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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이 희망

국민이 희망이다. : 탄핵사태를 보며 (기자 칼럼에서)

2004-03-19



국회의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안 가결 이후 민심이 요동치고 있다.

서울 광화문 네거리에서는 매일 저녁 '탄핵 반대'의 촛불이 물결을 이루고 있다.



탄핵안을 몸으로 막았던 열린우리당의 인기는 급상승했다.

반대로 대통령 탄핵안 가결을 주도한 한나라당과 민주당의 지지율은 곤두박질치고 있다.



대통령 탄핵소추안 표결에 절차상의 흠결이 몇 가지 지적되고 있다.

흠결은 흠결대로 법적으로 따져볼 일이지만 내용상으로 국회의 탄핵안은 통과된 것이다.

적어도 당시 국회의원 193명이 대통령 탄핵의사를 갖고 있었다는 것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국회의원들의 뜻이 그들이 대표해야할 국민의 뜻과 전혀 딴판이라는 데 있다.

여론조사를 보면 국민의 3분의2가 국회의 대통령 탄핵소추안 가결에 반대하고 있다.

아니 단지 반대의 뜻을 넘어서 분노가 느껴진다.

단 며칠새 이뤄진 엄청난 민심의 역전은 우리 정치사에서 예를 찾기 힘들다.



그것은 국회의원들이 과연 대통령을 탄핵할 자격이 있느냐는 항의의 표현이다.

민생을 뒷전으로 미루고 정쟁만 일삼은 16대 국회의 '자격상실'을 외치는 함성이다.

겉으로는 선량인 척 하면서 뒤로는 돈을 챙기다 구치소로 간 국회의원들이 어디 한둘인가?

이제 민심은 4년전 그들이 선출한 대표들을 스스로 버리고 있다.



이런 썩은 정치에 대한 국민적 지탄의 뒷면에 새 정치에 대한 강한 열망이 있다.

'정치를 바꿔야 한다'는 국민적 요구는 하나의 '시대적 흐름'을 형성하고 있다.

그것은 '이대로는 안된다'는 변화에 대한 강력한 지지다.

유권자들은 이제 '정치인들이야 원래 다 그렇지'하는 식으로 적당히 넘어가지 않는다.



이런 기류가 어느 날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니다.

그 출발이 언제인가를 찾는 일에는 논란이 있을 것이다.

다만 확실한 것은 지난 2002년에 우리 사회에 이런 새로운 움직임이 표면화됐다는 것이다.

아니 폭발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해 우리 나라에 헌정 사상 처음으로 대통령 후보를 뽑는 예비선거가 열렸다.

3월9일에 시작된 민주당의 당내 경선은 일 주일만에 이른바 '노풍'이라는 현상을 몰고왔다.

그리고 이회창-이인제의 양자대결로 굳어졌나 싶었던 대선구도에 파란을 불러일으켰다.

'노풍'은 이른바 '대세론'을 믿고 여유를 부리던 이인제 후보를 단숨에 침몰시켰다.

조용한 줄 알았던 민심이 성난 파도처럼 일어선 것이다.



'노란 티셔츠'로 상징되던 '노풍'은 민주당의 일로만 끝나지 않았다.

한나라당도 민주당처럼 대선 후보 전국 순회 경선이라는 절차를 만들었다.

이렇게 해서 대한민국 정치사에 큰 전기가 마련된 것이다.



이제 국민은 대통령 뿐 아니라 대통령 '후보'들부터 스스로의 손으로 뽑을 수 있게 됐다.

과거처럼 독재자에 의해 지명된 '후계자'에 대해 찬반의사만을 표시하던 시대는 끝났다.

제왕적 총재나 폐쇄적 엘리트들이 골라준 차기주자 가운데 1명을 선택하던 시대도 갔다.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민주주의의 원리에 한 발짝 더 다가선 것이다.



그리고 그해 여름에 우리 국민은 월드컵대회를 경험했다.

한국에 있어 2002년 월드컵 대회는 단순한 축구경기의 차원을 넘어서는 것이다.

월드컵대회 하면 히딩크가 생각나고 거리응원의 열기가 떠오를 것이다.

이 과정에서 우리 국민은 우리를 되돌아 볼수 있었고 많은 교훈을 얻었다.



그중 하나가 지도자의 '합리적 리더십'이 조직의 성패를 좌우한다는 점일 것이다.

여기다 한국인의 역동성이 합쳐지면 우리도 세계일류가 될 수 있다는 자신감도 얻게됐다.

대한민국의 잠재력에 대한 발견은 '축구실력 세계 4강'이라는 신화보다 더 소중하다.



월드컵 대회는 또 '무엇이 한국사회의 발목을 잡아왔는 지'를 일깨워주는 계기가 됐다.

그것은 동시에 우리사회를 지배해온 '구악적 문화'에 대한 깊은 후회와 반성을 불러왔다.



그렇다면 '구악적 문화'는 무엇인가?

우리 국민의 역동성을 칭칭 옭아매온 '魔의 사슬'은 무엇인가?

바로 이성을 마비시키는 지역주의와 패거리 문화 같은 것이다.



그것은 다른 가치에 앞서 출신지역과 학교 그리고 서열을 우선 따지는 인습이다.

이런 문화적 풍토에서는 무엇이 옳고 그른 지를 가려내는 일은 덜 중요하다.

'정의와 부정'의 개념보다는 '영남과 호남', 형님과 동생'의 가치관이 판을 친다.



히딩크 감독은 후배 선수들에게 선배를 '형'이라고 호칭하지 말라고 했다고 한다.

실력보다 선후배가 우선시되는 문화가 당시 우리 대표팀을 좀먹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 사회를 병들게 하는 구악 문화는 모든 부패의 온상이 되기도 했다.

그것은 천문학적인 검은 돈을 죄의식 없이 주고받는 지도층의 부패로 이어졌다.

그래서 평범한 서민들은 번번이 좌절감을 맛봐야만 했다.



국민은 이런 구악문화를 청산하지 않고 대한민국에 '희망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리고 국민이 일어서면 개혁의 '꿈이 이루어 진다'는 확신도 갖게 됐다.



그해 연말 유권자들은 노무현 대통령을 당선시켰다.

노무현 후보의 약속은 지역주의의 타파와 부패정치의 척결이었다.

노무현 대통령의 당선은 과거정치 청산과 구악문화 일소에 대한 국민적 지지의 결과다.

이 과정에서 '옳은 소리 하는 사람은 성공할 수 없다'는 이른바 '必敗의 신화'도 깨졌다.



지금 우리 사회에는 새로운 기류가 물결치고 있다.

이것을 단지 '진보세력의 득세'로 본다면 색깔론적인 시각이다.

보수와 진보를 구획하려는 경향은 냉전문화에 젖은 사람들의 조건반사적인 대응양식이다.



새로운 흐름은 보수와 진보라는 분열적인 낡은 틀의 바깥에 존재한다.

그것은 우리 사회가 '후진적 문화'에서 벗어나 '근대의 문화'로 나아가려는 단순한 운동이다.

어떻게 보면 '정상적이고 합리적인 생활의 조건'을 요구하는 기본적인 바람인 것이다.



이것을 젊은 사람들의 집단적 격정으로 치부하는 분석은 더더구나 현실을 모르는 소리다.

이른바 '노사모'의 반란으로 보는 태도도 협애한 해석이다.



그것은 최근 수년 혹은 수십년에 걸쳐 형성된 시대적 요구이자 민심의 흐름이다.

바로 '이제 우리는 변해야 한다'는 국민의 명령이다.

그리고 변화의 파도는 점점 이제 우리사회의 중심으로 밀려들고 있다.

굳이 따진다면, 노무현 대통령이나 '노사모'도 그런 거대한 민심의 물결의 일부다.



정치인들은 이런 민초들의 여망을 호도하지 말기 바란다.

어떤 당에서는 '탄핵사태'에 대한 국민 여론조사가 조작됐다고 하는 주장까지 나왔다고 한다.

그런 망언은 단지 여론조사 기관뿐만 아니라 국민을 욕되게 하는 발언이다.

동시에 그들의 인식이 얼마나 한심한 지를 보여주는 증좌다.

국민의 뜻을 호도하면 더 거센 민심의 회오리를 부른다는 것이 역사의 가르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