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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본질원리를 알자

대원칙은 인간본질 즉 인간원리에서 도출되므로 인간본질을 분명히 알 필요가 있다.



본질이라는 말은 우리가 흔히 듣고 하는 말이지만 여기서 쓰는 인간본질은 삼라만상이 생명을 얻고 모든 가치가 창조되는 실체 즉 존재 세계의 근본이 되는 말하고 생각하는 인간이 어떻게 존재하는가를 아는 것이다.



데카르트의 인식론을 비롯해 유아론이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는 생각하는 근거가 되는 [나]를 모른다는 것이다. 생각하고 존재하는 근거가 되는 [나]를 신의 창조에 돌린다고 하더라도 실재를 알 수 없는 신 또한 [나]의 생각이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나를 육이라고 해도 의식이 없으면 알 수 없고 의식이라고 해도 육이 없으면 의식이 깃들 구석이 없다. 알 수 없는 나를 끝없이 의심해 가면 마침내 [나]는 [나]라는 소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에 이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나]라는 소리이든 생각이든 혼자 아는 것이라면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나]라는 소리와 생각은 어디서 나온 것이며 어떻게 의미가 생성되는 것일까.



소리가 사람 사이에 나온다고 하면 사람은 어떻게 존재하는가 라고 반문할 수 있다. 사람을 지각 감각 활동을 하는 흙덩이라고 한다면 지각 감각은 어떻게 생기는 것일까. 나의 생각이 부모에 의해 생겼다고 한다면 부모는 어떻게 생각했고 그의 부모는 또 어떻게 생각할 수 있었겠는가. 이렇게 소급해 가면 인류 조상이 어떻게 생각할 수 있었는가 하는데 까지 이른다.



지각하는 인간이 없는 존재 이전 즉 우주나 지구라는 것도 없을 무극의 경지에 흙덩이 또는 뭇 실체가 대상에 끌려 만나며 같은 소리를 내고, 같은 소리를 분별하고 공유하는 상황을 유추해 볼 수 있다.



혼자만의 생각은 의미가 없을 뿐만 아니라 원초의 혼자인 경지에서는 생각 자체도 생기지 않는다고 할 때 인간의 생각은 같이 내는 소리의 공유인 것이다.



흙덩이 사이에 소리가 나오고 그 소리를 분별하고 공유하는 작용이 다름 아닌 지각 감각으로서 생명의 흙이라 할 수 있다. 즉 대상과 나 사이에 말이 나오고 말을 하면서 지각 감각이 생긴 인간이며 동시에 삼라만상이 생명을 얻는 존재의 본질인 것이다.



우리는 어린 자녀가 의식이 있어 말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부모와 호흡을 같이 하는 가운데 철이 들고 의식이 형성되는 사실을 알고 있다. 사람과 호흡을 같이 하며 소리를 내고 분별하며 뇌가 형성되고 인간이 된다는 사실은 늑대 소녀(인도 정글에서 발견된 늑대 젖을 먹고 자랐다는 두 소녀) 개 소년(칠레 항구도시에서 발견되었다는 소년)의 실례가 반증해 준다.



같은 소리를 내고 분별하며 지각 감각이 생긴 너와 나 사이가 인간이므로 개체는 스스로 인간이 될 수 없는 것이다. 같이 아는 기준이 없으면 안다고 할 수 없고 같이 느끼는 실체가 없으면 실재한다고 할 수 없다. 수천 년 아니 수억 년이 지나도 말이 생길 수 없고 지각 감각이 생길 수 없는 개체는 인간이 될 수 없으며 인간 사이에 존재하고서도 개체는 한없이 부족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말을 하며 생명의 흙이 되고 공간에 생명을 부여하며 말과 흙의 가치를 창조 변화시켜 가는 너와 나 사이는 창조의 본체로서 우주 안에 이보다 더 위대한 존재는 없다. 말하면서 지각하는 대상과 나 사이는 상호 원인으로 존재하는 인간인 동시에 실체를 실감하는 존재의 시점으로서 시간 공간의 실체인 것이다.



시간은 공감의 변화 또는 대상에 대한 느낌의 변화라 할 수 있고, 공간은 느낌이 닿는 대상 또는 실감하는 거리이다. 따라서 모든 물질은 사람 사이에 나온 말과 동시에 생명을 얻는 시간 공간성인 것이다. 말하면서 생명의 흙이 되고 흙덩이 사이에 말이 나오는 대상과 나 사이는 상호 원인으로 동시에 존재하는 인간이며 [말과 흙은 동시존재] 라 요약할 수 있고 존재의 본질 또는 인간 원리인 것이다.



말을 하며 인간이 되는 대상과 나 사이는 상호원인이므로 무한히 좋은 모습이 본연이며 정상이라 할 수 있다. 같이 좋은 모습이 인간 본연이라는 것은 한없이 좋아하는 부부나 부모 자식사이에서 알 수 있고, 본연을 잃을 때 살아도 산다고 할 수 없는 고통이 불가피하다는 점에서 본연이 절대가치임도 알 수 있다. 같이 좋은 가정이 본연이듯 가정이 확대된 사회 또한 같이 잘 사는 모습이 본연임은 두말 할 필요가 없다. 같이 좋은 사회가 절대가치라면 그것은 당연히 정의 또는 대원칙으로서 사회의 절대기준이 되는 것이다.



같이 잘 사는 사회는 기약 없는 미래의 꿈이 아니라 주권이 미치는 영토에 사는 국민이 오늘의 시점에 같이 잘 사는 것이다. 국민이 같이 잘 사는 삶을 능가하는 가치는 그 사회 안에 없으며 이것이 기준이 될 때 변화는 아무리 빨리 해도 과속이 없으며 아무리 많이 해도 부족하다고 할 수 있다.



국가에서 권력이나 가정에서 가장의 절대적인 권위도 점점 사라지고 남녀나 노소가 대등한 관계로 급속히 변화하고 있는 것은 본질대로 사는 인간시대를 지향하는 인간화의 절대적인 방향임을 알 수 있다.



다만 공감하고 같이 잘 살지 않으면 안 되는 사회의 절대기준이 확립될 때 불륜과 폐륜이 자행되고 있는 가정 문제와 갈등과 대립으로 극심한 혼란을 겪고 있는 사회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헝덕 손복영 지음 "인간본질의 소리" 참조)



*** [대원칙의 리더십] 세번째 글입니다. 저희 홈으로 많은 의견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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