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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김대중칼럼] 체제가 탄압받는 시대 에 대해서

조선 [김대중칼럼] 체제가 탄압받는 시대 에 대해서









(홍재희) ====== 방상훈의 세습족벌사주체제인 조선일보 김대중이사대우기자는



" 한국 사회는 지금 치열한 이념(理念)갈등에 휘말려 있다. 가히 전쟁의 양상이다. 한때는 이것이 시대적 변화의 한 과정으로 인식되고, 다양성이 거부됐던 시대에 대한 반작용으로 여겨졌다. "



(홍재희) ====== 라고 주장하고 있다. 김대중 기자는 지금 한국사회에서 나타나고 있는 현실에 대해 잘못이해하고 있다. 한국사회는 지금까지 갈등을 일으킬만한 이념자체가 존재할 수 없었다. 오직 하나만의 주의가 제도정치권 내부에서 명맥을 유지해 오다가 국제적인 냉전과 한반도의 냉전체제가 붕괴되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정치적 이념과 지향점이 다양한 시민사회의 도래를 통해 다양한 정치적 주장이 만발하는 토양을 만들기 위해 수구의 긴잠에서 기지개를 켜고 깨어나고 있는 상황이라고 볼 수 있다. 김대중 기자는 그것을 치열한 이념(理念)갈등으로 묘사하고 있다.









(홍재희) ====== 김대중 기자는



"세대 간의 인식차이에서 오는 단절로 인식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 사람들은 이것이 이기고 지는 데 그치지 않고 뺏고 빼앗기는, 어느 경우엔 죽고 죽이는 절박한 상황에 이르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새 세력’으로 이 땅을 ‘지배’해서 ‘나라를 바꾸려는’ 기도가 공공연하고 그들에 의해 하나씩 밀려나 패잔(敗殘)이 생기는 현실은 이제 또 다른 형태의 체제와 반체제 간 싸움으로 발전하고 있다. "





(홍재희) ====== 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렇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현실은 체제교체과정이라고 볼수 있다. 그렇다고 자유민주주의 라는 대한민국체제를 사회주의체제로 교체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자유민주주의 의 외피를 걸치고 지금까지 대한민국사회를 지배해 왔던 분단정치와 야합해온 정경유착의 기득권 그리고 정경유착구조가 만들어 놓은 수구족벌언론들로 형성된 3각 수구의 먹이사슬을 통해 지난 반세기동안 견고하게 고착화된 특권과 반칙과 비상식의 사회구조를 통해 형성된 냉전수구체제의 말기암적 한계를 극복하고 시민사회의 다양성과 원칙과 상식 그리고 공정경쟁의 규칙이 공동체 주류의 공감을 얻어 진정한 의미에서의 자유대한민국체제의 건강성을 정립시키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체제교체가 진행되고 있다고 본다.









(홍재희) ======= 부연한다면 냉전수구의 외피를 걸친 체제에서 원칙과 상식이 바로서고 특권이 배제된 공정경쟁의 규칙이 공동체의 가치기준이 되는 건강한 체제로의 교체가 지금진행되고 있다고 본다. 이러한 변화는 어느 특정정치집단의 전유물이라고 기회주의적으로 접근할 수 없는 한국사회가 미래에도 존재할 수 있는 근거를 만들기 위한 생존을 위한 21세기 한국의 선택이라고 본다.







(홍재희) ======= 김대중 기자는



" 권력을 장악한 ‘나라 바꾸기’ 세력은 4월 총선을 아마도 사활의 갈림길로 보는 것 같다. 아리송한 인물을 내세워 적당히 보수(保守)를 위장하기도 하고, ‘체제’측을 쇼윈도에 내세우는가 하면, 회유나 위협이 통하지 않는 쪽은 물리력으로 매도해 퇴장시키려 한다. "





(홍재희) ========= 라고 주장하고 있다. 김대중 기자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기존정치질서의 특징은 권력을 장악한 물리적인 힘을 지닌 정권 즉 정치적인 힘이 강력한 제어불능의 권력으로 인식돼 왔다. 그러나 현 정권은 그러한 제왕적 권력을 행사하지 못하고 있다. 부연한다면 비로소 권력이 집권세력의 배타적 기득권의 호주머니 속에서 빠져나와 국민들의 품으로 돌아온 것이다. 국민으로부터 권력이 나온다는 평범한 얘기가 건국이후 반세기만에 현실화 되고 있다고 본다.











(홍재희) ====== 과거 같으면 현실정치의 주변부에서 팔짱을 끼고 제3자의 입장으로 방관하고 있을 국민들이 정치의 중심부에 자리잡고 변화와 개혁이라는 태풍의 눈 역할을 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김대중 기자가 기회주의적으로 접근하고 있는 냉전적 흑백논리에 순치된 보수와 진보의 이분법적 틀을 뛰어넘는 근본적이고 구조적이며 본질적인 변화를 보이고 있다. 이러한 근본적인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구체제의 상징들은 자연스럽게 도태될 수밖에 없다. 김대중기자가 갈구하고 있는 수구에 대한 관용이나 구체제에 대한 온정으로 변화하는 시대적 상황의 순리를 결코 배반할 수 없다고 본다 .







(홍재희) ======= 김대중 기자는



" 때가 많이 낀 사람은 비리(非理)로 몰아 매장하는 각개격파의 전략이 절정에 달하는 느낌이다. 반대를 설복·회유해서 우군화(友軍化)하거나 우군화 되지 않는 것은 제압하고 매장한다. 안티(anti)전략은 성공하고 있다. "





(홍재희) ======= 라고 주장하고 있다. 김대중 기자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물론 현 집권세력이 총선을 앞두고 벌이고 있는 기회주의적인 정치적 접근은 분명히 문제점으로 지적할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곧 부패원조세력들의 상징인 한나라당이나 방상훈의 조선일보로 상징되고 있는 시대착오적인 냉전수구세력들의 재활용이 불가능한 폐기처분돼 야할 구체제적인 정체성을 미래사회의 발목을 잡으며 다시 온존시켜야한다고 정당화 시켜 줄 수는 없다. 김대중 기자가 부질없는 향수에 젖어있다면 변화의 격랑 속에 휩쓸려 들어갈 수밖에 없다고 본다. 그리고 이러한 대전환의 변화 속에서 보여주고 있는 현정권의 비상식과 반칙은 변화와 개혁을 지향해 나가고 있는 국민들이 현명하게 극복해 나갈 것이다.







(홍재희) =====김대중 기자는



" 김수환 추기경측은 “그 누구도 의견을 가질 수 있다”고 짐짓 어른스럽게 말했지만, 많은 사람들은 추기경이 시국을 걱정했다가 일격을 당했다는 인상을 받는다. “젊은이들 뒤에 숨어 헤헤거리며 개혁이나 진보로 자신들의 질(質)나쁜 패자부활전을 겉꾸림하는 하류 지식인”을 질타해온 작가 이문열은 장황한 설명 끝에 들메끈을 고쳐매고 전장(戰場)을 떠나 본업(本業)에 복귀한다고 했다. 패잔의 인상을 지울 수 없다. "





(홍재희) ======= 라고 주장하고 있다. 김수환 추기경의 시국을 바라보는 인식에 부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해온 조선일보의 악의적인 여론조작성 호도?는 최근 한국사회에서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변화와 개혁을 지향하고 있는 깨어있는 국민들은 조선일보의 주장에 의해서 잘못 각색되고 잘못 이해하고 있는 시국관으로 한국사회에 영향력 있는 발언을 하려는 김수환추기경의 순수에 때를 묻힌 조선일보의 파렴치한 정체성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 보이는 실천의 장을 만들어 냈었다.









(홍재희) ====== 조선일보의 냉전질서고착의 전설이 깨지는 순간을 불러온 것이다. 김대중 기자는 작가 이문열에 대해서 전장(戰場)을 떠나 본업(本業)에 복귀하는 패잔으로 보고 있다. 부연한다면 이문열은 한국판 미시마 유끼오 와도 같다. 미시마 유끼오는 일본군국주의의 부활을 꿈꾸다 할복자살한 일본의 문학인이었다. 마찬가지로 이문열도 전형적인 냉전수구적 정체성을 지닌 문학인이다. 이문열은 지금까지 보존하고 지켜야할 보수 즉 건강한 보수의 틀을 지향해오지 않았다고 본다. 이러한 이문열이 붕괴되고 있는 한나라당의 냉전 수구적인 체제의 유지를 위해 훈수를 두기 위해 밀실공천의 장에 들어갔다가 더 이상 수구체제의 지속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스스로 잠적했다고 보면 틀림없다.







(홍재희) ======= 김대중 기자는



" 천도(遷都)의 진의를 예보해온 일부 언론인들도 이제 ‘폭민(暴民)’의 피켓에 매맞고 하나둘씩 다른 곳을 쳐다보게 된다. 군부시절 밤에 걸려오는 전화는 격려였지만, ‘참여의 시대’에 걸려오는 전화는 욕설과 협박뿐이다. ‘조·중·동’도 더 이상 조·중·동으로 남아 있을 것 같지 않다. 하나씩 분리시키는 일이 진행 중에 있다. "





(홍재희) ======= 라고 주장하고 있다. 군부시절 밤에 걸려오는 전화는 방씨 족벌의 수구족벌체제가 권언유착을 통해 견고하게 고착화시킨 밤의 대통령에 대한 권위를 살아있는 정치권력이 확인시켜주는 격려의 전화였지만 참여의 시대에 언론인들에게 요구하고 있는 변화와 개혁을 지향하고 있는 깨어있는 국민들의 언론개혁에 대한 강력한 메시지가 담긴 목소리는 권언유착을 통해 이미 권력화된 방씨 수구족벌의 언론권력을 독자와 언론소비자의 편에서 탈색시켜 정치권력과 유착하는 관행을 혁파시키고 언론소비자의 편에서 서서 정치권력을 견제하는 목탁으로 거듭나도록 언론의 제자리 찾기를 돕고 있는 현실에 김대중 기자는 지금 적응하지 못하고 흔들리고 있다.









(홍재희) ====== 김대중 기자는 " ‘조·중·동’도 더 이상 조·중·동으로 남아 있을 것 같지 않다." 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렇다 예전과는 다르다. 정치권력이 국민들과 유리된 가운데‘조·중·동’의 냉전 수구적인 족벌세습사주체제와 권언유착을 유지하고 있을때의 정치권력을 상대로 한 ‘조·중·동’의 영향력은 막대 했었다. 국민들의 밑바닥민심을 얻지 못한 정치권력의 정권유지를 위한 ‘조·중·동’의 여론조작이 정권에게는 절대적으로 필요했고 정권과 ‘조·중·동’또한 마찬가지였다. 서로의 필요에 의해서 공생공존의 틀속에서 서로 반대급부를 공유하며 오늘의 ‘조·중·동’ 수구족벌 카르텔을 형성했던 것이다.









(홍재희) ======== 그러나 현정권은 그러한 부담이 없다. 변화와 개혁을 지향하는 깨어있는 국민들의 밑바닥 민심을 바탕으로 집권했기 때문에 권위주의독재정권시절의 ‘조·중·동’의 여론조작에 의한 정권안보에 대한 필요성이 더 이상 필요 없게 됐다. 뿐만 아니라 인터넷매체와 ‘조·중·동’의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는 신문매체 방송매체를 통해서 그동안 ‘조·중·동’ 수구족벌 이 독점적으로 형성해온 여론 독과점의 카르텔이 무너졌기 때문에 정치권력에 대해 ‘조·중·동’이 예전과 같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는 구조가 형성돼 가고 있는 상황이다. 그렇기 때문에 ‘조·중·동’은 현실적으로 시대적 변화라는 순리앞에 발전적으로 각개격파 당할 수밖에 없다고 본다. 김대중 기자는 그점을 읽어야 한다.









(홍재희) ======= 김대중 기자는



" 야당도 지리멸렬 상태다. 그 숱한 부정 덩어리가 병(病)의 근원인 데다 거기에 그것을 다스릴 의사나 약조차 없어 이제 야당은 한낱 길거리의 타구(唾口)대상으로 전락했다. 야당의 리더십도 먹칠당해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어쩌면 야당들이 그들의 조연(助演)이 아닌가 느껴질 정도다. 야당 죽이기는 성공하고 있다. "





(홍재희) ======= 라고 주장하고 있다. 한나라당은 살아있는 정치권력을 견제하고 비판할수 있는 정치적 사회적 도덕적 정당성을 이미 상실했다. 스스로의 존재가능성에 회의를 품게할 정도도 재활용이 불가능한 정치집단으로 급격한 몰락의 길을 걷고 있다. 총선에서 의석을 많이 얻어 선전했다고 해서 한나라당의 존재가치가 고 평가 될 수 없을 정도로 한나라당 이라는 정체성은 이미 한국의 정치판에서 그 수명을 다했다고 보면 무리가 없을 것이다.









(홍재희) ===== 이러한 한나라당의 몰락은 야당 죽이기라기 보다는 한국정치의 커다란 암 덩어리가 떨어져 나가고 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한 분석이 될 것이다. 이 시점에 있어서의 야당의 의미는 한나라당이라기보다 똑같은 노란색의 복장을 서로 고집하고 있는 정신적 여당인 열린 우리당과 민주당 상대적으로 진보적이고 계층을 대변하는 민주노동당의 체제로 여야의 구분을 가름하는 것이 현실적이다.









(홍재희) ======= 김대중 기자는



" 관료도 고개를 숙였다. 말 안 듣거나 비판하면 가차 없이 몰매를 맞거나 태질당하는 것을 본 심장 약한 관료들이 고개를 들 리가 없다. 납짝 엎드려 비바람을 피하는 것이 그들의 속성인 것을 저들은 너무나 잘 안다. "





(홍재희) ======= 라고 주장하고 있다. 김대중 기자는 친미 사대적 외교부 대미담당관료들의 문제점을 예로 드는 것으로 보인다. 그들의 예를 든다면 김기자의 주장은 설득력이 약하다. 김기자도 변화하고 있는 미국의 대한반도 정책 부연한다면 미국의 세계전략의 변화에 따라 한반도주둔미군의 위상변화가 한국정부의 의지와 관계 없이 진행되고 있다고 인정하고 있는데 그러한 미국정부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는 외교부의 숭미외교 담당관료들은 당연히 도태돼야한다고 본다.









(홍재희) ====== 그 점을 비판하고 있다면 김 기자는 변화하고 있는 미국의 한반도 정책을 받아들여야한다는 김 기자 자신의 주장과 한편으로 숭미사대주의 대미담당외교관리의 퇴행적 관행을 옹호하는 한입 가지고 두말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기회주의 적인 수구적 관료들은 납짝 엎드려 개혁의 비바람을 피하는 형태를 취할 것이고 시대적 변화에 능동적인 관료들은 목청을 높이게 될 것이다.





(홍재희) ======= 김대중 기자는



" 모든 싸움에는 장수가 있는 법인데, 이른바 보수 진영(진영이라고 할 것까지도 없지만)에는 전략도 없고, 의지도 없고, 장수(將帥)도 없다. 있다고 해도 모두 너무 때가 많이 끼었거나 늙었거나 기회주의에 젖어 있을 뿐이다. 그들은 오랜 기득과 독주(獨走) 속에서 싸울 줄 아는 기술과 의지를 잃었다. "







(홍재희) ======= 라고 주장하고 있다. 대한민국에는 보존하고 지켜 나가야할 가치가 있는 정통보수가 존재하지 않았다. 한나라당은 보존하고 지켜 나가야할 정통보수의 가치가 아닌 극복하고 퇴출시켜야할 냉전 수구적인 구체제일 뿐이다. 방상훈의 조선일보를 비롯한 조 . 중 . 동의 족벌사주체제도 지키고 보존해 나가야할 보수성이 아닌 극복의 대상인 수구적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다. 이들이 유지해온 기득과 독주(獨走)속에는 정통보수가 자리잡을수 있는 건강한 토양이 존재하지 않았다.









(홍재희) ======= 김대중 기자는



" 안보가 어떻고, 경제가 어떻고, 반미가 어떻고, FTA가 어떻고, 파병이 어떻고 하지만 그런 것들은 이제 그리 중요하지 않다. 그것들은 기본으로부터 파생되는 잎사귀와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대안과 다름과 비판이 하나씩 정복되어 우군화되거나, 아니면 홍위병적으로 제압당하는 상황에서 한국사회는 어디까지 밀려갈 것인가. "





(홍재희) ======= 라고 주장하고 있다. 한국사회는 이제 한나라당과 조 . 중 . 동이라는 냉전 수구적인 이글루 속에서 빠져나와 미래지향적인 약속의 땅으로 방향을 틀고 힘찬 발걸음을 옮기고 있다. 그 과정에 시행착오도 있을수 있고 우여곡절도 있을 수 있다. 또 조 . 중 . 동의 발목잡기도 산발적으로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시대적 대세는 역류되지 않는다는 확신이 지금 한국사회에 충만돼 있다. 이러한 한국사회의 변화에 동참하지 않는 한 조 . 중 . 동과 김대중 기자와 한나라당에게는 거대한 절망의 벽이 될 것이다. 반면에 한국사회는 조 . 중 . 동과 김대중 기자가 지금까지 만들어 놓은 절망의 벽을 지금 막 사뿐히 넘어가고 있다. 뒤쳐져 있는 자 그대이름은 조 . 중 . 동과 김대중 기자인가?







(홍재희) ====== 김대중 기자는



" 아니 무작정 밀려가고 말 것인가를 판단해야 한다. 변화는 필요하고 불가피하다. 그러나 변화라는 것이, 또는 이판사판의 자포자기가 우리를 어디로 끌고 가는 것인지를 알 권리는 있다. 반대할 권리도 있어야 한다. 예전엔 반체제가 곧 민주화였고 반독재였다. 지금은 ‘체제’가 탄압 받는 시대로 가고 있다. "





(홍재희) ======= 라고 주장하고 있다. 극복되고 퇴출 되어야 할 집단에게 반대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해 달라는 얘기는 한국사회의 모순을 이대로 안고 가자는 얘기밖에 안 된다. 그것은 곧 공멸이다. 그러한 구체제는 이제 교체시켜야한다. 할 만큼 했고 한민족과 한국사회에 대해서 고통을 안길 만큼 않기지 않았는가? 그러한 구체제의 온존을 바란다면 그것은 미래를 담보로 한국사회의 공멸을 요구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김대중 기자에게 묻겠다. 지금 당신의 글 속에서 나타나는 성역 없는 논조를 통해서 현 정권에 대한 독재의 정체성이라는 기류를 전혀 감지할 수 없다.









(홍재희) ====== 그렇다면 김대중 기자 당신이 주장하고 있는 비판과 반대를 표현할 수 있는 권리는 보장돼 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더 이상 무엇을 원하는가? 그 이상을 요구하는 것은 현 정권이 아니라 국민들을 상대로 해서 요구해야할 것이다. 2004년 이시대의 참다운 정치권력은 노무현 대통령이 앉아있는 권좌에서 나오지 않는다. 국민들의 마음속에서 나오고 있다. 그런데 김대중 기자는 노무현 대통령에게 줄기차게 뭔가를 요구하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이 조 . 중 . 동과 한나라당 그리고 김대중 기자를 살리고 죽이는 권한을 가지고 있지 않다.









(홍재희) ====== 그러한 권한은 바로 국민들이 지니고 있다. 김대중 기자는 국민들을 보라 그리고 언론소비자들의 뜻을 헤아려 보아야 한다. 조 . 중 . 동과 김대중 기자가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제왕적 대통령의 권력은 붕괴되고 참 권력이 국민들에게 이미 돌아간 상황이다. 이러한 시점에서 김대중기자가 노무현대통령과 집권세력을 협박하고 회유하고 구슬러도 효과가 없다. 노무현 대통령과 집권세력들에게는 과거와 같은 배타적 정치권력이 존재하고 있지 않다. 이미 권력의 중심이 국민들 속으로 시민들 속으로 들어가서 교체된 상황이다. 이러한 상황을 김대중 기자와 조선일보는 읽어야 한다. 그래야 살아 남을 수 있다.











[김대중칼럼] 체제가 탄압받는 시대(조선일보 2004년 2월17일자)





'나라바꾸기' 세력의 안티전략 … 대안·다름·비판 하나씩 정복되고







한국 사회는 지금 치열한 이념(理念)갈등에 휘말려 있다. 가히 전쟁의 양상이다. 한때는 이것이 시대적 변화의 한 과정으로 인식되고, 다양성이 거부됐던 시대에 대한 반작용으로 여겨졌다.



세대 간의 인식차이에서 오는 단절로 인식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 사람들은 이것이 이기고 지는 데 그치지 않고 뺏고 빼앗기는, 어느 경우엔 죽고 죽이는 절박한 상황에 이르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새 세력’으로 이 땅을 ‘지배’해서 ‘나라를 바꾸려는’ 기도가 공공연하고 그들에 의해 하나씩 밀려나 패잔(敗殘)이 생기는 현실은 이제 또 다른 형태의 체제와 반체제 간 싸움으로 발전하고 있다.



권력을 장악한 ‘나라 바꾸기’ 세력은 4월 총선을 아마도 사활의 갈림길로 보는 것 같다. 아리송한 인물을 내세워 적당히 보수(保守)를 위장하기도 하고, ‘체제’측을 쇼윈도에 내세우는가 하면, 회유나 위협이 통하지 않는 쪽은 물리력으로 매도해 퇴장시키려 한다.



때가 많이 낀 사람은 비리(非理)로 몰아 매장하는 각개격파의 전략이 절정에 달하는 느낌이다. 반대를 설복·회유해서 우군화(友軍化)하거나 우군화 되지 않는 것은 제압하고 매장한다. 안티(anti)전략은 성공하고 있다.



김수환 추기경측은 “그 누구도 의견을 가질 수 있다”고 짐짓 어른스럽게 말했지만, 많은 사람들은 추기경이 시국을 걱정했다가 일격을 당했다는 인상을 받는다. “젊은이들 뒤에 숨어 헤헤거리며 개혁이나 진보로 자신들의 질(質)나쁜 패자부활전을 겉꾸림하는 하류 지식인”을 질타해온 작가 이문열은 장황한 설명 끝에 들메끈을 고쳐매고 전장(戰場)을 떠나 본업(本業)에 복귀한다고 했다. 패잔의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천도(遷都)의 진의를 예보해온 일부 언론인들도 이제 ‘폭민(暴民)’의 피켓에 매맞고 하나둘씩 다른 곳을 쳐다보게 된다. 군부시절 밤에 걸려오는 전화는 격려였지만, ‘참여의 시대’에 걸려오는 전화는 욕설과 협박뿐이다. ‘조·중·동’도 더 이상 조·중·동으로 남아 있을 것 같지 않다. 하나씩 분리시키는 일이 진행 중에 있다.



야당도 지리멸렬 상태다. 그 숱한 부정 덩어리가 병(病)의 근원인 데다 거기에 그것을 다스릴 의사나 약조차 없어 이제 야당은 한낱 길거리의 타구(唾口)대상으로 전락했다. 야당의 리더십도 먹칠당해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어쩌면 야당들이 그들의 조연(助演)이 아닌가 느껴질 정도다. 야당 죽이기는 성공하고 있다.



관료도 고개를 숙였다. 말 안 듣거나 비판하면 가차 없이 몰매를 맞거나 태질당하는 것을 본 심장 약한 관료들이 고개를 들 리가 없다. 납짝 엎드려 비바람을 피하는 것이 그들의 속성인 것을 저들은 너무나 잘 안다.



모든 싸움에는 장수가 있는 법인데, 이른바 보수 진영(진영이라고 할 것까지도 없지만)에는 전략도 없고, 의지도 없고, 장수(將帥)도 없다. 있다고 해도 모두 너무 때가 많이 끼었거나 늙었거나 기회주의에 젖어 있을 뿐이다. 그들은 오랜 기득과 독주(獨走) 속에서 싸울 줄 아는 기술과 의지를 잃었다.



이문열씨가 말하는 ‘하류 지식인’의 대칭에 ‘상류 지식인’들이 있겠지만, 기실 이들도 “시비는 무시하는 게 상책이요. 피하는 게 묘수가 되니” 우리가 지금 무엇에 이끌려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어렴풋이나마 알려줄 ‘등대’조차 없는 셈이다.



안보가 어떻고, 경제가 어떻고, 반미가 어떻고, FTA가 어떻고, 파병이 어떻고 하지만 그런 것들은 이제 그리 중요하지 않다. 그것들은 기본으로부터 파생되는 잎사귀와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대안과 다름과 비판이 하나씩 정복되어 우군화되거나, 아니면 홍위병적으로 제압당하는 상황에서 한국사회는 어디까지 밀려갈 것인가.



아니 무작정 밀려가고 말 것인가를 판단해야 한다. 변화는 필요하고 불가피하다. 그러나 변화라는 것이, 또는 이판사판의 자포자기가 우리를 어디로 끌고 가는 것인지를 알 권리는 있다. 반대할 권리도 있어야 한다. 예전엔 반체제가 곧 민주화였고 반독재였다. 지금은 ‘체제’가 탄압 받는 시대로 가고 있다.



(김대중·이사기자) 입력 : 2004.02.16 17:55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