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늘 그 안에서 눈을 뜨고
늘 그 안에서 숨을 쉬고
늘 그 안에서 생을 누리고
늘 그 안에서 고락을 하는데도
우린 그 것의 실체를 모르는 모양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왜, 손짓하는 그가 있겠는가?
성서의 곳곳에서 지금도 지명과 명칭을 현재의 이름으로 바꾸면
모두가 지금의 생생한 부르심과 나무람과 사랑스런 다독임이 있다.
우리가 아는 구시대를 모두 낡았다 여기고 퇴물처럼 여기지만
늘 처음부터 멸망과 새로운 창조를 거듭하며 이어져 온 인류의 살아있는 자에겐
늘 지금이 현실이고 지금이 늘 더 새로운 것만 같은 착각이 존재한다.
그러나 개인개인 죽어지고 태어나고를 반복하며 늘 새로운 인물로 채워지는 지구의 땅에는
늘 현재만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 현재는 바로 생생한 신의 현재이다.
그 신은 늘 정의롭고 늘 공평하고 늘 같은 사랑을 통해
인간이 엮어내는 인생안에서 알듯 모를듯 그의 존재를 부각시키지 않으면서
인간에게 좋은 것을 주기 위해 지금을 끝없이 살고 계시는 것이다.
어느날인가는 아마도 지구의 인간들 모두가 철이 들어
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행복을 완전하게 이루어 낼지도 모른다.
인간!
신의 안에서 늘 꿈꾸는 자로 남아 있고, 그 신의 안에 존재하면서도 늘 신을 동경하고 신의 축복을 고대하는 미련한 인간!
그 인간이 드디어 신의 마음에 완전하게 일치할 날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꿈꾸며 오늘을 살아가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처지에 있건 어떤 색다른 위치에서 색다른 문제에 접해 있건 지구촌의 인간은 모두 그 섭리를 벗어나지 못한다.
신이 주신 조건이란 틀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지구가 멸망을 하여도 지구가 온통 화합이란 사랑의 도가니에서 행복의 절정에 달아 올라도
우린 모두 신의 섭리 안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원하는 것은 멸망이 아니라 행복이다.
그 역시 우리는 공통의 목표를 가진 존재인 것이다.
이것이 옳다 저것이 옳다 하지만, 우린 그 역시 모두 우리의 한계를 나타낸 표현에 불과한 어리석음의 한 자락인 것을 알고 있다.
결국 우린 너의 행복을 함께 지켜주고 있는가? 아님, 이간질이라는 농락하는 자에게 우리의 마음을 빼앗기고 있는가의 실험대에 놓여 있는 선택하는 자일 뿐인 것이다.
순간 순간 우린 우리가 지향하는 공동 선과 개인의 행복을 모두 추구하는 목적지가 우리 앞에 놓여 있다.
늘 그 안에서 그를 느끼며 감사히 눈을 뜨고
늘 그 안에서 그를 느끼며 감사히 숨을 쉬고
늘 그 안에서 그를 느끼며 감사히 생을 누리고
늘 그 안에서 그를 느끼며 감사히 고락을 함께하고
우린 그 것의 실체를 느끼기에 늘 겸손되이 감사 생활을 행복하게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