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북조선의 열차 폭발, 깊어지는 수수께끼
총서기(總書記) 통과역에 어떻게 석유 적재 열차가 있는가
너무 깊은 폭발 웅덩이, 어린이들은 통과 후 곧 희생[?]
산케이신문(産經新聞) 2004년4월30일
[서울=久保田るり子] 북조선 북서부의 룡천역에서 일어난 열차 폭발 사고 발생으로부터 4월29일에 일주일이 되었다. 이재민과 현장 복구를 위한 국제 지원이 본격화하는 가운데, 사고를 둘러싼 수수께끼는 여전히 피어오르고 있다. 한국은 민관(民官) 전체의 국민적인 지원 운동을 전개하고 있지만, 북조선 전문가나 정보통은 「정말로 사고였는가」라며 구체적인 의문을 나타내고 있다.
북조선에서 김정일 총서기(總書記)의 이동은 최고의 국가비밀에 속한다. 정보통에 의하면, 특별열차의 이동에 맞추어 인민군보위사령부(人民軍保衛司令部)[軍의 비밀경찰]의 철도부(鐵道部)가 각 통과역에 요원을 파견, 사전에 구내감시(構內監視)나 정비를 실시한다고 한다.
보위사령부 간부라도 정확한 이동 시간은 5분 부터 10분 전에 알게 될 정도의 기밀(機密)로 다루어지는데, 하물며 「총서기가 이동하는 통과역에, 인화성(引火性)의 비료와 석유를 실은 열차가 근처에 정차(停車)하고 있는 것 등, 통상(通常)은 생각할 수 없다」[북조선 전문가]
전문가가 첫번째로 지적하는 것은, 현장에 있는 15미터 깊이의 웅덩이다.
북조선은 「1톤 폭탄이 동시에 100개 폭발한 위력(威力)」[4월27일 조선중앙통신] 이라고 보도하며 「1킬로미터 주변이 완전히 폐허가 되었다」[4월27일 조선중앙통신] 라고 하고 있다.
하지만, 지상에서의 폭발으로서는 역학적으로 웅덩이의 깊이가 부자연스럽다고 하는 전문가의 의견도 있어, 「폭발물이 지하에 매설(埋設)되었다는 혐의도 있다」라고, 한국의 軍 관계자는 지적한다.
김정일의 국경 통과시간에 대해서도 수수께끼에 휩싸이고 있다.
김정일은 4월22일 오전 4시가 지나 중·북 국경을 통과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룡천역의 폭발 사고는 4월22일 오후 12시15분이다. 일본과 한국의 TV가 멀리서 국경을 통과하는 특별열차를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 근거가 되어, 사고는 8시간 후라고 하는 것이 현재로서는 정설(定說)이다.
다만, 김정일의 특별열차는 「동형(同型)이 3대 있다」[북조선 전문가] 라고 한다. 미명(未明)의 통과열차에 김정일이 타고 있었는지 어떠했는지를 확인할 방법이 없는 것이 실정(實情)이다.
희생자 161명 중 76명이 현장으로부터 약 200미터 떨어진 룡천소학교(龍川小學校)의 어린이들이었지만, 「총서기의 귀로(歸路)인 룡천역에 소학생(小學生)들이 모여 있었다고 들었다」라고 국경의 중국측 단둥(丹東)으로부터의 증언도 있어, 어린이들이 역 주변에서 희생된 것은 김정일 통과로부터 시간이 많이 경과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라는 등, 암살미수(暗殺未遂)의 가능성을 의심하는 소리도 사라지지 않고 있다.
북조선의 평안북도 룡천 주변은 중앙으로부터 떨어져 있기 때문인지, 「반골정신(反骨精神)」[어떤 세력이나 권위에 맹종하지 않고 저항하는 것]이 강한 지방색(地方色)이 있다. 일본 식민지 시대에는 서울에서 일어난 「3·1독립운동」에도 다수가 참가해 29명이 사망했고, 1945년 해방시에는 反공산주의 학생 운동이 일어났었다. 국경에 가깝기 때문에 스파이도 많다고 여겨져 「음모(陰謀)나 계략(計略)이 일어나기 쉬운 배경이 있다」라는 견해도 있다.
북조선은 발생 3일째인 4월24일에 해외를 향해서 뿐만이 아니라, 국내에도 사고를 보도했다. 국민에게 사고를 알리는 것은 이례적(異例的)인 일로, 원조(援助) 목적 등 이라고도 해석되었지만, 「해외로부터도 원조가 들어오는 대사고(大事故) 라고 하면서 음모설(陰謀說)을 잠재우기 위한 국내선전(國內宣傳)은 아니었는지」라는 분석도 있다.
http://www.sankei.co.jp/databox/n_korea/index.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