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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이에서 본 인간 박정희(필독!!!).....

저 이글 읽고 많이 울었습니다....



김두영(전 청와대 비서관)



나는 박대통령을 1961년 여름에 처음 보았다. 고향인 경북 영주에서 홍수가 났다. 국가재건 최고회의 박정희의장은 수해지역 시찰차 영주에 내려왔다. 첫 인상에 눈빛이 매우 형형했던 박대통령은 현장에서 항구적인 대책을 지시, 영주시내를 관통하고 있던 하천의 흐름을 공병장비로 산 허리를 잘라 시외로 돌려 놓도록 한 것이다.

지금 시내의 그 하천터는 택지로 변해 있고, 그 뒤로는 물난리가 없었다. 그때 대학 휴학생이던 나는 현장을 누비는 한 지도자의 결단과 안목에서 큰 감동을 받았던 것이다.



육여사 피격날의 박대통령



나는 현역으로 군복무를 마치고 나서 뒤늦게 대학을 졸업하고 1971년에 청와대에 들어갔다. 75년까지는 대통령 직속인 제2부속실 행정관으로 일했다. 제1부속실은 대통령을, 제2부속실은 대통령부인을 모시는 기구였다. 육영수여사 서거 후에는 공보비서실 행정관, 사정담당 비서관으로 일했고 5공화국 때는 정무 제2비서관, 국정자문회의 사무처장, 6공화국에 들어서는 구성이 되지 못한 국가원로자문회의 사무차장으로 있었다. 1989년 7월에 공직을 그만둘 때까지 19년간 박대통령을 비롯, 최규하 전두환 노태우 네 대통령 밑에서 일한 셈이다. 그러나 1988년 3월15일 청와대를 떠났으므로 서류상으로는 네분의 대통령을 모신 셈이지만 노대통령을 직접 보필한 일은 없다. 가끔 네 대통령을 비교하는 글을 써 달라는 요청을 받을 정도로 나는 희귀한 경험을 한 셈이다.



올해의 10월26일은 박대통령이 서거한 이후 두 번째의 10년이 시작된 첫돌이었다. 첫 10년동안 박대통령은 찬사보다는 비판을 더 많이 받았다. 생존시의 통치방식에 대한 사후의 반작용으로서 불가피한 면도 있었을 것이다.



이 10년 동안 박대통령을 가까이에서 모셨던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그분을 변호할 수 없는 분위기도 있었다. 박대통령을 가장 가깝게 관찰했던 분들이 숨을 죽이고 있는 사이에 진행된 박대통령 격하 또는 재평가작업은 왜곡된 사실에 근거한 경우가 많았다. 나는 한 가족처럼 박대통령 내외를 모시면서 두 분의 인간적 면모를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자세히 살필 기회가 있었다. 자연히 두 분에게 호의적일 수밖에 없는 입장이지만 그런 나의 박정희․육영수여사관(觀)도 사실적인 자료로서의 가치가 있을 것 같아 두분의 인간적인 면모를 중심으로 단편적이나마 글을 하번 쓰고 싶었던 것이다.



나는 박대통령의 인간적인 면이 가장 집약적으로 그리고 극명하게 드러난 경우가 육여사 피격사건 때였다는 생각이 든다.

1974년 8월15일의 육여사 피격장면을 나는 관사에서 텔레비전을 시청하다가 보게 되었고 육여사가 피격되었다는 긴급연락을 받고 곧 서울대학 병원으로 달려갔다. 육여사는 국립의료원을 거쳐 서울대학병원 응급실에 옮겨져 있었다. 내가 들어서니 경호원이 응급실 침대에 누워있는 육여사의 두 다리를 안아 들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 경호원은 나를 발견하고는 반가워하는 기색으로 나에게 그 임무를 넘겨주었다. 대통령 부인의 다리를 받치고 있는 것이 황송하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했던 것 같았다.



머리에 총탄을 맞은 육여사는 의식불명상태에서 헉,헉하는 불규칙적인 호흡소리를 내고 있었다. 한 20분쯤 육여사가 응급처치를 받고 수술실로 옮겨진 직후에 박정희 대통령이 서울 의과대학장의 안내를 받으며 들어왔다. 뒤에서는 박종규 경호실장이 수행하고 있었다.

나는 그 순간의 박대통령 표정을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이다. 핏기가 가시고 검은 얼굴은 샛노랗게 변해있었다. 무서운 인상이었다. 박대통령은 의사들에게 『최선을 다해주시오』라고 단단히 부탁하고는 대통령전용 입원실로 올라갔다.



『총쏘지 마!』



육여사에 대한 수술은 오래 걸렸다. 나는 육여사가 끼고 있던 반지와 머리뼈 파편을 의사로부터 받아 호주머니에 보관하고 있다가 운명한 후에 의사에게 돌려주었다. 머리에 총탄을 맞을 때 욱여사의 머리뼈가 부서지면서 떨어진 것을 수습한 모양이었다. 이어서 공휴일이라 서산 농장에 내려가 있던 김종필 총리가 신직수정보부장과 함께 병원에 도착했다.



김총리는 신부장에게 『이것은 한사람이 한 짓이 아닐 것이다. (박대통령이 시승식에 참석하게 돼 있었던)청량리와 영등포 전철역도 조사하라』고 지시했다. 박대통령은 수술 도중에 수술실로 내려와 의사로부터 『어렵겠다』는 보고를 받고는 오후 4시쯤 청와대로 들어갔다.

육여사는 저젹 7시쯤 운명했다. 육여사에 대한 수술이 시작될 무렵에 갑자기 하늘이 노래지면서 건물벽과 마당의 색깔이 오렌지색으로 변하던 것을 나는 똑똑히 보았고, 일부 신문에도 보도되었다. 지금 생각해도 참으로 신기한 일이었다.



나는 나중에 경호원들로부터 저격당시 국립극장에서 박대통령이 취한 행동에 대하여 소상히 들을 수 있었다. 총성이 나자 박대통령은 연설대 뒤에서 몸을 낮추었다. 경호원들이 옆에 붙었다.



『잡았나?』 『총쏘지 마!』



이것이 박대통령의 첫 반응이었다. 자신의 목숨이 위협받고 있는 순간에도 경호원들이 청중석을 향해 사격을 할 때의 유혈극을 걱정하고 있었다.

육여사가 피격당한 것을 가장 먼저 발견한 이도 박대통령이었다. 경호원에게『저기 우리 식구하테 가봐!』라고 했다고 한다. 박대통령은 『연설을 계속하겠습니다』라면서 8․15 경축사를 다시 읽기 시삭하였다. 총성으로 중단되었던 귀절 바로 뒷문장을 정확히 짚어내 읽어갔다. 퇴장할 때 박대통령은 육여사의 고무신과 핸드백을 자신이 직접 주워 갖고 나오다가 경호원에게 넘겼다. 박대통령은 독립유공자들을 위로하는 리셉션장에 들러 공식행사를 끝낸 뒤 서울대 병원으로 갔던 것이다.



박대통령은 그 위기의 순간에서도 당황하지 않고 대담하면서도 세심하게 처신하였다. 공인과 사인의 갈림길에서 보여준 박대통령의 이 같은 태도는 너무나 인상적이었으며 보는 이에 따라 가슴을 아프게 했다. 박대통령을 평하기를 「청탁을 같이 들이마시는 사람」「작게 치면 작게, 크게치면 크게 울리는 큰북 같은 분」이라고 한 말이 있었다. 박대통령은 담대해야 할 때는 무섭게 담대하였고, 자상해야 할 때는 자상했으며, 슬플 때는 누구보다 눈물이 많았던 분이었다.



대통령의 대성통곡



저녁 7시를 조금 넘어서 육여사의 유해가 청와대에 도착하였다. 박대통령은 까만 양복을 입고 지만군, 근영씨와 함께 현관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유해는 청와대 본관1층 영부인 접견실에 안치되었다. 접견실 입구에서 나는 그냥 서서 울고 있는데 박대통령이 갑자기 내 목을 끌어안고는 대성통곡을 하는 것이었다. 국무위원들이 옆방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김정렴비서실장이 내 옆구리를 내지르면서 『각하 모시고 이러면 어떻게해』하며 야단을 치는 것이었다.



나는 『각하 들어가시지요』라고 하면서 대통령 집무실로 모셨다. 육여사의 유해는 대접견실로 다시 옮겨져 빈소가 차려졌다. 5일장이었다. 박대통령은 매일 새벽에 2층 침실에서 내려와 분향을 했다. 그때 프랑스에가 있던 근혜씨는 장례식 3일 전에 김포공항에 도착하였다. 박대통령은 직접 공항으로 마중 나가 딸을 태우고 들어오면서 차내에서 전후사정을 설명하였다.



청와대 본관 앞에서 발인제를 올리는데 박대통령은 앞에서 절하는 지만군의 상복에 실밥이 붙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손으로 감아 당겨 끊어주었다. 박대통령은 불규칙적인 것이나 비정상적인 것은 그대로 넘기지 못하는 분이었다.



박대통령은 청와대 정문의 옆문을 부여잡고 운구 행렬이 경복궁을 돌 때까지 지켜보았다. 그 유명한 장면을 김성진 청와대 대변인이 직접 카메라에 담았었다. 신직수 정보부장이 박대통령을 모시고 본관으로 올라왔다. 대통령은 손수건을 꺼내 코를 팽 푸는데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박대통령은 텔레비젼을 통해서 장례식을 지켜보았다.



이튿날 박대통령은 아침에 집무실로 츨근하자마자 인터폰으로 나와 함께 육여사를 모셨던 제2비서실 직원들을 불렀다. 대통령은『내자가 저렇게 되었으니 얼마나 비통하겠는가. 2부속실 직원들을 제일 먼저 부른 이유는…』하고 지시를 내렸다.



『내자가 하던 일 중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내가 하겠으니 항목을 정리해 올려라』



나는 그날 육여사가 하던 일-나환자촌 지원, 양지회 운영, 민원처리등의 항목을 표로 만들었다. 비고란에는 「이것은 각하가 맡으심이 좋겠음」 「이것은 근혜양이 하는 게 좋겠다」는 식으로 의견을 붙였다. 거의가 박대통령이 직접 맡아 하는 것으로 돼 있었다.



박대통령은 리스트에다가 매 항목마다 「동의함」이라는 의견을 적어 내려 보냈다.

육여사의 서거 이후 박대통령의 집무방식은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다. 다만 2층 내실로의 퇴근이 좀 빨라졌던 것으로 기억한다. 박대통령은 자신이 퇴근하지 않으면 청와대 직원들이 퇴근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일단 2층으로 물러갔다가 밤중에 다시 집무실로 내려와 일을 보는 수가 많았다.



육여사에게 온 편지



육영수여사는 대통령 부인으로서 자신이 해야 할 역할에 대해서 분명한 개념정리가 돼 있는 분이었다. 그것은 대통령에게 「밝은 귀」가 돼 드려야겠다는 생각과 국민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 않아야겠다는 다짐인 것 같았다. 호사스럽게 생활하는 모습을 보여 가난한 이들의 마음을 괴롭힌다든지 권력을 즐기는 행세를 하여 원망을 사서는 안 된다는 조심성 때문에 늘 긴장된 생활의 연속이었다. 나는 육여사를 수행하면서 한번도 그분이 차속에서나 행사장에서 의자에 등을 기대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오만하게 보이지 않을까 신경을 썼던 것이었다.



육여사는 자신이 찾아다니면서 사람들을 만났다. 청와대로 들어오는 진정서나 호소문 등 민원의 해결창구 역할을 하기도 했다. 육여사는 민원의 해결도 아주 조심스럽게 했다. 직접 공무원들에게 전화를 걸어 부탁이나 지시를 하지 않고 대통령을 통해서 했다.



『과잉충성 그만 해요』



그해 8월15일 기념식 직전에 박경호실장은 부하들에게 『해외동포들도 많이 오니까 친절하게 경호에 임하라. 될 수 있는 대로 반노출로 활동하라』고 당부했다. 지만군 피서소동으로 직위해제 되었다가 살아난 경호관도 그날 국립극장의 경호를 맡았다. 문세광은 바로 그 정문을 통과했던 것이다. 문이 국립극장에 들어 올 수 있었던 것이 그 경호관 때문만은 아니었지만 만약 그가 직위해제된 상태로 그날 근무를 안했더라면 어떻게 됐었을까 하는 상상을 나는 가끔 해본다.



어느 날 경복궁에서 육여사가 명예회장으로 있는 양지회 주최로 경로잔치가 열렸다. 경호실에서 연락이 오기를 「각하 집무실에 노래소리가 들리니 노래를 삼가달라」는 것이었다. 육여사는 이를 묵살해버렸다. 행사를 마치고 청와대 본관으로 육여사가 돌아오니 경호과장이 마중나와 인사를 했다. 육여사가 『거기서 지시했어요?』라고 했다. 경호과장이 어물어물하고 있으니까 육여사는『그렇게 과잉충성하지 말아요. 집무실에서 들리긴 뭐가 들려요?』라고 쏘아붙이는 것이었다.



장관들도 모른 대통령 생일



박대통령은 여름 휴가를 진해에서 보냈다. 진해 앞바다에는 저도라는 섬이 있었다. 대통령은 낮에는 이 저도에 가서 쉬다가 진해로 돌아오곤 하였다. 그런 이동 중에 해군의 엄호가 따르는 등 여러 사람들이 수고하는 것을 본 박대통령은 1972년 여름에 박종규실장에게 지시를 내렸다.



저도에 있는 일제시대의 목조건물을 수리해서 잘 수 있도록 해놓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1973년 여름 박대통령은 고속도로를 따라 진해에 도착하였다. 나도 수행하였다. 박대통령은 지방에 갈 때는 지만군을 옆에 앉히고 지나치는 마을에 대해서 자랑스럽게 설명하곤 했다. 저 마을의 소득원은 무엇이고, 이 터널의 길이는 몇 미터라는 식으로 손바닥 들여다 보듯 환하게 짚어주곤 하였다.



그날 진해에 밤에 도착한 박대통령일행은 밤늦게 저도에 상륙하였다. 거기에는 목조건물은 없어지고 새 돌집이 한 채 서 있었다. 일반주택만한 2층건물이었다. 호화주택으로 분류할 정도는 아니었다. 박대통령은 새집을 한 바퀴 둘러보더니 『실장을 불러』라고 했다.

박종규 경호실장이 나타나자 벼락치듯 꾸중을 했다.



『집수리하라고 했지 누가 새로 지으라고 했어? 너는 뭘 시키면 꼭 이렇게 하더라. 짐 내리지마! 도로 나가자』



김정렴 비서실장이 나서서 만류했다.

『오늘밤은 주무시고 가시지요. 진해 공관은 준비가 돼 있지 않습니다』

박대통령이 하룻밤을 머무는 사이에 측근들은 구수회의를 가졌다. 이 집을 지은 현대건설의 정주영 회장은 저도에 미리 와 대기하고 있었다. 측근에서는 박대통령이 가장 좋아하는 정회장이 직접 나서면 대통령이 화를 풀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다음날 아침에 측근에서 대통령에게 『정주영 회장이 와 계십니다』고 보고했고, 박대통령은 정회장을 올라오라고 했다. 정회장은 『각하, 제가 새로 짓도록 했습니다. 각하께서 쓰시는데 저의 사재인들 아깝겠습니까. 돈이 많이 들지도 않았습니다』고 해명을 해 대통령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 그후 알려진 바로는 현대건설에서 실비 변상을 받았다고 했다.



박대통령은 경제성장의 수단으로 재벌의 필요성을 인정했지만 가진 자들의 호화판 생활이나 재벌의 횡포에 대해서는 체질적인 거부감을 갖고 있었다. 공화당 중진의 김모 의원은 신축한 자택에 박대통령을 모셨다가 혼이 난 경우였다. 김의원은 『사실은 저의 형님이 도와주어 지은 것입니다』고 변명했다. 박대통령은 『그 형님은 차관받아 집만 지었나?』고 쏘아주더란 것이다.



변기물통에 벽돌 한 장



청와대에서 박대통령이 실천한 근검절약은 너무 심할 정도였다. 여름에 냉방기를 켜지 못하게 하고는 당신은 집무실 문을 열어놓고 선풍기와 부채로써 더위를 견디었다. 겨울에도 난방기 트는 데 인색하여 직원들은 속옷을 두껍게 입고 더운물이나 커피를 자주 마시면서 한기와 싸워야 했다. 박대통령은 집무실 화장실 변기속에 벽돌 한 장을 넣어 두게 했다. 그만큼 물을 절약하기 위해서였다.



10․26사건 뒤 청와대를 정리하던 직원들이 박대통령의 침실의 변기 물통에서도 벽돌을 발견하고는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침실이면 다른 사람이 들어갈 리가 없는 곳이고 그런 절약을 억지로 할 필요도 없을 터인데 빅대통령은 절약을 쇼로서가 아니라 자신에게 정직한 방법으로 했던 것이다.

박대통령은 전력을 아낀다고 집무실에서 책상 위 전등만 켜 놓고 일을 보았다. 어둑어둑한 저녁 때 누가 들어서면 사람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고 『누구야?』라고 기웃거리기도 했다.



박대통령은 입던 양복과 신던 구두를 그리고 넥타이 따위를 측근에게 나눠주기도 했다. 내가 박대통령으로부터 받은 양복을 약간 고쳐 입고 출근했더니 그렇게 흐뭇해할 수가 없었다. 육여사도 입던 한복을 줄여 근혜씨에게 넘겨주었다. 박대통령은 구두의 뒷창뿐만 아니라 앞창에도 고무판을 덧붙여 신었다.



박대통령은 사범학교 학생.교사.군인생활을 오래 했기 때문인지 정리․정돈의 습관이 체질화돼 있었다. 허리띠의 바클은 늘 중심에 와 있었고 허리띠의 여분이 길게 나오지 않도록 했다.

회의 때 박대통령이 앉은 탁자 위에는 메모지, 재떨이, 필기도구가 놓인다. 박대통령은 그것들을 직선으로 다시 맞춘다음에 두 손을 무릎위에 놓곤 하였다. 이것이 회의를 시작하라는 신호로 받아들여졌다.



박대통령은 가끔 지만군의 방을 불시점검하고는 『이게 뭐야? 정돈 좀 할 수 없나』고 꾸중을 내렸다. 어느날 박대통령은 육여사와 함께 식사를 하고 있다가 『임자, 그 방에 있는 책정리좀 하지?』라고 했더니 육여사가 『지금 바쁜데 그런 것은 천천히 하지요』라고 했다. 박대통령은 옆에 있던 나에게 『김군, 자네는 군대에서 내무사열도 안 배웠나?』라고 나무라는 것이었다.



식사가 끝나자 박대통령은 『나하고 가자』면서 일어서더니 부속실 전석영씨까지 데리고 창고로 갔다. 직접 문을 열더니 『이것 정리좀 해. 이래가지고 재고를 어떻게 파악하나』라고하면서 정리하는 방법을 일일이 지시했다.

대통령 집무실에는 책상 뒤에 문갑이 붙박이처럼 붙어 있었다. 박대통령은 메모용지, 가위, 자, 스카치 테이프 등 문구류를 직접 정리해 두고 꺼내 썼다.



나는 박대통령이 당황하거나 서둘고 허둥대는 것을 한번도 본 적이 없다. 박대통령은 늘 정리하고 계획하며 대비하는 사람이었다.

박영수 전 대통령 비서실장이 청와대 민정비서관으로 일할 때였다. 박대통령이 동남아 순방에 나서기 하루전인데 갑자기 박비서관을 부르더라는 것이다.



박대통령은 『내가 깜박 잊고 갈 뻔했다.』면서 민정반 활동비를 건네주더란 것이다. 『출국을 하루 앞둔 시기에 그렇게 사소한 데까지 신경을 쓰는 데 질려버렸다』고 나중에 회고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박대통령이 대용식량의 하나로서 밤나무 등 유실수 심기를 독려하고 있을 때였다. 박대통령은 청와대 뜰에 밤나무를 심도록 했다. 물과 비료를 어떻게 주라는 식으로 자세한 지침서를 써 총무비서실에 내려보냈다. 밤이 1년쯤 일찍 열리자 다섯 개의 밤알을 김현옥 내무장관에게 내려 보내면서 메로지에다가 그동안 가꾼 요령을 적어 보냈다. 김장관은 이 밤알을 알콜병에 넣어놓고 그 옆에 대통령의 메모를 표구해 걸어두고는 관계공무원들이 오면 베껴가라고 했다고 한다.



대담함과 세심함



언젠가 한번은 내가 퇴근을 하려는데 육여사께서 저녁먹고 영화보고 가라고 하셔서 가족들과 함께 저녁을 먹은 뒤 박대통령 내외분과 함께 영화를 보게 되었다. 나는 꽤 재미있는 영화려니 했는데 그날 상영된 영화는 문화영화 4편이 전부였다.「고구마 온상 재배법」「밤나무 재배법」 「독도를 지키는 경찰관」이었다.



더욱 놀란 것은 박대통령이 탁자위에 메모지를 놓고 영화 내용을 열심히 메모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공부를 하는 것이었다.

5.16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도 박대통령의 대담함과 세심함 때문이었다. 5.16거사에 참여한 이들로부터 들은 이야기인데, 박장군은 한강다리를 넘을 때 사격을 받아 해병대․공수단병력이 움직이지 못하는 위기를 맞았다. 측근에서 『일단 물러납시다』고 하니까 박소장은 『야, 우리가 모두 여기서 죽으면 될 것 아닌가』라고 말하더란 것이다.



KBS를 통해 5.16거사를 처음으로 알렸던 박종세아나운서는 그날 새벽 당직이었다고 한다. 총성을 듣고는 인민군이 쳐들어온 줄 알고 숨었다는 것이다. 문을 두드리면서 누군가가 『박종세씨 계십니까』라고 하기에 『북한 인민군은 아니구나』라는 안도가 생기더란다.



5.16주체 군인들에게 이끌려 아래층으로 내려갔더니 박정희 소장이 기다리고 있다가 『나, 박정희요』라면서 손을 내밀었다. 그 자리에서 박소장은 박아나운서에게 혁명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박세종씨는「혁명을 일으킨 이 긴박한 순간에 나한테는 그런 설명을 안해도 되는데…」하고 다소 의아하게 생각했었다고 한다. 박소장이 워낙 열의를 가지고 진지하게 혁명의 당위성을 설명하는 것을 듣고 있으니 『아, 이분이 적어도 혁명공약을 낭독할 사람은 그 뜻을 납득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구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고 한다.



박소장의 부하들은 군 방송요원으로 하여금 5.16거사 방송을 하도록 하자고 건의하기도 했으나 박소장은 『국민들의 귀에 익은 목소리를 통해 알려야지 믿을 것이다』면서 거절했다고 한다.

육여사 피격 현장, 5.16의 현장등에서 나타난 대담함 속의 세심함이야말로 박대통령의 진면목이었다.



핵심을 포착하는 능력



72년 가을 국립교향악단 정기 연주회에 박대통령께서 나가게 되어 있었다. 그것은 내가 육여사께 『대통령께서는 축구시합 구경만 가시고 예술활동에는 관심이 없으신 것 같다』는 음악인들의 불평을 전해 드렸더니 내린 결정이었다.



그러나 당일 연주회는 오케스트라 연주회가 아니라 국립합창단과 소년 합창단 등을 동원한 교성곡(交聲曲)이란 이름이 붙은 대합창제였다. 막이 오르자 음악연주 대신에 사회자가 대통령 업적을 칭송하는 시를 읊고 있었다. 청와대 정무비서실과 문공부 당국자들의 과잉충성이 발동한 것이다. 옆에서 보니 박대통령의 눈꼬리가 올라가면서 불쾌한 모습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관람을 마치고 청와대로 돌아온 박대통령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그런 연주회는 당장 그만 두라는 것이었다. 계획에 따르면 그 연주회는 지방순회까지 계획하고 있었다. 이렇게 해서 박대통령의 모처럼의 교향악단 참관은 그후로도 다시 이루어지지 못했다.



나는 박대통령의 지능지수가 특출 했는지 어떤지는 모르지만 그분의 놀라운 기억력과 판단력 및 통찰력은 천재성에서 나온 것이라기 보다는 늘 국정에 대하여 생각하고 고민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지식이 관심에 비례한다는 말 그대로이다.



박대통령에게 지만군이 이렇게 물은 적이 있었다.

『아버지, 저는 학교공부도 복잡해서 제대로 머리에 정리가 안 되는데 아버지는 그 복잡한 나라일을 어떻게 다 보십니까?』



『내 책상의 서랍들이 정치, 경제, 문화, 사회로 분류돼 있다고 하자. 나는 정치 서랍을 빼내어 일을 볼때는 거기에 정신을 집중하고 그것을 닫은 다음, 경제 서랍을 빼내 일을 볼 때는 정치는 싹 잊어버리고 경제에 온 정신을 쏟는다. 그런데 너는 정치, 경제, 문화, 사회의 서랍들을 한꺼번에 열어놓고 있으니 어느 하나도 제대로 공부하고 있지 못한 거야』 박대통령은 서랍을 빼고 닫는 식으로 자신의 감정을 깔끔하게 정리하는 분이었다. 아침에 어느 장관에게 화를 냈다가도 다음 면담자를 맞을 때는 언제 그랬던가 할 정도로 냉정하게 돼 있었다. 변화하는 그 순간순간의 상황에 진지할 수 있는 분이 박대통령이었다. 박대통령은 기억력이 비상했지만 쓸데없는 것은 아예 외우려 하지 않았다. 라디오 주파수를 몰라 라디오에다가 KBS, MBC란 표지를 붙여 놓았다. 사소한 것에는 무관심하고 중요한 것에는 신경을 쓸 줄 아는 분이었다. 그러니 중요한 가닥이나 흐름, 그리고 사물의 핵심을 결코 놓치지 않는 것이었다.



포항제철 확장공사 계획을 박대통령께 보고하게 된 외지 담당 비서관이 계획안과 포철의 현황을 완벽하게 파악하고 나서 공장사진과 브리핑차트를 들고 집무실에 들어가 열심히 설명을 했다. 설명을 다 듣고 난 박대통령이 공장 사진을 보면서 「이 공장 옆에 있던 배수로를 어떻게 처리했느냐」고 물었다. 모든 것을 암기했던 그 비서관이었지만 대통령이 관심있게 보아 온 배수로를 알 턱이 없었다.



조카 구속토록 지시



그러나 이렇던 박대통령도 육여사 서거 후에는 자세가 좀 이완되는 듯한 기미를 보이게 된다. 박대통령을 내면적으로 조용히, 그러나 강력하게 뒷받침하였던 육여사가 사라짐으로써 그의 정신세계가 허전해진데다가 국민들에 대한 생각도 변하였다.



『내가 혁명을 한 것은 목표가 있어서인데 그 목표를 달성할 때까지 국민들이 기다려 줄 수 없나…』하는 말을 가끔 하기도 하였다. 「국민들이 몰라준다」는 섭섭함과 「나도 나라를 위해 할 만큼 하지 않았는가」하는 자기만족과 자신감이 박대통령을 변화 시켜간 중요한 심리적 동기였다는 생각이 든다.



박대통령이 현충사를 자주 찾아가 충무공과 「역사의 대화」를 자주 가진것도 당대에 인정을 받지 못하고 핍박까지 받은 충무공에게 자신의 처지를 투영시켜 보려는 뜻이 아니었을까.

박근혜씨에 의하면 육여사의 서거이후 썰렁한 청와대 2층 내실에서 박대통령은 가끔 단소를 불었다. 텅빈 청와대를 울리는 애조띤 단소 소리는 듣기에 민망할 정도었다. 박대통령은 어느날 부속실 직원에게 『요사이 밤에 배가 고파. 내 방에 쿠키 좀 갖다 놓아』라고 했다.



바깥에서 보면 철권의 통치자였지만 밤에는 쓸쓸한 홀아비였던 것이 박대통령이었다. 「악처가 효자보다 낫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박대통령이 속현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 그분에게는 불행의 씨앗이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하기야 그분 성격에 재임중의 재혼은 불가능 했을 것이다.



근혜씨가 대외적 활동을 줄이고 박대통령을 집안에서 도와드리는 일에 더 시간을 냈었더라면 하는 아쉬움도 남는다. 박대통령은 근영씨와 둘이서만 저녁을 들게 되는 경우 근혜씨가 지방 행사를 끝내고 들어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식사를 함께 한 적도 많았다고 한다.



1973년 가을 어느날 지만군이 다니던 중앙고에서 하교하여 청와대로 돌아왔는데 얼굴이 퉁퉁 부어 있었다. 자초지종을 물었더니 상급생에게 얻어맞았다는 것이었다. 밴드부 연습실에 가서 연습이 끝나고 아무도 없을 때 북을 치다가 들켰던 것이다. 저녁무렵 육여사로부터 인터폰이 걸려 왔다.



『아까 지만이에게 왜 맞았느냐고 물었다면서요?』

『예』

『그런 건 왜 물어요. 모르면 어때? 내가 가슴이 얼마나 아픈데…』



학교에서는 뒤늦게 대통령 아들이 맞았다는 사실이 알려져 발칵 뒤집혔다. 때린 학생을 정학시킨다는 이야기가 들려와 육여사는 『제발 모른 척 해달라』고 부탁했었다.



근영씨가 서울음대 재학중일 때 친구들과 함께 강화도 전등사로 놀러가고 싶다고 해서 박대통령이 마이크로 버스를 내게 하여 같이 타고 일종의 관광안내원 노릇을 한 적이 있었다. 돌아와서 하는 말이, 『요즈음 아이들은 어째서 예절을 그렇게 모를까. 대통령이라고 부르기 어려우면 근영이 아버지 라고 할 수도 있을 텐데…고맙다는 인사도 없이 가버리니…』



육여사 차의 교통사고



1973년 봄 어느날 아침 육여사는 동아방송을 듣고 있었다. 육여사는 정부에 비판적인 방송을 주로 들었다. 뉴스시간에 「연희동에서 교통사고가 나 사람이 죽었는데 가해자가 권력층 인사라 경찰이 제대로 수사를 하지 못하고 있다」는 보도가 나갔다. 육여사가 나에게 진상을 알아보도록 지시했다. 내가 서대문 경찰서장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서장은 나의 신분을 못미더워하였다. 그래서 제2부속실에 놓인 시경3번 경비전화로 걸도록 했다. 걸려온 전화를 내가 받으니 서장이 실토를 했다. 가해자는 박대통령 누님의 아들이라는 것이었다.



아침식사시간 때 육여사가 대통령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박대통령은 대노하여 직접 서울시경국장을 불러 조카를 구속시키도록 지시했다.

스웨덴 왕실의사로 근무하던 한국인 의사가 있었는데 이분은 매년 비타민류 등 많은 의약품을 육여사에게 보내 가난한 이들에게 나눠주게 하였다. 1972년에 육여사는 많은 양의 약품을 경기도에 넘겨주었다. 그 며칠 뒤 신문에 「육여사가 보낸 비타민이 증발됐다」는 기사가 살렸다.



대통령지시로 내무부에서 진상조사를 해보니 경기도 지사 관사에 상당량이 전달되지 않고 보관되어 있었음이 밝혀져 내무부의 건의에 따라 그 지사가 면직되었다.



육여사는 이 문제를 두고 여러 차례 나를 꾸중했다. 내가 경기도에 의약품을 인계할 때 단단히 주의를 주었더라면, 또는 육여사의 친서라도 같이 보냈더라면 그런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면서 『능력있고 아까운 사람이 잘렸다』고 미안해하고 아쉬워하는 것이었다.

1973년 봄에 충청도에 사는 한 처녀가 육여사 앞으로 편지를 보냈다. 시골에 와서 고시공부하는 서울학생을 모든 것을 다 바쳐 사랑했는데 사법시험에 합격한 뒤에는 태도를 돌변하여 「위자료를 줄테니 관계를 청산하자」고 한다는 요지였다.



육여사는 이 편지를 박대통령에게 갖다주었다. 박대통령은 법무부장관에게 조사를 시켰는데 이 여자의 편지 내용대로였다. 박대통령은 「국민의 권리를 보호해 주어야 할 법관으로는 곤란하지 않겠는가」라는 의견을 제기하여 신직수 볍무장관에게 처리를 맡겼다. 그리하여 이 남자는 법관 임용이 되지 못하고 변호사로 개업하였다. 10.26사건 뒤 수십명의 변호사들이 김재규 변호를 자원했을 때 변호인단 명단에 그의 이름이 들어 있었다. 어떤 마음으로 변론을 자원했을까?



1974년 봄에 강원도 춘성군에서 양잠대회가 열렀다. 육여사가 여기에 참석하기 위해 승용차 편으로 가평군을 지나다가 갑자기 뛰어든 소녀를 그 차가 들이받았다. 육여사는 사색이 되었다. 뒤따라오던 정소영 농수산부장관 승용차에 다친 소녀를 태워 병원으로 보냈다.



육여사가 양잠대회에 참석하고 있는데 경찰로부터 「소녀가 죽지 않았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육여사는 화색이 도는 얼굴을 하고는 나에게 병원으로 가 보도록 지시했다. 나는 서울에 왔다가 박대통령 지시로 그날밤 다시 춘천으로 갔다. 춘천에 있는 병원에 갔더니 경기도 경찰국장이 나와서 『얼굴을 들 수가 없다. 사표를 내야겠다』고 울상을 짓고 있었다.



나는 『그게 무슨 말인가. 국장이 잘못한 게 뭐가 있나. 그것은 대통령의 뜻도 아니다』고 안심을 시켰다.

그 소녀는 진단 결과 골절도 내출혈도 없음이 판명되었다. 이 소식을 전하자 육여사는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었다.

『그 아이가 죽었더라면 평생 가책을 받으면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라고 고민했다는 것이었다.

육여사는 며칠 뒤 그 소녀를 청와대로 초청하여 위로하였다.



오기가 센 사람



1970년 가을인 것 같은데 박대통령은 2군 사령부 관할 지역을 시찰하기 위해 헬리콥터 편으로 날아가다가 헬기고장으로 논에 불시착하였다. 박대통령, 박종규실장, 경호원이 황급히 뛰어내리고 뒤따르던 경호헬기도 긴급 착륙하였다. 박대통령은 혼이 났을 터인데도 사고헬기 조종사에게 『수고했다』고 위로한 뒤 다른 헬기로 갈아타고 목적지까지 날아갔다.



박대통령의 성격상 또 한 가지 특성은 오기가 세다는 것이었다. 그 오기의 대상은 자신에게 도전하는 야당 지도자일 경우도 있었고, 김일성 일 수도 있었으며, 내정간섭을 하는 미국일 경우도 있었다. 또는 우리의 가난, 그리고 결혼에 반대했던 장인일수도 있었다.



이런 대상에 대하여 박대통령은 과감히 도전하거나 맞서고, 때로는 눌러버렸다. 그런 대상을 가만두고 보지 못하는 강한 자아의 소유자였다.

그런 오기에도 불구하고 박대통령은 부자나 빈자, 권력자나 약자를 인간차별하지 않고 동등하게 대하는 분이었다. 청와대 목수에게도 『수고 많습니다』고 존칭을 썼다. 박대통령의 예절바름은 그분이 유교적 양반 문화 속에서 태어나 사범학교 교육을 받으면서 자랐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박대통령은 한국의 안보를 이야기 할 때 「고슴도치 이론」을 가끔 들고 나왔다. 사자나 호랑이 같은 강대국 틈바구니에서 생존하려면 고슴도치처럼 단단하게 무장을 하여 힘세다고 함부로 건드릴 수 없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박대통령이 진해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는데 미국 국회의원 10여명이 서울에 도착, 대통령을 뵙자고 한다는 연락이 왔다. 박대통령은 그들을 진해로 불렀는데 이런 식으로 설명했다.

『당신네들은 데탕트라고 하여 코끼리 두 마리가 좋아져서 서로 몸을 비비고 있는 격인데, 그러는 사이에 잔디가 밟혀죽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한국이 바로 그런 잔디 신세가 되지 않으려면 달리 생각할 수밖에 없다』



1976년 8월18일에 일어난 판문점의 도끼만행 사건 직후인 8월20일 제3사관학교 졸업식에서 박대통령은 훈시를 하면서 「우리가 참는데는 한계가 있습니다. 미친 개에게는 몽둥이가 필요합니다」고 했는데 이대목은 연설원고에는 없었던 것으로서 박대통령이 직접 써 넣은 구절이었다.

1974년 6월 현대조선소에서 23만t짜리 유조선 아틀란틱 배런호의 진수식에 참석하기 위해 박대통령이 울산에 내려가 있을 때였다. 행사당일 아침 국방장관으로부터 현대조선소 영빈관에 있는 박대통령에게 긴급 보고가 들어왔다. 동해상에서 해군경비정이 북한 해군에 의하여 납치돼 북쪽으로 끌려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박대통령은 『뭐하는 거요? 강릉에 있는 전투기를 출격시켜 폭격한 뒤 우리배를 끌고 오시오』라고 소리쳤다. 전화기를 들고 있는 손이 분함을 못 참아 덜덜 떨리고 있었다고 한다.

박대통령은 전화를 끊고는 『이제는 전화받지마! 받으면 혼선이 생겨!』라고 했다. 우리전투기들이 출격하기는 했으나 짙은 안개 때문에 목표물을 찾지 못했다.



늘 김일성을 의식



박대통령은 늘 김일성을 의식하고 있었다. 「김일성의 북한보다는 우리가 잘 살아야지」하는 오기가 대통령의 언동에서 자주 비쳤다. 8․15사건 이후 박목월 시인이 박대통령과 담소하다가 김일성 이야기가 나왔다. 박대통령은 담배개비를 손가락으로 탁 튕겨서 식탁 밑에 떨어뜨리더라는 것이다. 박목월씨는 박대통령이 얼마나 분하면 저렇게 할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는 이야기를 나에게 한 적이있다.



국가지도자가 되어야 비로소 국가안보의 책임을 실감하게 된다. 박대통령은『둑 위에 선 사람이라야 한강물이 넘치는지 안 넘치는지 알 수 있다』는 말로써 그 책임의 중압감을 표현하였다. 일부 인사들은 박대통령이 김대중씨나 김종필씨를 자신의 경쟁상대로 의식했다고 말하고 있는데 내가 본 박대통령은 늘 김일성을 경쟁상대자로 의식하고 있는 것 같았다.



1968년 1.21 청와대습격사건에 대한 심야대책회의가 청와대에서 있었다. 이 회의를 주재한 박대통령은 관계장관들이 돌아가는 것을 본관현관 앞까지 나와 전송하였다. 그런 뒤 박대통령은 호주머니에 손을 넣고는 하늘을 보았다가 땅을 보았다가 하면서 그 추운 겨울밤을 한동안 서성거리면서 골똘한 생각에 잠기더라고 한다.



박대통령은 자신의 권위에 정면으로 도전하지 않는 한 과거의 정적들을 끝까지 돌봐주었다. 추석 등 명절이 되면 수첩을 꺼내놓고 선물이나 금일봉을 돌릴 대상자들을 직접 뽑았다. 지만군이 다닌 고교 교장에게까지 인사를 했는데 사적인 경우에는 대통령이란 직함을 안쓰고「박정희」란 이름만 썼다.



권력욕은 곧 일에 대한 욕심



박대통령이 권력욕으로 해서 3선개헌도 하고 10월 유신조치도 취했다고 하는데, 나는 이 「권력욕」을 깊게 분석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권력 그 자체나 축재를 위한 욕망은 아니었다. 권력을 장악한 바탕에서 국가건설을 하자는 것이 그 권력욕의 핵심이었다. 박대통령의 권력욕은 일을 위한 욕심이었다. 박대통령은 사후에 아무런 재산도 남기지 않았다.

박대통령은 윤보선씨와 대결했던 1963년 10월의 대통령선거를 회상하면서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그때 유세장마다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드는데 나는 즐겁지만은 않더군. 저많은 실업자들을 다 먹여 살려야 한다고 생각하니 당선된다 해도 골치가 아프겠다는 걱정이 앞서더라』 사실 그 당시 유세장에 모인 사람들의 대부분은 실업자들이었으며 그것은 박대통령의 마음을 우울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육여사는 박대통령이 군인이 되지 않았더라면 『소설을 썼을 것이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박대통령이 일기를 쓰고 시를 지은 것으로 봐 글쓰기를 좋아했던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박대통령은 언론인 최석 씨의 표현 그대로 혁명가였다. 최씨는 『혁명가를 정치가의 잣대로 재는 것은 무리다』라고 글을 썼던 것으로 기억한다. 박대통령의 일생은 확실히 혁명가의 일생이라고 할 수 있다.

김수환 추기경은 박대통령과 함께 진해까지 기차여행을 하면서 나눈 이야기를 어느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상기하면서 『그분으로부터 대단한 애국심을 느꼈다. 그러나 박대통령은 나무 하나 풀 한 포기도 직접 손을 대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고 했었다.



MBC의 「제2공화국」에서 박정희 장군역을 맡았던 탤런트 이진수씨가 월간조선과의 인터뷰에서 한 말을 기억한다. 택시를 타면 자신을 알아보고 택시비를 안 받는 운전사들이 더러 있었는데, 이것은 박대통령에 대한 민심의 일단을 엿보게 하는 게 아닐까라는 얘기였다.



박대통령은 『우리가 올림픽을 유치해야 조국 근대화를 달성할 수 있다』는 말을 자주 하더라고 최규하 전 대통령이 회상하는 것을 나는 들른 일이 있다. 88올림픽 유치의 구상은 박종규 당시 대한체육회장의 작품이고, 이 꿈을 받아들여 서울시로 하여금 유치선언을 하도록 한 것이 박대통령이었으며 10.26 뒤 잊혀진 올림픽의 꿈을 다시 살려낸 것은 전두환 대통령이었다.



원로들의 박대통령 평



나는 5공화국 시절에 원로들이 박대통령에 대해 평하는 이야기를 자주 들을 수 있었다.



유달영씨(전 서울농대 교수)는 1965년 제2한강교 준공식장에서 박대통령이 『앞으로 한강에 이런 다리를 열 개쯤 더 만들어야 되겠다』는 이야기를 했을 때 도저히 믿기지 않더라고 했다. 허정씨(전 내각수반)는 경주를 둘러보는 자리에서 『박정희씨가 선견지명이 있는 분이었다』고 했다.



『혁명한 사람이 어떻게 그런 안목이 있었는지 모르겠어. 도로, 항만, 도시계획을 해놓은 것을 보면 우리보다 나았어』

곽 상훈 전 국회의장과 박순천 전민주당 총재가 말년에 박정희대통령을 지지하는 쪽으로 태도를 바꾼데 대하여 오해도 있는 모양이지만 나름대로 소신있는 생활을 해 온 두 야당인이 사리사욕으로 그런 변신을 한 것으로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성격이 대쪽같아「한국의 간디」라는 별명까지 갖고 있었던 곽씨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내가 5.16때는 일본에 있었어. 그때 나는 민주당에 실망하고 있었는데 5.16이 나자 주변에서 말리는 것을 뿌리치고 귀국했어. 우석대학병원에 입원하고 있는데 박의장이 한번 뵙자 한다는 연락이 왔어. 그래서 만났는데 그분이 열의를 갖고 말하는 표정이 믿음직했지. 특히 그의 눈동자가 나를 사로잡았어. 무슨 일이든 해낼 수 있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강하게 받았지』



박순천씨는 육영수여사 추모사업회 이사장까지 맡아 일했는데 어느 날 박대통령과 이야기하다가 육여사에 대해서 언급하게 되었다. 박이사장이 육여사의 아름다운 자태와 긴 목에 관해 이야기하니까 박대통령은『그 학 같은 목이 1cm만 짧았더라도 안 죽었을 것입니다』고 하더란 것이다. 박이사장은 『대통령이 얼마나 아내를 생각했길래 그런 이야기가 나오겠는가』라고 했다. 이호 씨는 1973년 8월에 김대중씨가 중앙정보부 요원에 의하여 납치되었을 때 일본주재 대사였다. 그는 이 사건으로 얼마나 마음고생을 했던지 서울로 귀임했을 때 박대통령을 찾아가 『각하께서 어떻게 그런 짓을 했습니까』라고 다그치듯 말했다고 한다.



박대통령은 『이대사, 제가 정말 몰랐습니다. 모든 것을 걸고 이야기 합니다』고 하더란 것이다.

신현학 전 총리는『박대통령은 만날 때마다 커 보이는 인물』이란 표현을 했다. 어떤 국정문제에 대해서도 한 수 위에서 통찰하고 있다는 것을 실감하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신총리가 옳다고 건의한 것을 박대통령이 거부하면 『나보다 경륜과 정보가 나으신 분이니까 다른 배려가 있으시겠지』하는 생각에서 승복하게 되더라고 했다.



무서웠지만 무자비하지는 않았다



박대통령은 매서워 보였지만 근본은 마음이 약한 분이었다. 1971년 10월 어느 날 박대통령은 국방과학기술원 준공식에 참석하기 위해 신설동 부근을 지나다가 서울사범대학생들이 경찰을 상대로 투석하는 시위현장과 맞닥뜨렸다. 대통령 승용차에 돌이 떨어지기도 했다. 박대통령은 경호원들의 만류를 물리치고 차에서 내리더니 한참 걸어 사범대 사무실로 찾아갔다. 학생처장에게 『학생들 지도를 잘 하라』고 주의를 주고 경호원들에게는 『손에 흙 묻은 놈들은 모조리 붙들어라』고 했다.



1백여명의 학생들이 동대문서에 붙들려 와 있었다. 그러나 박대통령은 그날 안으로 모든 학생들을 훈방 시키도록 했다.

나는 박대통령이 반정부세력을 다루는 방식이 무자비하지만은 않았다고 생각한다. 교사가 회초리를 들고 엄포를 놓는 식이 아니었던가 한다.

박대통령은 매섭고 차가운 면이 있었지만 다른 나라의 독재자나 혁명가처럼 무자비하지는 않았다. 유교적인 양반문화가 몸에 밴 그분은 천성이 그럴 수 없는 이였다. 박대통령은 피를 흘리지 않은 혁명가로 기록될 것이다.



박대통령은 말년에 김형욱과 최덕신씨의 배신에 마음을 많이 상했던 것 같다. 김 형욱씨가 미 의회에서 반정부적인 증언을 하자 『개도 주인을 알아보는데』라면서 분해 하였고 최덕신씨가 친북한 인사로 돌변하자 『그 사람이 천도교 교령을 할 때는 안되는 일도 되게 하면서까지 봐 주었는데 아무래도 내가 인덕이 없는 모양이다』고 나에게 탄식조로 말했다.

1979년 어느날 밤 박대통령은 신직수 법률담당 특보, 유혁인 정치담당 비서관 등을 초대하여 1층 식당에서 식사와 술을 함께 했다. 박대통령은 술이 거나해지자 뒷문을 통해 정원으로 나갔다가 들어왔다. 그러더니 모비서관을 붙들고는 귓속말로 말하더란 것이다.



『저 뒤에 가보니 보초가 없어 풀밭에다 소변을 보고 왔는데 자네도 마려우면 지금 나갔다가 와』

지금도 당시의 그 비서관은 그날 밤의 박대통령의 소탈함과 인간적인 면을 잊지 못하고 있다.

새까만 부하인 나에게 막걸리를 권하면서 젓가락으로 휘휘저어주던 때의 박대통령은, 절대권력이 바꿔놓지 못한 소박한 한 인간의 모습 그대로였다. 우리 민족사에 지울 수 없는 족적을 남긴 박정희대통령. 그 분이 비명에 가신 지 어언 10여년의 세월이 흘렀다. 일세를 주도해 온 한 정치지도자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때가 되면 사가들의 춘추필법에 의해 이루어질 것이다. 다만 박대통령과 함께 한 시대를 살아온 이 나라의 국민들은 애증의 갈림길에서 각자의 인식과 사정에 따라 평가를 달리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기에 11년의 세월이 흐른 오늘에도 그분의 묘소에 추모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가 하면 그에 못지 않게 비난의 소리도 들려오는 것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