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사설] 언더우드家를 떠나 보내며 에 대해서
(홍재희) =======친일 반민족 반민주 반 통일의 냉전 수구적인 방상훈의 세습족벌사주체제인 조선일보 사설은
" 4대(代)에 걸쳐 이 땅과 이 땅의 사람들에게 조건 없는 사랑과 헌신을 바쳐온 언더우드가(家)가 한국을 떠난다고 한다. 1885년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 우리 이름 원두우 목사가 첫 장로교 선교사로 이 땅에 발 딛은 지 119년 만이다. 그의 증손자인 원한광 한미교육위원회 위원장은 “우리 일가가 한국에서 할 수 있는 봉사는 다 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
(홍재희) ======= 라고 주장하고 있다. 서세동점의 시기에 서구열강들이 동양에 들어올 때 함포와 선교사를 앞세웠다고 한다. 4대(代)에 걸쳐 이 땅에 살았던 언더우드가(家)가 의 한반도 상륙도 그런 측면으로 접근해 볼 수 있다. 특히 한반도가 외세의 치열한 식민지 쟁탈전의 각축 속에 흔들리고 있던 시기에 언더우드가(家)가가 한반도에 상륙한 것은 우리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현대사를 통해 외세의 비극적인 식민지 통치를 당하는 등 격동의 시기에 한반도에서 친일 반민족적인 범죄적 행위를 저지른 방상훈의 세습족벌세습사주체제인 조선일보와 달리 이방인으로서 이땅에 들어와 교육사업과 선교 문화사업을 벌인 점에 대해서 우리는 주목하고 긍정 평가한다.
(홍재희) ======== 부연한다면 일제수탈의 암흑시대에 일제의 나팔수 역할을 한 친일 반민족의 방씨 족벌 조선일보와 언더우드가(家)가가 보여준 발자취는 퍽 대조적이다. 방씨 족벌의 조선일보는 언더우드가(家)가를 보면서 부끄러워 해야한다. 일제 식민지와 군사독재체제에 아부하지 않고 부도덕하게 유착하지 않고 4대(代)째 교육 . 종교 . 문화 사업에 헌신한 언더우드가(家)가와 달리 방씨 족벌의 조선일보는 친일 반민족과 반민주 반 통일의 부끄러운 역사는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인가를 웅변으로 말해주고 있다.
(홍재희) ======= 조선사설은
" 언더우드가만큼 대를 이어 피붙이보다 더한 사랑을 우리에게 쏟아부었던 외국인은 없었다. 그들에게 한국은 ‘제 2’라는 수식어가 필요 없는 고향이었다. 1세가 연세대와 새문안교회를 세우고 YMCA를 조직해 캄캄했던 그 시대 민중들을 위해 신(新)문명의 불을 밝힌 이래 후대(後代)들은 이 땅에서 나거나 자라며 사랑을 기울여 왔다. 3대 모두 이 땅에 뼈를 묻었다. "
(홍재희) ======== 라고 주장하고 있다. 조선사설은 " 언더우드 ... 1세가 연세대와 새문안교회를 세우고 YMCA를 조직해 캄캄했던 그 시대 민중들을 위해 신(新)문명의 불을 밝힌 이래 후대(後代)들은 이 땅에서 나거나 자라며 사랑을 기울여 왔다. " 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그 캄캄했던 시대에 미국인인 언더우드가 민중들을 위해 신(新)문명의 불을 밝히고 있을 때 방응모의 조선일보는 일제 식민지 정권의 문화통치의 일환으로 허가받은 종이신문매체를 통해 일제의 한민족에 대한 수탈정책의 나팔수 역할을 하며 한민족을 탄압하지 않았는가? 방상훈의 족벌체제인 조선일보는 부끄럽지 않은가?
(홍재희) ====== 조선사설은
" 언더우드가 사람들이 우리를 더욱 감복시키는 점은 그들이 성경말씀 그대로 하나님의 종으로 어떻게 그처럼 티없는 베풂의 삶을 살 수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그들에게선 식민지시대, 험한 말로 제국주의시대 서양인이 쉬 드러냈던 계몽과 교화의 사도인 양 하는 교만이나 억지 겸손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들은 우리가 이민족에게 짓밟힌 모습 앞에서도 “한민족은 주권을 빼앗길 민족이 도저히 아니다”라며 우리의 역량을 굳게 믿어줬다. "
(홍재희) ======== 라고 주장하고 있다. 조선사설은 "언더우드가 사람들...그들은 우리가 이민족에게 짓밟힌 모습 앞에서도 “한민족은 주권을 빼앗길 민족이 도저히 아니다”라며 우리의 역량을 굳게 믿어줬다. "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때에 조선일보는 어디서 무엇을 했는가? 방응모의 조선일보는 일본왕에게 충성을 맹세하며 일제식민지 지배체제를 찬양하는 나팔수노릇을 하지 않았는가?
(홍재희) ====== 방응모 조선일보 사장은 자신의 돈으로 고사포를 직접 구입해서 일제에 헌납해 조국의 독립을 위해 동토의 시베리아 . 만주벌판에서 풍찬노숙하며 민족과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쳐 싸우고 있는 독립군들을 사실상 사살하라는 것이나 다름없는 반민족적인 범죄행위를 서슴치 않았다. 어디 그뿐인가? 방응모의 조선일보는 일제시대에 조선의 숫처녀들을 일제의 성노리개로 내몰며 종군위안부로 나가도록 독려하는 그래서 결과적으로 일제의 나팔수 노릇을 통해 조선의 숫처녀들의 소중한 정조를 유린하는 인격살인을 서슴치 않았다.
(홍재희) ======= 뿐만 아니라 방응모의 조선일보는 일제시대에 나이어린 학생들을 일제의 총알받이인 학도병으로 내모는데 적극적인 나팔수역할을 통해 수많은 학생들이 학도병으로 끌려가 목숨을 잃게 한 것도 부인할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이러한 방씨 족벌의 조선일보가 친일 반민족적인 범죄행위에 대한 반성이나 진실고백도 없이 한마디 사죄도 없이 오히려 민족의 정론지라고 큰소리 치면서 "언더우드가 사람들이 ... “한민족은 주권을 빼앗길 민족이 도저히 아니다”라는 말을 아무 죄책감 없이 그대로 전할 수가 있을까? 조선일보의 방씨 족벌은 주권을 빼앗길 한민족이 도저히 아니라는 범주 속에 포함될 수 없는 반민족적인 집단이다.
(홍재희) ====== 조선사설은
" 만남과 헤어짐에서 인연의 섭리가 작용함을 믿어온 우리는 일가를 떠나보내며 지난날 그들의 베풂이 오늘 우리에게 베풂의 모범을 보이려 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떠올리게 된다. 우리도 바깥 세상으로 나가 도움을 줘야 하는 지금, 자기를 낮추며 베풀고 상대를 높이며 돕는 베풂의 방식과, 그곳 사람들과 한 몸이 돼 봉사하고 헌신하다 그곳에 뼈를 묻는 가없는 사랑의 자세가 바로 그것이다. "
(홍재희) ======== 라고 주장하고 있다. 우리한민족과 한반도가 근현대사를 통해서 외세의 침입에 대해서 무방비 상태로 굴욕적인 식민지 지배를 받기까지 했다. 그러한 근현대사의 굴절속에 언더우드家가 한반도에 들어왔던 것이다. 그리고 한국사회에서 언더우드家가 4대에 걸쳐 교육과 종교 문화 사업에 헌신하며 기여한 측면에 대해서는 우리들이 긍정한다. 그러나 우리한민족과 한반도는 아직도 근현대사의 비극적인 식민지 시대의 아픔이라고 할 수 있는 분단이라는 민족적 비극의 이산을 풀지 못하고 고통 속에 헤매고 있다.
(홍재희) ====== 그러나 한국에 들어와 기독교문화와 미국식교육을 전파한 언더우드가(家)가 4대(代)에 걸쳐 한국사회에 미국식 가치를 심어놓고 이제 한국사회를 떠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측면으로 접근해 보면 언더우드家가 우리에게 베풂의 모범을 보인 실체는 무엇인가? 언더우드家가 돌아가고 있는 미국이라는 국가체제가 한반도에 대해서 유지하고 있는 분단의 기득권과 언더우드家가가 처음 한반도에 상륙한 것는 맞닿아있는 측면이 다분히 있다는 점에 대해서도 진지하고 심각하게 고민해 볼 시기가 아닐까? 지금까지 119년 동안 언더우드家와 미국이 한국에 베픈 것은 무엇이고 한국을 통해서 언더우드家와 미국이 얻은 것은 무엇인가라는 접근도 이 시점에서는 필요하다고 본다. 오늘자 조선사설의 주장과 같이 언더우드家로부터 한국사회가 일방적으로 베풂을 받았다는 얘기는 쉽게 수긍할 수 없다.
(홍재희) ======== 조선사설은
" 언더우드 1세의 동상에 새겨진 위당(爲堂 鄭寅普)의 명문은 일가 4대에 두루 바칠 만하다. ‘고심으로 조선 민중의 믿음과 슬기를 돕는 그의 평생을 생각할지로다. 베푼 바 날로 늘어감을 따라 우리의 사모 갈수록 깊다’. "
(홍재희) ======== 라고 주장하고 있다. 우리 한민족은 미국과 같이 국가의 역량이 강해져서 세계 각국에 베풀게 될 때 미국과 같이 함포와 선교사를 동원해 미국식 가치를 심어 놓기 위해 하나의 민족을 마치 생 가지를 찢듯이 둘로 갈라 놓으며 자신들의 가치체계를 강제로 이식시키는 패권적 세계진출의 과오를 저지르지 말자. 우리가 베풀려는 대상들의 정치와 문화적 가치를 존중해 주고 발전시키는 측면으로 돕자.언더우드家가 한국을 떠나는 지금 우리 한민족은 외세의 분단 고착적인 정치질서의 희생물이 된지 반세기가 훨씬 넘었음에도 불구하고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분단의 야만적인 20세기식 냉전 정치 질서 속에 미아로 남아있지 않은가? 이러한 현실을 놓고 봤을 때 우리민족이 앞으로 융성해져서 남의 나라나 남의 민족을 도울 때 그들 문화나 가치체계를 존중해주고 계승 발전해 주는 방향으로 도움을 줘야 한다고 본다.
[사설] 언더우드家를 떠나 보내며(조선일보 2004년 5월12일자)
4대(代)에 걸쳐 이 땅과 이 땅의 사람들에게 조건 없는 사랑과 헌신을 바쳐온 언더우드가(家)가 한국을 떠난다고 한다. 1885년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 우리 이름 원두우 목사가 첫 장로교 선교사로 이 땅에 발 딛은 지 119년 만이다. 그의 증손자인 원한광 한미교육위원회 위원장은 “우리 일가가 한국에서 할 수 있는 봉사는 다 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언더우드가만큼 대를 이어 피붙이보다 더한 사랑을 우리에게 쏟아부었던 외국인은 없었다. 그들에게 한국은 ‘제 2’라는 수식어가 필요 없는 고향이었다. 1세가 연세대와 새문안교회를 세우고 YMCA를 조직해 캄캄했던 그 시대 민중들을 위해 신(新)문명의 불을 밝힌 이래 후대(後代)들은 이 땅에서 나거나 자라며 사랑을 기울여 왔다. 3대 모두 이 땅에 뼈를 묻었다.
언더우드가 사람들이 우리를 더욱 감복시키는 점은 그들이 성경말씀 그대로 하나님의 종으로 어떻게 그처럼 티없는 베풂의 삶을 살 수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그들에게선 식민지시대, 험한 말로 제국주의시대 서양인이 쉬 드러냈던 계몽과 교화의 사도인 양 하는 교만이나 억지 겸손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들은 우리가 이민족에게 짓밟힌 모습 앞에서도 “한민족은 주권을 빼앗길 민족이 도저히 아니다”라며 우리의 역량을 굳게 믿어줬다.
만남과 헤어짐에서 인연의 섭리가 작용함을 믿어온 우리는 일가를 떠나보내며 지난날 그들의 베풂이 오늘 우리에게 베풂의 모범을 보이려 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떠올리게 된다. 우리도 바깥 세상으로 나가 도움을 줘야 하는 지금, 자기를 낮추며 베풀고 상대를 높이며 돕는 베풂의 방식과, 그곳 사람들과 한 몸이 돼 봉사하고 헌신하다 그곳에 뼈를 묻는 가없는 사랑의 자세가 바로 그것이다.
언더우드 1세의 동상에 새겨진 위당(爲堂 鄭寅普)의 명문은 일가 4대에 두루 바칠 만하다. ‘고심으로 조선 민중의 믿음과 슬기를 돕는 그의 평생을 생각할지로다. 베푼 바 날로 늘어감을 따라 우리의 사모 갈수록 깊다’. 입력 : 2004.05.11 18:34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