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연금- 변심한 애인, 그나마 미더운 동반자?
이철용(동아일보 기자)
"늙거나 병이 들었을 때 연금을 탈 수 있다는 기대가 생기면 국민들이 행복감을 느끼고 유순해지기 때문에 다루기가 훨씬 쉬워진다. 더욱이 국가가 국민들에게 늘 요구만 하는 게 아니라 베풀기도 한다는 점을 꼭 보여줘야 한다." 100년 전 독일의 '철혈 재상' 비스마르크가 공적연금 제도를 세계 최초로 시행하면서 한 말이다.
'노령연금 제도 도입'을 공약으로 내건 영국의 로이드 조지 경의 1911년 선거 캐치프레이즈는 '4펜스로 9펜스를!'이었다. 4펜스를 보험료로 내면 9펜스를 연금으로 돌려주겠다는 뜻이다. 이처럼 공적연금 제도는 정치인들의 선심공약으로 출발했다. 비스마르크와 로이드 조지가 뒤탈을 전혀 생각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연금을 타기 시작하는 시점을 당시 기준으로는 매우 늦은 나이인 70세로 최대한 늦춰 잡았다. 그러나 20세기 들어 평균수명이 비약적으로 연장되고 출산율이 급격히 떨어지면서 연금재정은 파산 위기에 직면해 있다. 연금을 받을 사람은 급속히 늘어나고 있는데 보험료를 낼 사람은 갈수록 줄어들고 있으니 말이다.
1990년대 들어 유럽 국가들은 국민들의 반발을 무릅쓰고 예외없이 연금개혁에 착수했다. 개혁의 슬로건은 '환상에서 현실로!'이다. 더 많이 걷고 더 적게 줘서 공적연금 제도의 수명을 연장시키자는 것이다. 하지만 국민들은 비스마르크의 최면에서 깨어나기를 원치 않았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었다. 부가 8월에 내놓은 국민연금 제도 개선안에 대해 많은 가입자들이 불만을 터뜨리고 있다. 개선안에 따르면 국민연금 보험료율은 종전 9%에서 2010년부터 5년마다 1.38%포인트씩 올려 2030년에 15.90% 수준까지 인상된다. 소득대체율(연금급여액이 은퇴 전 평균소득의 몇 %인지를 나타내는 비율)은 종전 60%에서 2008년까지 50%로 내리되 2004년부터 2007년까지는 충격 완화 차원에서 55%가 적용된다. 88년 국민연금제도 도입 당시에 '소득의 3~9%밖에 걷지 않으면서도 은퇴 뒤에는 평생소득의 70%를 보장하겠다'는 약속을 불과 15년 만에 뒤집은 것이다.
개선안은 내용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이렇다.
통계청 기준 도시가구 평균인에 속하는 A씨는 현재 국민연금에 9년 7개월 가입해 있고 앞으로 60세까지 18년 동안 보험료를 더 내야하며 63세부터 82세(통계청기준 예상 평균수명)까지 19년 동안 연금을 받을 수 있다. 종전 기준에서 A씨는 5,776만원을 내고 1억5,024만원을 탄다. 개선안이 적용되면 6,438만원을 내고 1억3,561만원을 받게 된다. 연간 수익률이 9.16%에서 8.36%로 줄어드는 셈이다.
'이게 무슨 개혁인가?'하고 많은 가입자들은 황당해한다. 개혁은 앞으로는 지금보다 더 좋아진다는 것인데, 도대체 뭐가 좋아진다는 것인가? 가만히 생각해보면, 좋아지는 게 있긴 있다. 정부는 '15년 전의 공약(公約)이 사실은 공약(空約)이었다'고 자백함으로써 해묵은 죄의식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됐다. 가입자들에게는 '품위 있는 노후생활이 거저 주어질 수 있다'는 환상에서 깨어날 수 있는 계기가 주어졌다. 또한 나이 들어 자녀들로부터 '엄마 아빠는 너무 이기적이야'하는 비난을 듣지 않을 수도 있게 됐다.
국민연금관리공단에 따르면 종전 기준으로는 2036년부터 국민연금기금에 들어가는 돈보다 나가는 돈이 많아진다. 2047년이면 기금이 바닥을 드러낸다. 개선안대로라면 연금적자가 시작되는 시점은 2055년으로 늦춰지고 국민연금의 존속 기한은 2075년경으로 늦춰진다. 그 때쯤이면 베이비 붐 세대(1950년대 중반~1960년대 중반에 태어난 세대)에 대한 연금지급이 줄어듦에 따라 크게 손을 대지 않아도 국민연금이 잘 굴러갈 것으로 전문가들은 내다본다.
과연 그대로 될지, 앞으로 70년 뒤의 일을 지금 예측하기는 어렵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정부가 연금을 주지 못하는 최악의 상황을 맞이할 가능성은 거의 없을 것이라는 점이다. 정부는 '노후에 연금을 주겠다'고 국민들에게 법으로 약속하고 다달이 적지 않은 연금보험료를 걷어왔다.
연금지급 실패는 국민연금제도의 파산을 넘어 곧 국가의 파산이다. 현실의 정부가 이런 상황을 수수방관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들다. 그러니 너무 낙담할 필요가 없다. '한번 약속을 어긴 정부를 또 어떻게 믿겠느냐'고 고집을 피울 이유도 없다. 약점을 제대로 잡았다고 '쌈짓돈 털어 제대로 굴리기는커녕 까먹기만 하고 정부가 마음대로 주물럭거리고 있다'는 악담을 퍼부을 일도 아니다.
사실 국민연금제도는 개선안이 그대로 적용된다고 하더라도 훌륭한 투자처다. 8.36%의 수익률은 3년 만기 정기적금이나 생명보험사의 개인연금 상품의 수익률 4~5%보다 높다. 앞으로 몇 번의 개혁이 더 이뤄진다고 하더라도 국민연금 수익률이 민간연금보다 낮아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정부가 국민연금 가입을 강제할 명분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이제 가입자들이 생각해볼 것은 '국민연금을 어떻게 잘 활용할까'이다.
첫째, 국민연금을 노후대비 재테크의 기본으로 인정하고 장래 타게 될 연금(은퇴 전 연평균소득의 50%가량)을 노후 생계비의 기본 밑천으로 계산한다. 냉정히 생각해보면 '연금을 못 받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소득신고를 낮춰서 할 이유가 없다. 만의 하나 연금이 파산 나고 나라 전체가 쪽박을 차는 일이 생기지 말란 법도 없으나 그럴 가능성은 은행 보험사 투신사 등 민간 회사가 문을 닫는 확률보다는 훨씬 낮다.
둘째, 국민연금으로 충당할 수 없는 생계비의 나머지 절반을 마련하는 계획을 세운다. 선진국 같으면 '기초연금-기업연금-개인연금'의 3층 연금구조에 맞춰 노후대비 자금을 적당히 배분하는 것이 유력한 방법이다. 여기서 기초연금이란 아주 적게 내고 아주 적게 받는 공적 연금으로 주로 저소득층의 노후생계를 보장하는 데 초점을 둔다. 기업연금제는 우리의 퇴직금제도에 해당하는 것으로 평균 소득층의 은퇴자금 마련을 돕는다.
그런데 우리나라에는 기업연금 제도가 아직 도입되지 않았다. 정부가 '퇴직연금제'라는 이름으로 내년 7월까지는 도입하겠다는 의지를 최근 밝힌 정도다. 개인연금 상품은 보험사들이 제법 많이 내놓고 있지만 질과 양 모든 면에서 선진국만큼 만족스런 수준은 아니다. 하지만 어쩌랴. 이런 척박한 환경에서 노후 대비책을 세워야 하는 게 현실이다.
바야흐로 국가와 기업이 일부만 책임지고 나머지는 개인이 알아서 노후를 설계하고 대비책을 세워야 하는 시대가 됐다. 이제 말 많고 탈 많은 국민연금은 하나의 투자처로 간주하고 수익률과 위험의 냉정한 잣대로 판단하는 것이 옳다. 상종하지 못할 배신한 애인이 아니라, 처음 만났을 때의 매력은 사라졌지만 그나마 미더운 노후의 동반자로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어려운 여건에서 노후를 설계하는 한 가지 지혜가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