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2003년 7월28일자 마이니치신문(每日新聞) 사설
휴전협정(休戰協定) 50년, 고립(孤立)이 보여주는 북조선(北朝鮮)의 잘못
조선전쟁(朝鮮戰爭)의 휴전협정체결(休戰協定締結)로부터 7월27일에 50년이 된다. 냉전(冷戰)으로 분단(分斷)된 남북조선(南北朝鮮)의 유혈(流血)은 3년 동안 계속되어, 수백만 명의 희생자(犧牲者)를 냈다.
반세기(半世紀)가 지난 지금도 화해(和解)는 달성(達成)되지 않은 채, 다시 핵문제(核問題)를 둘러싼 긴장(緊張)이 높아지고 있다. 영속적(永續的) 평화구도(平和構圖)는 어떻게 하면 그릴 수 있는 것인가.
전쟁은 1950년 6월25일, 북조선군(北朝鮮軍)의 남진(南進)으로 시작되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安全保障理事會)는 침략비난(侵略非難)과 무력반격(武力反擊)을 결의(決議)했다.
미국을 중심(中心)으로 16개국의 국제연합군(國際聯合軍)이 조직(組織)되어 북조선군을 중국 국경(國境) 가까이까지 추격(追擊)했지만, 중국 의용군(義勇軍)이 참전(參戰)해 전선(戰線)은 교착상태(膠着狀態)에 빠졌다. 1953년 7월27일, 국제연합군[미국]·북조선군·중국군(中國軍)의 각(各) 사령관(司令官)이 휴전협정에 조인(調印)했다.
냉전 후, 북조선을 떠받쳐 온 소련(蘇聯)이 소멸(消滅)되었고, 1991년에는 남북조선의 유엔 동시가맹(同時加盟)도 실현(實現)되었다. 그럼에도 불구(不拘)하고, 전쟁의 후유증(後遺症)은 지금도 주변국(周邊國)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다.
첫 번째, 휴전 후에도 평화조약(平和條約)은 체결되지 않아, 엄밀(嚴密)한 의미(意味)로 전쟁상태(戰爭狀態)는 끝나지 않았다. 북조선은 휴전위원회(休戰委員會)로부터 철수(撤收)해, 「휴전협정파기(休戰協定破棄)」를 주창(主唱)한 적도 있다. 국제연합군 조직도 존속(存續)해, 유사재발시(有事再發時)에는 요코스카(橫須賀)·요코타(橫田)·카데나(嘉手納) 등 주일미군(駐日美軍) 시설(施設) 7개소(個所)가 국제연합군의 지원기지(支援基地)로 지정(指定)되어 있다.
두 번째, 북조선은 핵개발 뿐만 아니라 미사일이나 생물화학무기(生物化學武器)의 제조(製造)·확산(擴散), 마약(痲藥)이나 위조(僞造) 달러 수출(輸出) 등의 의혹(疑惑)도 갖고 있어, 주변국의 위협(威脅)이 되고 있다. 같은 냉전시대(冷戰時代)에 아시아에서 일어난 전쟁으로도, 조선전쟁 후에 일어난 베트남(Vietnam) 전쟁은 벌써 끝나, 미국-베트남 관계(關係)는 정상화(正常化)되었다. 그 차이는 대조적(對照的)이다.
부각(浮刻)되어 있는 것은, 국제사회(國際社會)에서 북조선의 고립(孤立)만이 착실(着實)하게 깊어진 것일 것이다. 탈북자(脫北者)의 급증(急增), 기아(飢餓), 경제붕괴(經濟崩壞)에서도 핵(核)을 휘두르는 「벼랑끝 외교(外交)」에는, 맹우(盟友)인 중국조차도 물러서고 있다.
일본은 전쟁의 직접당사국(直接當事國)은 아니었지만, 후방거점(後方據點)으로서 특수경기(特需景氣)로 달아올랐다. 반면(反面), 냉전구조(冷戰構造)에 단단하게 포함(包含)되어 북조선과의 국교정상화(國交正常化)는 오랫동안 떨떠름한 과제(課題)가 되었다. 북조선에 들어간 일본인처(日本人妻)의 일시귀국문제(一時歸國問題)도 미해결(未解決)이다. 조선반도(朝鮮半島)의 평화는 남의 일이 아니다.
한국에서는 전쟁의 기억(記憶)이 급속(急速)히 풍화(風化)하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美 민간(民間) 연구기관(硏究機關)에 의하면, 조선전쟁이 재발(再發)하면 서울에서만 100만 명 이상의 희생이 전망(展望)된다. 휴전기념일에 맞춰, 아난(Kofi A. Annan) 유엔 사무총장(事務總長, Secretary-General)은 핵문제 해결을 서둘러, 조선반도의 화해를 목표로 하도록 호소(呼訴)했다.
전쟁을 두 번 다시 일으켜서는 안 된다. 그와 동시에, 평화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면, 주변국들이 일치(一致)해 대화(對話)와 압력(壓力)의 길을 끈질기게 진행(進行)할 필요가 있는 것도 분명히 말하고 싶다. 日·美·韓·中이 제시(提示)하고 있는 다국간(多國間) 협의(協議)는 그 첫 걸음이 된다.
50년 전의 전화(戰火)는 사라졌지만, 긴장은 끝나지 않았다. 대한항공기(大韓航空機) 폭파(爆破) 테러(terror)[1987년]나 일본인 납치(拉致) 등 그 대부분은 북조선의 행동에 의한 것이다. 세계(世界)의 룰(rule)을 무시(無視)하며, 스스로 긴장과 위협을 만들어 내 이익(利益)을 얻으려고 하는 외교는, 누구로부터도 지지(支持)를 받지 않게 된 지 오래다.
고립(孤立)과 긴장이 도착(到着)하는 끝에 무엇이 남는 것인가. 반세기의 교훈(敎訓)을 북조선은 강하게 자각(自覺)해 주었으면 한다.
http://www.mainichi.co.jp/eye/shasetsu/200307/28-1.html
B. 북조선(北朝鮮) 공작원(工作員), 73세 남자를 재택기소(在宅起訴) 방침(方針)
「만경봉호(萬景峰號)」를 무대(舞臺)로 정보수집(情報蒐集)
마이니치신문(每日新聞) 2003년 7월28일 15:00
북조선(北朝鮮)의 부정기(不定期) 화객선(貨客船) 「만경봉호(萬景峰號)」를 무대(舞臺)로 한 공작활동(工作活動)에 연루(連累)되어, 도쿄지검(東京地檢) 공안부(公安部)는 7월28일, 공작원(工作員)인 73세 남자를 공정증서원본부실기재(公正證書原本不實記載)와 출입국관리법위반(出入國管理法違反)[불법체재(不法滯在)] 등의 죄(罪)로, 재택기소(在宅起訴)[불구속기소(不拘束起訴)]한다는 방침(方針)을 굳힌 모양(模樣)이다.
남자는 용의(容疑)[혐의(嫌疑)]를 인정(認定)했으나 병(病)이 있었기 때문에, 경시청(警視廳)은 체포(逮捕)하지 않고, 서류송검(書類送檢)[검사(檢事)에게 서류를 넘김]했다. 지검(地檢)은 남자가 일본에 오랫동안 불법체재(不法滯在)하면서, 공작활동을 하고 있었던 점을 중시(重視)해, 기소가 필요(必要)하다는 판단을 했다고 보인다.
경시청 공안부가 조사(調査)한 것 등에 의하면, 남자는 한국내(韓國內)에서 조선노동당원(朝鮮勞動黨員)으로서 반정부활동(反政府活動)을 하고 있던 1949년, 적발(摘發)을 피하기 위해서 일본에 밀입국(密入國)했다.
1993년경부터 조선노동당의 공작기관(工作機關)인 통일전선부(統一戰線部)의 공작원이 되어, 재일거점(在日據點)의 책임자(責任者)로서 한국의 정치(政治)·군사정보(軍事情報)를 수집(蒐集)했다.
북조선으로부터의 지시(指示)나 보고(報告)는 「만경봉호」를 통해서 행해지고 있던 실태(實態)가, 압수자료(押收資料)로부터 판명(判明)되고 있다. 남자는 조사에 대해, 공작활동의 사실(事實)을 인정하고 있다고 한다.
서류송검의 용의사실(容疑事實)에 의하면, 남자는 밀입국 후, 다른 재일조선인(在日朝鮮人)으로 되어 마침내, 외국인등록증명서(外國人登錄證明書)를 입수(入手)했다. 1999년 3월, 등록갱신(登錄更新) 때에도, 거주지(居住地)의 도쿄도(東京都) 나가노구장(中野區長)에게, 이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등록한 의심(疑心)을 받고 있다.
http://www.mainichi.co.jp/news/selection/20030728k0000e040059000c.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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