 조금 넘게 살아온 내 지난 날들을 회고해 보면 숱하게 많은 잘못들과 실패가 있었지만 그 중에서 가장 가슴 저미게 안타까운 일은 병환으로 고생하시던 여든 여섯 고령의 부친께 좀더 효도해 드리지 못하고 돌아가시게 한 것이다. 보잘 것 없는 내 수입과 예측할 수 없는 동생들의 보조금 때문에 좀더 큰 병원의 병실에서 맘 편하게 마지막을 보내게 해 드리지 못하고 돈을 아껴가며 병원 생활을 하시게 한 것이다. 그 때 국민연금이라도 있었더라면 금액은 적어도 아주 요긴하게 쓸 수 있었을텐데…당신을 돌보느라 직장을 잠시 휴직하고 밤낮으로 같이 병실 생활을 하는 육십이 된 자식의 흰머리를 쓰다듬으며 애처로워 하시던 아버지의 모습이 지금도 어제 일처럼 내 기억에 떠 오른다. 그런 때면 나는 벽에 걸린 아버지 사진 앞에 무릎 끓고 앉아 통곡하고 만다.



나는 부모님께 효도한 자식이라고 조금도 생각하고 있지 않지만 주위에서는 나보고 효자라고들 했다. 그러나 가슴속깊이 고백하자면 준비 없는 노후를 맞이한 채 자식들에게 허망한 기대만 하던 부모님을 얼마나 원망했던가. 부끄러운 집안 얘기지만 긴 세월 내가 집안의 장남으로서 병환중인 부모님을 모시는 동안 경제적으로 여유있게 사는 편인 동생들이 부모님께 대하는 태도를 보면서 노후 대책은 철저하게 자기 자신이 준비해야 한다는 것을 뼈저리게 절감했다. 부모님 생활비와 병원비로 한 집에서 매월 얼마씩 보태기로 했으나, 각자 제 자식 키우면서 바삐 살다보면 마음먹은 대로 안될 때가 많은가 보다. 어디 부모 맘 같은 자식이 있겠는가? 가난하게 살면서 부모를 모시고 있는 큰자식이 안쓰러운 아버님은 해외에 있는 그리고 서울에 사는 동생들에게 자주 전화를 하셨다. "너의 형이 나 수발하느라 힘들다. 병원 치료비와 약값이 많이 든다. 돈 좀 보내줄 수 있겠냐? 부탁한다." 옆에서 지켜보는 나로선 정말 가슴 아픈 모습이었다. 물론 효도하는 자식들도 많겠지만 자식에게만 의지하는 노후의 삶이란 얼마나 불안한 것인가. 내 부모님께서는 무작정 자식만 바라보며 살아가는 노후가 얼마나 힘겨운 것인지를 실제로 보여주고 가신 것이다. 나도 자식이 두 명 있지만 저희들이 사람답게 살기를 바랄 뿐 조금의 기대도 하지 않는다. 우리 부부의 노후는 전적으로 우리가 책임질 것이다.



물론 자식만큼 귀여운 국민연금이 늘 우리와 함께 하리라는 믿음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