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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反共防諜] 노무현 중국에서 실수하지 마라







A. 2003년 7월8일자 산케이신문(産經新聞) 사설





中韓 정상회담(頂上會談), 대화(對話)만으로 북한은 움직이지 않는다





한국의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이, 중국을 공식(公式) 방문해, 후진타오(胡錦濤) 국가주석(國家主席)과 회담했다. 5월의 미국, 6월의 일본에 이어 세 번째이다. 회담에서는, 북한의 핵문제(核問題)에 대해, 대화(對話)에 의한 평화해결(平和解決)과 중국의 건설적(建設的) 역할(役割)로 일치(一致)했다.





日·美·韓은 일련(一連)의 정상회담(頂上會談)에서, 북한에는 「대화」와 「압력(壓力)」으로 임한다는 것을 확인했다. 노 대통령은, 국내여론(國內與論)에도 밀리며, 「압력보다 대화를 중시(重視)한다」는 자세를 보였지만, 「압력」을 부정(否定)은 하지 않았다. 그것이 이번, 중국과의 정상회담에서는, 「압력노선(壓力路線)」을 후퇴(後退)시킨 인상(印象)이다.





원래, 중국과 한국의 북한 핵문제에 대한 공통점은, 양국이 함께 그 결과의 영향을 가장 심각(深刻)하게 받는 북한의 「체제붕괴(體制崩壞)」나 「폭발(暴發)」을 억지(抑止)하기 위해, 제재(制裁) 등의 강경수단(强硬手段)이 아니고, 대화에 의해 북한에게 핵(核)을 단념(斷念)하도록 설득(說得)하고 싶다고 하는 것에 있다. 그런데, 북한을 움직인 것은, 대화노선(對話路線)이 아니고,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압력노선인 것이, 지금 명백하게 되었다.





그런 만큼, 이번, 中韓이 압력노선을 후퇴시켰다고 하면, 국제사회(國際社會)는 中韓의 「대화·평화 연합(連合)」과 日美를 중심으로 하는 「압력·대화 연합」으로 분열(分裂)해, 북한에 대한 국제(國際) 포위망(包圍網)이 약해졌다는 잘못된 메시지(message)를 북한에게 보낼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북한은 다시 다국간(多國間) 협의(協議)를 거부(拒否)하고, 강경노선(强硬路線)을 강하게 할 가능성(可能性)도 있다.





북한 핵문제에서는, 북한의 우호국(友好國)인 중국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擔當)하고 있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북한의 식량·에너지를 떠받치고 있는 것은 지금 중국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이기 때문이다. 군사(軍事)의 미국과 함께, 북한의 운명(運命)을 좌우(左右)할 수 있는 존재이다.





노 대통령은, 그 중국에 「평화해결」에 대한 협력을 요구했을 것이지만, 中韓의 입장은 반드시 같지 않다. 중국은 본심(本心)으로는 한국의 대북(對北) 「햇볕정책」에 회의적(懷疑的)이며, 문제해결(問題解決)을 위해서는 북한에 사탕(candy)을 주는 것만으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최근에는 오히려, 북한 문제에서는 미국과 가까워지는 자세조차 보이고 있다.





이번, 中韓 정상회담의 분석(分析)은 신중(愼重)하게 실시하지 않으면 안 되지만, 적어도 이것이, 북한 핵개발(核開發) 저지(沮止)와 납치사건(拉致事件) 완전해결(完全解決)을 위한 국제 포위망을 약하게 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대화와 압력」 노선의 재확인(再確認)이 필요하다.





http://www.sankei.co.jp/news/030708/morning/editoria.htm














B. 2003년 7월8일자 요미우리신문(讀賣新聞) 사설





페리 150년, 성숙한 日美 관계의 교훈





「에도만(江戶灣)」의 입구(入口)인 우라가(浦賀) 앞바다에 페리(Matthew Perry) 제독(提督, Commodore)이 이끄는 미국의 거대한 흑선(黑船)이 모습을 나타낸 것은 1853년 7월8일, 150년 전 오늘의 일이다.





미국은, 증기선(蒸氣船)에 석탄보급(石炭補給)과 난파(難破)된 포경선(捕鯨船)의 승조원(乘組員) 보호 등을 요구하고 있었다. 「포함외교(砲艦外交)」로 일본을 개국(開國)시켰지만, 그 후에는 일본의 견미사절(遣美使節)을 열렬(熱烈)하게 환영하며, 일본으로부터 융화적(融和的) 태도를 희망했다.





수법(手法)은 거칠지만, 막역(莫逆)해지면 친절(親切)하고 개방적(開放的)...... 그 후의 대일(對日) 자세의 원형(原型)을 이미 간파(看破)할 수 있다.





유럽 중심의 국제정치(國際政治)의 변방(邊方)에 위치했던 양국의 운명적(運命的) 만남이었다. 오늘과 같이, 세계의 국내총생산(國內總生産, GDP, Gross Domestic Product)의 약 45%를 日美 양국이 차지하게 될 것이라고 누가 예상할 수 있었을 것인가.





오늘의 日美 동맹(同盟)은, 세계의 안정(安定)에 빠뜨릴 수 없는 초석(礎石)이다. 이라크 전쟁 후의 日美 정상회담(頂上會談)에서, 부시(George W. Bush) 대통령은 『日美 동맹은 지구규모(地球規模)의 것이다』라고 강조했다.





여기에 이르는 역사는 기복(起伏)으로 가득 찬 것이었다. 日美에 마찰(摩擦)이 생긴 것은 20세기(世紀) 초, 일본-러시아 전쟁 직후의 일이다.





19세기 말에 하와이(Hawaii)와 필리핀(Philippines)을 획득(獲得)한 미국은, 동(東)아시아의 권익(權益)에도 관심(關心)을 두고 있었다. 일본이 구만주(舊滿洲)를 거점(據點)으로 권익을 확대(擴大)한 것에 대해, 미국은 「문호개방(門戶開放)」을 내걸고 중국 진출을 꾀했다. 미국내에 일본 위협론(威脅論)이 대두(擡頭)해, 일본계(日本系) 이민배척(移民排斥) 운동도 격화(激化)되었다.





1920년대, 日美의 통상(通商)·금융(金融) 관계는 확대되었다. 하지만, 1930년대 이후, 만주사변(滿洲事變), 日中 전쟁, 일본-독일-이탈리아 동맹 등을 거치면서, 日美 관계는 파국(破局)을 맞이했다.





전후(戰後), 점령군(占領軍)으로서 일본에 상륙(上陸)한 미국은, 헌법개정(憲法改正)을 시작으로 농지개혁(農地改革)과 재벌해체(財閥解體) 등 일련(一連)의 체제변혁(體制變革)을 강제(强制)했다. 한편, 동서냉전(東西冷戰)의 도래(到來)와 함께, 서쪽 진영(陣營)의 거점으로서 부흥원조(復興援助)를 적극적(積極的)으로 진행했다.





1952년에 샌프란시스코(San Francisco) 강화조약(講和條約)이 발효(發效)되어, 일본이 주권(主權)을 회복(回復)한 후에도, 日美 안보체제(安保體制) 아래에서 日美의 긴밀한 관계가 계속되었다.





일본이 급속(急速)한 경제성장(經濟成長)을 이룬 결과로, 양국간의 경제마찰(經濟摩擦)이 큰 현안(懸案)이 되었다. 1980년대 이후, 강하게 시장개방(市場開放)을 요구하는 미국과 일본의 대립(對立)이 격화되어, 미국에서는 일본 이질론(異質論), 일본에서는 혐미론(嫌美論)이 일부에서 나온 적도 있었다.





그런데도, 큰 균열(龜裂)이 생기지 않았던 것은, 양국이 민주주의(民主主義)와 자유경제(自由經濟) 라고 하는 기본적(基本的) 가치(價値)를 공유(共有)해, 신뢰관계(信賴關係)를 양성(養成)해 왔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역사의 교훈(敎訓)을 근거(根據)로 해, 한층 더 성숙(成熟)한 日美 관계를 구축(構築)해 나가는 것이, 양국의 이익과 세계의 평화와 안정으로 연결될 것이다.





http://www.yomiuri.co.jp/editorial/news/20030707ig91.htm














C. 2003년 7월7일자 산케이신문(産經新聞) 사설





페리 내항(來航), 日美 관계 150년의 교훈(敎訓)





페리(Matthew Perry) 제독(提督, Commodore)이 이끄는 美 동인도함대(East India Fleet)의 군함(軍艦) 4척이 우라가(浦賀) 앞바다에 내항(內航)한 이후, 7월8일이 정확히 150년이 된다.





에도기(江戶期)의 일본은 미국의 포함외교(砲艦外交)에 굴하는 형태로 개국(開國)을 이루어 근대화(近代化)로 나아갔다. 흑선(黑船) 내항은 그 시대의 세계화(世界化, globalization)의 파도(波濤)였으며, 150년째를 맞이한 현대 일본도 다시 한번, 국제(國際) 테러리즘(terrorism)과 북한의 핵위협(核威脅)을 앞에 두고 큰 변혁기(變革期)에 직면(直面)하고 있다.





페리 내항은, 1853년 7월8일[가에이((嘉永) 6년 6월3일]이었다. 당시(當時)의 미국은 등화(燈火)에 사용하는 경유(鯨油)를 확보(確保)하기 위해 고래잡이가 활발(活潑)했으며, 많은 포경선(捕鯨船)이 일본 근해(近海)에까지 왔다. 페리 함대(艦隊)를 파견(派遣)하는 것으로써 포경선의 피난민(避難民)을 보호하는 한편, 일본과의 통상(通商)을 실시하는 것이 국익(國益)이라고 생각되었다. 거기서 페리 제독은, 압도적(壓倒的)인 군사력(軍事力)을 일본에 과시(誇示)하면서, 「개국과 통상」의 포함외교를 전개(展開)했다.





그런데, 메이지(明治) 이후의 일본인은 페리를 개국의 은인(恩人)이라고 생각해, 일본의 근대화에 미국이 완수(完遂)한 역할(役割)을 정서적(情緖的)으로 파악(把握)하는 경향(傾向)이 있었다. 정서적인 2국간 관계는, 이윽고 이해(利害)의 대립(對立)을 배반(背反)으로 파악하게 되었다. 그러나, 미국이 일본을 보는 눈은, 국익을 시야(視野)에 분명한 논리(論理)로 관철(貫徹)시켜, 일본을 구미열강(歐美列强)에 의한 국제적(國際的)인 게임(game)으로 끌어들여 갔다고 봐야 하는 것이다.





일본의 대미(對美) 관계는, 전전(戰前)에는 무리(無理)하게 한도(限度)를 넘어 대등(對等)한 관계를 요구했고, 전후(戰後)에는 열등의식(劣等意識) 때문에 경제면(經濟面)에서 따라잡는 것을 명제(命題)로 했다.





이러한 日美 사이에 비뚤어진 관계가, 지금, 간신히 극복(克服 되려고 하고 있다. 미국에 있어 일본은, 아시아에서 전략적(戰略的)으로 대단히 중요한 동맹국(同盟國)이며, 당면(當面)한 위협(威脅)인 북한은 물론, 잠재적(潛在的)인 위협에 대해서도 협조(協助)해 대처(對處)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란의 대량살상무기(大量殺傷武器) 문제에서도, 日美는 안전보장(安全保障)을 위해서 이해관계(利害關係)를 공유(共有)하고 있다.





특히, 현재의 부시(George W. Bush) 정권(政權)은, 역대(歷代) 정권 중에서 가장 친일적(親日的)이다.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수상과의 관계는, 레이건(Ronald W. Reagan) 시대의 「론·야스 관계」[로널드 레이건의 론,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의 야스]를 능가(凌駕)하는 관계에 있다.





페리 내항 이후, 150년의 성쇠(盛衰)를 추적(追跡)해보면, 日美 관계가 양호(良好)하면 아시아·태평양 지역이 안정(安定)된다고 하는 교훈(敎訓)을 얻게 된다. 현재의 일본에 지금 다시 한번 「페리 쇼크(Perry Shock)」가 필요하다고 한다면, 그것은 일본 경제의 변혁(變革)이다.





http://www.sankei.co.jp/news/030707/morning/editoria.htm














D. 중국, 한국과 협력강화(協力强化)





북한에 무언(無言)의 압력, 「핵(核)」에 어떠한 영향이 있을까





북한, 러시아에 접근하는 것으로 대항(對抗)하는가





산케이신문 2003년 7월8일 조간(朝刊)





한국 대통령으로서 5년 만에 이루어진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의 방중(訪中)은, 中韓 양국의 긴밀화(緊密化)를 상징(象徵)하는 것과 동시에, 中北 관계의 긴장(緊張)이라는 인상(印象)을 남겨 북한에 무언(無言)의 압력(壓力)을 주고 있다고 보인다. 이것이 북한 핵문제(核問題)의 「평화해결(平和解決)」에 어떻게 영향을 주는지, 베이징(北京)의 전문가(專門家)들은 주목(注目)하고 있다.





中韓 관계는 1992년 국교수립(國交樹立) 이후, 경제 관계를 중심으로 비약적(飛躍的)으로 확대(擴大)된 한편으로, 中北 관계는, 중국의 대한접근(對韓接近)이 요인(要因)이 되어 정체(停滯)되었다. 그러나, 대북(對北) 융화정책(融和政策)을 취하는 김대중(金大中) 前 대통령의 등장(登場) 이후, 북한은 태도를 연화(軟化)시켜, 1998년 김대중씨의 방중(訪中)에도 「이해(理解)」를 나타냈다.





2000년 6월 김대중씨의 방북(訪北)에 의한 남북 정상회담 실현(實現)에 앞서, 김정일(金正日) 총서기(總書記)가 방중해, 中北의 정상교류(頂上交流)가 재개(再開)된 것은, 中·北·韓 3국의 미묘(微妙)한 관계를 나타내는 것이었다. 김정일 총서기는 2001년 1월에도 방중했으며, 2001년 9월에는 장쩌민(江澤民) 총서기[당시(當時)]가 방북해, 中北 관계는 수복(修復)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중국 당국(當局) 소식통에 의하면, 이 장쩌민씨 방북에서는, 중국의 원조문제(援助問題)로 양국이 대립(對立)해, 결렬(決裂)에 가까운 상태였다고 한다. 방북 직후에 일어난 美 중추동시(中樞同時) 테러(terror) 이후, 북한 공작선(工作船) 사건과 탈북자(脫北者) 문제 등으로 마찰(摩擦)이 커졌고, 2002년 가을의 핵문제 표면화(表面化)로 中北 관계는 험악화(險惡化) 되었다.





노무현 대통령의 방중은, 중국이 핵문제를 둘러싸고, 중개공작(仲介工作)을 본격화(本格化) 하고 있는 가운데 행해졌다. 미국내에 대북(對北) 제재(制裁)를 포함한 강경론(强硬論)이 대두(擡頭)되는 가운데, 中韓은, 북한의 「체제붕괴(體制崩壞)」나 「폭발(暴發)」이 가져오는 영향(影響)을 경계(警戒)해, 대화(對話)에 의한 평화해결(平和解決)로 일치(一致)하고 있다. 문제는 북한을 어떻게 다국간(多國間) 협의(協議)에 나오게 할 것인가에 있다.





중국의 중개로 4월에 베이징에서 행해진 美·北·中 3국 협의의 재개를 주장(主張)하는 북한에 대해, 美·日·韓 3국은 다국간 협의를 주장했다. 중국 당국 소식통에 의하면, 중국은 겉으로는, 북한의 주장을 지지(支持)하고 있지만, 본심(本心)은 다국간 협의 밖에 해결의 길은 없다고 보고 있다.





中韓 정상(頂上)이 7월7일 회담에서 어디까지 발을 디딘 의견교환(意見交換)을 했는지, 현재 분명(分明)하지 않다. 양국 모두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 Korean Peninsula Energy Development Organization)에 의한 경수로(輕水爐) 건설중지(建設中止)나 유엔 안전보장이사회(安全保障理事會)의 비난결의(非難決議) 등, 북한에 대한 「압력」에는 반대하는 입장에서 공통되고 있다.





그러나, 中韓 정상이 「전면적(全面的) 협력 파트너십(partnership)」 수립을 선언(宣言)해, 핵문제 해결에 대한 협력 강화를 밝힌 것 자체가, 북한에 대한 「압력」과 다름없다. 북한은 앞으로, 중국의 잠재적(潛在的) 라이벌(rival)인 러시아(Russia)에 대한 접근을 한층 더 깊게 하는 등의 대항책(對抗策)을 갖고 나올 가능성도 있다고 베이징에서는 지적하고 있다.





최근의 中韓 관계





1992년 08월 국교수립의 공동성명(共同聲明)





1992년 09월 노태우(盧泰愚) 대통령이 방중





1994년 03월 김영삼(金泳三) 대통령이 방중





1995년 11월 장쩌민 국가주석이 방한(訪韓)





1998년 04월 후진타오 국가부주석(國家副主席)이 방한





1998년 11월 김대중 대통령이 방중





2003년 07월 노무현 대통령이 방중





http://news.goo.ne.jp/news/sankei/kokusai/20030708/KOKU-0708-01-02-51.html














E. 공산당(共産黨)의 금주소동(禁酒騷動)





실제(實際)로는 존재(存在)하는 내부문서(內部文書)





당방위(黨防衛)의 자각(自覺) 높이고 적의 공격을 분쇄(粉碎)......





배지(badge)는 소정(所定)의 위치에 붙여라





지각(遲刻)은 보고하고, 소재(所在) 분명하게





산케이신문 2003년 7월8일 조간(朝刊)





내부규정(內部規定)으로 외부(外部)에서의 음주(飮酒)를 금지(禁止)하고 있는지 어떤지를 둘러싸고 공산당(共産黨)이 한바탕 소동(騷動)을 벌였다.





시이 가즈오(志位和夫) 위원장(委員長)은 『자주적(自主的)인 합의(合意)로서, [내부규정이라고 한 것은] 착각(錯覺)이었다』라고 문서규정(文書規定)이 없다는 것을 강조하며 사건을 마무리 한다는 방침(方針)이었다.





그러나, 『마치 부모 마음과 같이』[공산당 관계자] 외부에서의 음주금지(飮酒禁止)를 명기(明記)한 비공식(非公式) 내부문서(內部文書)는 존재하고 있었다. 이치다 다다요시(市田忠義) 서기국장(書記局長)은 이 문서에 대해 『누가 만들었는지, 나는 모른다』라고 하고 있지만, 복수(複數)의 공산당 관계자는 『규제(規制)는 완화(緩和)되었지만, 현재도 구속력(拘束力)을 가지고 있다』라고 한다.





「당방위(黨防衛)에 대한 자각(自覺)을 높여, 적(敵)의 어떠한 공격(攻擊)도 분쇄(粉碎)하기 위해서」라고 제목을 붙인 비공식 문서는 33년전인 1970년에 작성된 것으로, 시이씨가 7월2일 기자회견(記者會見)에서 『1970년대에 만들어졌다』라고 설명한 「내규(內規)」에 해당한다고 추측(推測)된다.





외부에서의 음주금지의 규정은 「음주는 원칙(原則)으로서 집에서 하며, 귀가도중(歸家途中)이나 면식(面識)이 없는 사람과는 음주하지 않는다. 특히, 중요한 것을 가지고 있을 때에는 밖에서는 절대로 마시지 않는다」라고 하는 내용이다. 그 후, 당내(黨內)에서 「너무 어렵다」라며 완화를 요구하는 소리가 잇따랐기 때문에, 운용상(運用上)으로는 「상부조직(上部組織)에 보고(報告)해 허가(許可)를 받는다」는 것을 조건(條件으로 인정(認定)되었다고 한다. 다만, 「오는 길에 조금 한 잔」이 용서(容恕)되지 않는다는 상황(狀況)은 같다.





게다가, 이 문서의 제1항은 「美日 반동(反動)과 반당매당집단(反黨賣黨集團)의 당파괴(黨破壞)로부터 당을 방위하기 위해서 부단(不斷)히 혁명적(革命的) 경계심(警戒心)을 높여, 적(敵)의 어떠한 동향(動向)도 즉시 부(部)와 지부(支部)[반(班)]에 보고해 조직적(組織的)으로 분쇄한다」라고 하고 있다. 「혁명(革命)」을 위해 조직방위(組織防衛)와 당내규율(黨內規律)의 유지(維持)에 기를 쓰는 공산당의 모습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제2항 이후는 「경연(硬軟)」을 섞은 내용이다. 「의심(疑心)스러운 사람」과는 교제(交際)·접촉(接觸)을 금지하며, 신변조사(身邊調査)를 규정하고 있는 한편, 당본부내(黨本部內)에서는 「규정의 배지(badge)를 소정(所定)의 위치에 올바르게 붙인다」는 것이나, 「지각(遲刻)·결근(缺勤)의 경우는 부(部)의 책임자에게 반드시 보고해, 근무원(勤務員)의 소재(所在)는 항상 분명히 해둔다」라며 『교육적(敎育的) 지도(指導)』[공산당 관계자]도 있다.





1970년은 미야모토 겐지(宮本顯治)[현재 명예임원(名譽任員)]씨가 서기장(書記長)에서 위원장으로 취임(就任)해, 당지도(黨指導)의 전권(全權)을 완전장악(完全掌握)했던 시기(時期)이다. 공산당은 그 이전(以前)의 20년간을 「반동·반공(反共) 공격에 대한 힘든 투쟁(鬪爭)의 20년이었다」라고 총괄(總括)하고 있어, 내부문서도 이러한 인식(認識) 아래에서 작성된 것 같다.





이치다씨는 7월7일 산케이신문(産經新聞)의 취재(取材)에 대해, 『[시이] 위원장이 기자회견에서 말한 대로. [문서화(文書化) 되어 있지 않은 「합의」라는 것에] 실수(失手)는 없다』라고 말해 「자택외(自宅外) 금주」의 문서나 내규의 존재를 부정(否定)하고 있다.





http://www.sankei.co.jp/news/morning/08iti002.htm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