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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6 나이트라인 논평에 대해 SBS는 해명해야.

그날 저녁 SBS 나이트라인의 논평을 들었는데 상당히 문제가 심각했다. 전체적으로 모두 문제가 있긴 하지만, 그 중 진짜 어불성설인 것만 몇가지 집어서 말하고자 한다.



먼저 이번 총선을 `친노대반노`의 싸움으로 규정했다. 언론기관이 이런 검정되지 않은 말을 해서는 안된다. 이런 규정은 한나라당 최병렬 대표의 선거전략에서 나오는 말을 그대로 옮긴 것 밖에 되지 않는다. 이번 탄핵정국을 바라보는 수 많은 시각이 존재함을 SBS는 알길 바란다. 누구는 수구세력과 진보세력, 어떤 쪽에서는 기득권과 서민, 또 어떤 쪽에서는 지역세력과 통합세력, 민주세력과 반민주세력 등 여러 가지로 분분하게 회자되고 있다. 헌데 한 방송국의 공식적 논평에서 `친노대반노`라고 규정할 수 있는 것인가 말이다. 만약 논평에서 `친노대반노`로 변질될 위험이 있다고 이를 경계해야 함이 마땅하다 정도로 하면 수긍할 수 있다. 하지만 한나라당과 민주당이 규정한 대로 `친노대반노`로 SBS가 규정해서 논평하는 것은 야당의 선거전략을 거들어 줄 뿐 언론사의 논평에서는 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이와는 다르게 여당에서는 수구잔존세력대 개혁세력의 한판으로 보고 있다. 이와 같이 전혀 다르게 해석하고 있음에도 야당의 논리를 사실인양 논평하는 것은 심각한 문제이다.



둘째, SBS는 이 논평에서 국회의원들은 적법하게 처리했으니 문제가 없다고 수차례 강조했다. 그렇게 볼 수 있다. 하지만 처리과정이 적법이라고는 하나 본질적인 사안인 탄핵사유에 대한 적법성은 많은 논란을 불러오고 있는 실정이다. 그래서 많은 국민들이 애초부터 반대해 왔고, 지금도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것 아닌가. SBS는 이 논평에서 탄핵반대 집회자들을 향해 아무리 뜻이 좋더라도 처리과정이 좋지 않다면 해서는 안된다는 식으로 논리를 폈다. 다분히 본질을 희석시키면서, 있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현재의 야당의 논리와 흡사하다. SBS는 대다수 국민의 논리보다는 야당의 논리를 그대로 인용하고 있는 것이다.



세째, SBS는 이 논평에서 이번 총선에서는 이당 저당 가릴 것 없이 국회의원의 자질만 보고 투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진짜 맞는 말이다. 이는 말하지 않아도 당연히 원칙적으로 지켜져야 하는 것이다. 근데 그 결과 16대 국회가 어땠는지를 국민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참신하고 의식있는 국회의원들도 당론이 정해지면, 출당 혹은 공천권 탈락이 두려워 자신의 의지를 굽혀버리는 일을 식은 죽 먹듯 해다. SBS의 논평이 틀린 말이 없는 것 같으나, 이번 총선은 그 소속 정당이 가장 큰 변수가 되어 있다. SBS는 굳이 현재 국민들이 소속당을 중요시하고 전략적으로 투표하는 행태를 욕할 필요는 없다. 그러한 염려는 SBS의 적정일 뿐이고, 국민들의 다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며 좀더 전략적으로 생각한다. 현재 여론조사의 지표가 정확히 그것을 반영하고 있다.



네째, SBS는 시청자들에게 노사모의 불법시위에 현혹되지 말라는 식의 당부 비슷한 말을 남겼다. 지금 현재 집회가 노사모만 하는 것이 아니다. 거의 모든 시민단체가 뭉쳐서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어느 국가기관에서도 불법시위라고 판결된 바도 없다. 우려를 표명할 순 있으나 단정은 금물이다. 특히 공중파의 뉴스, 그중에서도 논평에서라면 더더욱 그러면 안된다. 이는 시청자에게 우려를 넘어 사실로 인지시키는 나쁜 해설이다. 이는 민주당이 대통령이 미래가치가 없으니 바꾸자는 논리나 똑같은 것이다. 어떤 주장에 대한 대한 평가는 그 사건의 사실에 대한 평가가 앞서야 한다. 그리고 나서 주장을 전달해야 맞는 것이다. 그런면에서 SBS는 현재 탄핵반대 집회에 대한 성격규정을 다시 할 필요가 있다. 단순히 노사모만의 집회인지, 그리고 그 집회가 어떤 성격으로 어떠한 과정으로 진행되고 있는 지를 정확하게 분석하고 보도하기 바란다.



SBS의 이궁 논평을 들으며 야당의 대변인의 말과 무엇이 다른지 찾아보았지만 차이점을 발견하기 힘들었다. 단지 차이점이라면 SBS가 좀더 세련되게 말을 한다는 것 뿐 아무차이도 없었다.



SBS는 시청자를 자사의 시각으로 계도하기 보다는, 시청자의 눈으로 세상을 볼 수 있는 시각부터 길러야 마땅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