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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사설] 역사를 더럽히는 벌거벗은 장사꾼들 에 대해서

조선[사설] 역사를 더럽히는 벌거벗은 장사꾼들 에 대해서







(방상훈의 친일 반민족 반민주 반 통일의 세습족벌사주체제인 조선일보사설은



" 탤런트 이승연씨가 ‘일본군 위안부’를 소재로 누드 사진을 찍어 인터넷과 휴대전화 영상으로 팔겠다고 나선 것은 아무리 봐도 제정신에서 한 일은 아닐 것이다. 그게 제정신에서 벌인 일이라면 그 ‘제정신’은 보통사람의 ‘정신 나간 정신’과 같은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



(홍재희) ======= 라고 주장하고 있다. 탤런트 이승연씨가 ‘일본군 위안부’를 소재로 누드 사진을 찍겠다고 공공연하게 주장하고 있는 현실은 조선사설의 주장과 같이 이승연씨 혼자만 '제정신' 이 아니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은 아니라고 본다. 한국사회자체의 가치관이 일제시대를 거쳐오면서 심각하게 훼손되고 파손된 채 치유되지 못하고 방씨 족벌로 상징되고 있는 친일반민족세력들에 의해서 왜곡된 채 친일 방씨 족벌조선일보가 민족정론지로 둔갑하며 한국사회의 물구나무선 가치관 형성에 기여? 하며 오늘에 이르렀기 때문이라고 본다.









(홍재희) ====== 그런가 하면 최근에 대한민국 국회에서는 부끄러운 역사를 다시 반복하지 않기 위해 올바른 역사 조명의 일환으로 친일인명사전을 발행하는데 소요되는 예산 5억원를 전액 삭감 하는등 식민지 지배부역자들에 대한 역사바로세우기작업의 은폐 작업에 앞장서는등 이렇듯이 우리한국사회에서 나타나고 있는 현상들을 놓고 봤을 때 탤런트 이승연씨가 ‘일본군 위안부’를 소재로 누드 사진을 찍어 상품화한다고 하는 것에 대해 방씨 족벌의 조선일보가 비판하는 것은 조선일보 스스로에게 비판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일본군 위안부’를 소재로 누드 사진을 찍은 이승연씨야말로 방씨 족벌의 친일 반민족적인 조선일보의 모습과 친일인명사전예산전액을 삭감한 대한민국국회와 전혀 다를 바 없는 같은 얼굴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국회와 방씨족벌의 조선일보는 이승연씨가 일본군 위안부’를 소재로 누드 사진을 찍겠다는 주장에 대해 비판할 도덕적 정당성이 없다.







(홍재희) ===== 조선사설은



" 위안부로 끌려갔던 할머니들이 몇 년째 일본대사관 앞에서 피맺힌 시위를 계속하고 있는 마당에 어떻게 이런 발상을 할 수 있었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생각해 보라. 이스라엘 여배우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벌거벗고 찍은 사진으로 장사를 하겠다고 나서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뭐라고 하겠는가. "





(홍재희) ====== 라고 주장하고 있다. 조선일보는 몇 년째 일본 대사관앞에서 피맺힌 시위를 하고 있는 위안부 할머니들의 소식을 지금까지 독자들에게 얼마나 성의 있게 보도했었는지 양심껏 한번 말해봐라? 지금까지 조선일보는 이들 할머니들의 피맺힌 시위를 외면해 오지 않았는가? 그런 조선일보가 이승연씨를 비판하는 수단으로 위안부할머니들의 일본 대사관앞 시위를 이용하는 것은 한마디로 얘기해서 파렴치한 짓이다.









(홍재희) ====== 조선사설은 " 이스라엘 여배우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벌거벗고 찍은 사진으로 장사를 하겠다고 나서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뭐라고 하겠는가." 라고 반문하며 이승연씨의 ‘일본군 위안부’누드 촬영문제를 비판하고 있다. 이승연씨의 시도는 그래도 방씨 족벌의 조선일보가 보여준 친일반역행위에 비하면 차라리 신선한 충격이라고 볼 수 있다. 방상훈 사장의 할아버지인 방응모 조선일보사장은 일제시대에 조선의 학생들과 숫처녀들을 일제의 총알받이와 성노리개로 내모는데 적극적인 나팔수 역할을 하며 학도병으로 끌려가 수많은 목숨을 잃게 하는데 기여했고 조선의 숫처녀들이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나가 소중한 정조를 유린당하는 반인륜적인 비극을 부채질 했다.









(홍재희) ======뿐만 아니라 방응모 조선일보 사장은 일제로부터 독립을 위해 시베리아 만주벌판에서 목숨을 걸고 맞서 싸운 우리의 독립군들을 살상하라고 손수 고사포를 구입해 일제에 헌납했다. 방씨 족벌의 조선일보는 이러한 친일 반민족적인 범죄행위를 해놓고도 지금까지 그 죄과를 뉘우치기는 커녕 오히려 민족의 정론지라고 큰소리치고 다니는 파렴치한 행태를 보이고 있는데 이런 조선일보에 비하면 이승연의 주장은 차라리 신선하기 까지하다.









(홍재희) ====== 물론 이승연씨의 일본군 위안부’를 소재로 한 누드 사진촬영은 있을수도 없는 일이고 결코 허용돼서도 안 된다. 막아야한다. 그러나 방씨 족벌조선일보가 이승연씨에게 손가락질 할 만큼 떳떳한 것이 없기 때문에 방씨 족벌의 조선일보는 입이 열 개라도 이승연씨를 비판할 수 있는 자격이 없다고 본다. 이승연씨가 조선일보의 친일 반민족적이고 반인륜적인 범죄적 행위를 거론하며 무슨 염치로 나 이승연이를 비판 하는가 라고 반문한다면 방씨 족벌의 조선일보는 무어라고 답변할 것인가?







(홍재희) ====== 조선사설은



" 이승연씨와 기획사측은 대규모 기자회견까지 열어 “종군위안부 문제가 잊혀지는 것이 안타까워서 기획했다”고 밝혔다 한다. 입에서 나오기만 하면 다 말이 되는 줄 아는 모양이다. “종군위안부가 여성의 성(性)을 상품으로 생각하게 만든 원흉”이라고도 했다. 벌거벗은 사진 한 번 접속하는 데 1000원 안팎씩 받아 청소년들의 푼돈을 우려내려 하면서 무슨 뒷말이 이리 많은가. "





(홍재희) ====== 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승연씨와 기획사측은 즉각 ‘일본군 위안부’를 소재로 한 누드 사진촬영계획을 중단해야한다. 이를 강행한다면 일제시대에 일본이 국가적으로 ‘일본군 위안부’들에 대해 가한 성적학대행위를 통해서 짓밟혀 상처받고 지금도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치유되지 못하고 고통받고 있는 '종군위안부' 할머니들의 순수한 인간의 존엄성을 또 다시 짓밟는 야만적이고 잔인한 패륜적 행위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일본군 위안부’를 소재로 한 누드 사진촬영계획은 두말할 것 없이 취소돼야하고 대한민국정부는 국가적 차원에서 이러한 패륜적 반인륜적 행위를 엄격하게 막아야한다.









(홍재희) ====== 이승연씨와 기획사측은 “종군위안부 문제가 잊혀지는 것이 안타까워서 기획했다고 진심으로 생각한다면 이승연씨가 연예인으로서 누리고 있는 지명도를 이용해서 얼마든지 ‘일본군 위안부’를 소재로 한 누드 사진촬영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종군위안부 문제의 심각성을 부각 시킬수 있다고 보는데 왜 하필 그런 방법으로 하려하는가? 즉각 중단하고 다른 방법을 모색하라?









(홍재희) ====== 조선사설은 " 벌거벗은 사진 한 번 접속하는 데 1000원 안팎씩 받아 청소년들의 푼돈을 우려내려 하면서 무슨 뒷말이 이리 많은가. " 라고 비판하고 있는데 그런 조선일보는 반인륜적이고 패륜적인 인격살인을 마다하지 않았던 자신들의 친일반민족행위의 정체성이 그대로 묻어나는 조선일보신문을 한달에 10000원 내외씩 받고 제대로 된 역사교육을 받지 못해 정체성에 혼란을 격고 있는 수많은 독자들을 상대로 한푼 한푼 우려내는 것은 그럼 괜찮다는 말인가? 이승연씨가 안되면 조선일보가 독자들에게 팔고 있는 신문장사도 안돼야 한다.







(홍재희) ======= 조선사설은



" 이미 10여명의 여자 연예인들이 앞다퉈 벌거벗은 사진을 팔아 몇 억, 몇 십억을 벌어들였다. 탱크로 정권을 잡은 세력들이 유일하게 백성이 숨 쉴 공간으로 음란물에 관대했던 암울했던 그 시절보다 지금이 오히려 더 병들고 더 황폐한 사회가 돼버렸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





(홍재희) ====== 라고 주장하고 있다. 조선사설은 " 이미 10여명의 여자 연예인들이 앞다퉈 벌거벗은 사진을 팔아 몇 억, 몇 십억을 벌어들였다. " 라고 비판하고 있는데 조선사설이 그런 비판을 하려면 스포츠 조선을 통해 여자 연예인들이 앞다퉈 벌거벗은 사진을 팔아 몇 억, 몇 십억을 벌어들이는 '영업'을 돕는 일종의 '호객행위'부터 중단해야 한다. 조선사설 안그런가? 벌거벗은 사진을 팔아 몇 억, 몇 십억을 벌어들이고 있는 연예인들의 성에 대한 상품화를 부채질하는 곳이 바로 스포츠 조선이 아니고 무엇이라는 말인가?









(홍재희) ====== 조선사설은 " 탱크로 정권을 잡은 세력들이 유일하게 백성이 숨 쉴 공간으로 음란물에 관대했던 암울했던 그 시절보다 지금이 오히려 더 병들고 더 황폐한 사회가 돼버렸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황폐한 사회가 되기까지는 조선일보를 비롯한 사회적 공기이요 목탁이라고 할 수 있는 언론들이 탱크로 정권을 잡은 세력들에 아부하고 또 그들이 물러나고 나서 대체한 권력이라고 할수 있는 자본에 대해 유화적으로 접근하며 그때그때 시류에 편승하는 원칙과 정도가 없이 오직 상황논리에만 의존해 지금까지 한국사회의 가치관을 파괴하며 외형적인 1등신문의 성장에 매달려온 방상훈의 조선일보 책임 또한 매우 크다. 그런 조선일보는 스스로 자성해야한다.







(홍재희) ======= 조선사설은



" 공영’이라는 명찰을 붙인 TV들이 시청자 눈길을 끌기 위해 누드 장사로 지명도를 쌓은 연예인들을 드라마와 프로그램에 잇따라 기용하고 있는 것을 보면 이 나라가 정신이 제대로 된 나라라고는 도저히 볼 수가 없다. "





(홍재희) ======= 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런 비판을 하고 있는 조선일보의 요즘 행태는 어떤가? 일제시대에 친일반민족행위를 통해 미국과 일본이 전쟁을 할 때 친일반미의 선봉에 서서 오늘날 한국사회의 반미세력의 원조격인 방씨 족벌이 일제가 망하자 친미로 옷을 갈아입고 반공을 부르짖으며 8 . 15 이후의 한국주류언론으로 행세하며 민족의 정통성에 방씨족벌 이라는 더러운 외투를 걸치게 하더니 군사정권이 들어서자 민주주의와 언론자유의 목을 비틀고 권언유착을 통해 한국사회가 지향하는 건강한 민주가치질서를 파괴하는데 앞장서왔던 조선일보가 최근에는 이라크에 파병된 일본자위대의 활동에 대해서 자랑스럽게 여기는 사설을 내보내는등 아직도 정신 못 차리고 있는 조선일보가 공영방송을 비판하고 있는 것은 설득력이 약하다.







((홍재희) ===== 그래도 공영방송들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독재정권에 아부하며 언론소비자들의 알권리를 결과적으로 훼손해 왔던 자신들의 부끄러운 행위들에 대해서 공개사과 했다. 부끄러운 과거에 대해서 사과하지 않은 조선일보가 공영방송을 비판하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 조선일보가 아무리 개인소유라고 할지라고 언론이라는 공공성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에 공여방송 못지 않은 사회적 책임 또한 비켜갈 수 없기 때문에 조선일보에 대해서 공영방송에 버금가는 도덕적 사회적 책임문제를 거론하는 것이다.









(홍재희) ======= 조선사설은



" 황폐한 나라, 뒤집힌 사회에서 국민이 제정신을 지키려면 결국 자신이 절제하는 수밖에 없다. 천박한 누드 상품을 더 이상 사지 않는 소비자들의 단호함만이 이 부끄러운 악순환의 고리를 끊을 수 있다. "





(홍재희) ====== 라고 주장하고 있다. 조선사설의 주장대로 접근한다면 천박한 누드 상품을 더 이상 사지 않는 소비자들의 단호함과 함께 천박한 누드 상품보다 더 우리국민들의 정신을 대대로 황폐화시키고 있는 반민족적이고 반인륜적인 정체성이 묻어나는 방상훈 세습족벌사주체제인 조선일보를 더 이상 사지 않는 소비자들의 단호함만이 이 부끄러운 친일반민족 반민주 반 통일과 끈끈하게 연결돼 있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조선일보와 방상훈 사장의 생각은 어떤가? 아래 내용은 방상훈 조선일보사장의 할아버지인 방응모 조선일보 사장의 친일반민족 행위 내용들이다. 한번 살펴보고 이승연씨의 ‘일본군 위안부’를 소재로 누드 사진을 찍는 행위와 비교해보자. 조선일보는 한마디로 얘기해서 과거에 대한 부끄러움을 전혀 모르는 신문이다.





『방응모 친일파 규정근거 전문

´민족정기를 세우는 의원모임´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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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응모 주요 친일 경력

- 언론 내세워 일제에 아부한 교화 정책의 하수인



·생몰연도 : 1890∼?

·출생지 : 평안북도 정주군 동주면(뒤에 고안면으로 바뀜)

·주요 친일경력

- 1923년 동아일보 정주지국 경영

- 1925년 평안북도 삭주군 외남면의 교동광업소(校洞鑛業所)를 시작하여 큰 돈을 벌었음





- 1933년 3월 조선일보사의 경영권을 계승하여 7월 자본금 30만원의 주식회사로 등기

- 1933년 이심회(以心會)라는 장학회를 만들어 뒤에 이를 서중회(序中會)로 고쳐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

- 1935년 7월에는 서울특별시 태평로에 새 사옥을 준공하는 한편, 출판부를 신설하여 월간잡지 <조광(朝光)> <여성(女性)> <소년(少年)> 등을 차례로 창간

- 1935년 철저한 친일잡지인 월간 <조광(朝光)>을 창간하여 사장으로 취임

- 1936년 동방문화학원(東邦文化學院)을 설립

- 1937년 9월 6일부터 전조선명사 제2회 각도파견 시국강연 경기도반으로 한규복(韓圭復), 박연서(朴淵瑞)와 함께 피선됨

- 1938년 7월 6일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발기인

- 1940년 10월 16일 발족된 국민총력조선연맹 참사

- 1941년 10월 22일 발족된 조선임전보국단 이사(매일신보 1940.10.17일자)



- 1941년 8월 25일 최린(崔麟), 한상룡(韓相龍), 윤치호(尹致昊), 이진호(李軫鎬), 이승우, 신흥우(申興雨), 조병상(曺秉相), 주요한(朱耀翰) 등 4백여 명의 친일주구배가 부민관에 모여 임전대책협의회를 감행하고 실천위원 35명을 선출하였는데 방응모도 실천위원이 되었음

- 1941년 9월 4일 오후 6시 반 부민관에서 임전대책연설회를 끝마친 임전대책협의회에서는 ´이로써 실천으로!´라는 슬로건을 세우고 동 회원 70여명을 동원하여 채권가두판매에 나섰는데 방응모도 윤치호, 한상룡, 이광수, 최린 등과 함께 종로대로 나섰음

- 1942년 조광 2월호에 ´타도! 동양의 원구자(怨仇者)´란 논문을 발표

- 1943년 1월 현재 국민총력조선연맹 참사

- 1943년 11월 14일에는 조선문인보국회 산하 10개 잡지사의 하나로서 ´출전학도 격려대회´를 주최하기도 했으며, 자신의 사재를 출자해 고사포(高射砲)를 구입해 일본군에게 기증

- 1944년 9월 8일 조선항공공업회사에 자본을 출자해 중역으로 피선

- 8·15 해방 후에는 조선일보를 복간

- 1946년 숭문상업중학교(崇文商業中學校)를 경영

- 1950년 7월 6일 공산군에게 납북당한 뒤 소식이 없음





- 자기방어 한계 넘어선 친일논조 : ´황국 일본이 명치유신 이후 일청(日淸), 일로(日露)의 양 전역을 지나 오늘 만주사변과 지나사변을 겪는 동안 우리의 발길은 대륙에 힘차게 드듸서게 되었으니 여기 일본의 뻐더가는 생장(生長) 발전의 힘찬 거름을 볼 수 있거니와 이제 2천 6백년 2월 11일 기원을 당하와는 천황, 황후 양 폐하와 성수무강(聖壽無彊) 하옵심을 삼가 비옵고 천태자 전하, 의궁친왕(義宮親王) 전하, 조궁(照宮), 효궁(孝宮), 순궁(順宮), 청궁(淸宮) 4내친왕(內親王) 전하의 어강녕(御康寧)을 빌어 마지 안는다…… 이 전국적 제전에 임하여 오인(吾人)은 국운의 창성과 황군장병의 무운장구를 삼가 기원하여 마지안는 바이다(조광 1940. 3월호 <봉축 2천6백년의 기원절(紀元節)>)



<2천 6백년의 기원절>이라는 제목 하에 일본의 유구한 역사를 찬미하고 일본 왕족의 건강까지 기원한 이 글은 군국주의의 열렬한 신봉자인 일본인에 의해 씌어진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마저 들 정도이다. 그러나 이 글은 엄연한 한국인, 그것도 조선일보사의 사주이자 잡지 조광의 발행인이던 방응모에 의해 쓰여진 것이다.



- 친일잡지 조광을 토대로 교화 정책에 앞장서 : 일제 당시 언론계에 몸담고 있던 문인 기자들이나 발행인들의 행적을 뒤쫓다 보면 이들에게 있어 민족이라는 개념은 일제의 ´내선일체(內鮮一體)´ 사상에 뿌리를 둔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마저 갖게 한다. 특히 3·1 운동 이후 일본의 문화 통치 아래에서 등장한 민간지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등도 1930년대 후반기부터 친일의 길을 걷기 시작하면서 적어도 일제하 한반도 내의 우리 언론사에서 민족지란 존재할 수 없게 되었다.



물론 이들 신문이 처음부터 친일을 목적으로 했던 것은 아니며 다만 시기적으로 상황에 편승하면서 점차 변절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처럼 변절의 길을 걷기 시작해 나중에는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버금갈 정도의 친일 논조를 폈지만, 당시 총독부의 창씨개명, 조선어 말살 등 황국신민화 정책과 전시하의 물자절약 차원에서 1940년 8월 10일 강제 폐간 당했다.



이와 때를 같이 해 방응모도 시국강연회 등 친일행사에 참여하기 시작했으며, 1935년에는 철저한 친일 잡지인 조광을 창간해 본격적인 친일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특히 조선일보가 동아일보와 함께 총독부에 의해 강제 폐간되던 무렵부터는 조광의 권두언 등을 통해 일본을 찬양하는 글을 서슴지 않고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전술한 <2천6백년의 기원절>(조광 1940. 3월호)을 비롯하여 <지나사변(支那事變) 3주년>(조광 1940. 7월호) <조광사 혁신의 사>(조광 1940. 10월호) 등이다. 창간 5주년 기념사에서 그는 "뒤를 이어 소화(昭和) 12년 7월에는 동아(東亞) 신질서 건설사업인 제2차 구주(歐洲) 대전쟁이 발발(勃發)되어 세계신질서 건설은 지금 일(日), 독(獨), 이(伊) 3국에 의하여 용감하게 진전되고 있습니다"는 말로 세계정세를 전제한 뒤 "밖으로는 혁신 외교 정책을 강행하여 하루바삐 동아신질서 건설을 완성시켜서 세계의 신질서를 건설하고 한 걸음 나아가서 세계 영구평화를 기도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습니다. 국민은 모름지기 이선에 따라 행동하고 생활하고 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조광 1940. 11월호)"라고 일제에 협력할 것을 호소하기도 했다.



이어 <지나사변 4주년>이라는 제목 하에 실린 권두언에서는 "우리는 이 의의 깊은 날을 맞이함에 있어 먼저 이 성전의 초석이 되어 전장의 꽃으로 사라진 황군 장병의 영령에 대하여 삼가 그 명복을 비는 바이거니와 이들에게 동아신질서의 완성의 우렁찬 고종(告鍾) 소리를 들려줄 날도 반드시 먼 장래의 일은 아닐 것이다. 과거 4년간 황군의 가는 곳엔 실로 글자 그대로 적이 없었다"고 일본 군국주의의 세계침략전쟁을 적극 찬양하면서 "우리에게는 사태가 악화되면 악화되는 데 따라 거기에 상응한 준비가 있다. 이로써 어떠한 방해가 온단들 조금도 괘념할 필요가 없다. 더구나 제국의 운명을 도(睹)하고 있는 이 성업(聖業)에 있어 어찌 한 걸음인들 후퇴할 것인가. 다만 우리의 물심양방면(物心兩方面)으로부터의 총력전 준비에 있다. (조광 1941.7월호)"고 국민 모두가 일본 전쟁 수행에 적극 동참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그 외에도 <타도! 동양의 원구자>(조광 1942. 2월호), <일미(日米) 회담>, <징병제 실시에 감사합시다>, <극동위기설과 국민의 각오>, <해군 특별 지원병제의 광영>, <대동아 전쟁의 성전의식> 등 조광을 통해 발표한 권두언과 논설들에서 방응모는 자신의 친일 성향을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을 뿐 아니라 징병제를 적극 지지하는 글을 앞다투어 발표하기도 했다.



특히 <시정(始政) 31주년>이라는 제목으로 씌어진 권두문에서는 "회고하건데 지금으로부터 만 31년 전 동아의 정국은 실로 난마와 같이 흩어져 구한국의 운명이 또한 위급존망지추(危急存亡之秋)에 있었다. 이때 명치 43년(1910년) 8월 29일 일한 양국은 드디어 양국의 행복과 동양영원의 평화를 위하여 양국 합병의 조약을 체결하였다.



그간 역대 조선총독은 선정(善政)을 하여 금일과 같이 경제, 산업, 교육 등 일반 문화 향상에 자(資)한 바 컸다"고 소위 한일합방을 구국의 결단이라 극찬하는 한편, 조선사람들의 생활을 질적으로 향상시키는 선정을 베풀었다고 그가 추켜세운 미나미(南) 조선총독의 <시정 31주년 기념일에 즈음하여(日文)>라는 기념사를 함께 게재하기도 했다.



- 친일어용단체 가입, 전비 마련과 징병 권유에 적극 활동 : 방응모는 자신이 발행하고 있는 월간지의 권두언 등을 통해 시종일관 친일적인 논조를 펼쳤으며, 김활란(金活蘭), 주요한, 서춘(徐椿) 등 친일 지식인들을 등장시켜 조광 구석구석을 친일파의 글로 채웠다.



중일전쟁 확대로 일본이 본격적인 전시 체제에 돌입한 해인 1938년부터 그는 동아일보 사장 백관수(白寬洙) 등과 함께 총독부 학무국에서 결성한 제2차 전선순회 시국강연반에 동원돼 ´조선명사 59인 각도 순회강연´을 다니면서 일본이 수행하는 전쟁에 전국민이 동참할 것을 호소하기도 했으며, 같은 해에 경기관내 시국 강연인 순회연사 좌담회에 참석해 국민지도 문제에 관한 의견을 교환하기도 했다.



또한 당시 조선반도에서 국어(일본어) 보급률이 식민지인 대만에 비해 뒤떨어진다며 전국적으로 일어상용운동을 전개하자고 주창하기도 했다. 그 외에 1943년 11월14일에는 조선문인보국회 산하 10개 잡지사의 하나로서 ´출전학도 격려대회´를 주최하기도 했으며, 자신의 사재를 출자해 고사포(高射砲)를 구입하여 일본군에 기증해 일본을 향한 열렬한 충성심을 보여 주었는가 하면 비행기 제조 전쟁조력업체였던 조선항공공업주식회사에 자본을 출하해 중역으로 피선되기도 했다.



또한 일본의 총력 운동 단체와 국방 목적 단체 중 하나로 1937년 8월 20일 결성된 애국금채회(愛國金釵會)에 백관수, 이상협(李相協) 등 15인과 함께 발기인으로 참여해 황군 원호와 전비 마련을 위한 활동을 전개하기도 했으며, 1938년 6월 22일에는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의 발기인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일본은 중일전쟁이 장기화되고 미·일 관계에 틈이 벌어지자 종래의 전시 체제를 한층 공고한 결전 체제로 강화하기 위해 사상통일, 국민총동원, 생산력 확충 등을 주요 목적으로 하는 고도 국방국가건설을 달성해야 했다. 그래서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을 해체하고 이를 국민총력조선연맹으로 재출발시켰다.



이에 따라 방응모도 이 단체의 참사로 참여하게 되었으며, 일본은 이 조직을 통해 황국신민정신의 앙양, 징병, 학병의 독려, 증산, 헌금과 공출, 군인원호 등의 총력 운동을 전개했다. 이어 1941년 8월에는 ´삼천리´ 사장 김동환의 발기에 의해 자발적으로 결성된 임전(臨戰)대책협의회 위원으로 참여, 종로 화신 앞에서 김동환, 모윤숙, 이광수, 윤치호 등과 전쟁 비용 조달을 위한 채권가두유격대로 나서기도 했다.



비슷한 시기에 임전대책협의회에 윤치호 등이 주축이 되어 흥아보국단 준비위원회가 구성되자 국민총력조선연맹 사무국 총장 기와기시(內岸文三郞)가 두 단체 통합을 주선해 1941년 10월 22일 조선임전보국단(朝鮮臨戰報國團)이라는 명칭으로 친일세력을 총망라한 단체가 출범을 맞게 되며 방응모 또한 이 단체의 이사로 참여했다.



- 친일은 과거의 일, 건국대업완성에 기여하자 : 이처럼 일제가 강행한 총력 운동의 한 부분으로서 교화 정책의 하수인 역할을 충실히 해낸 방응모는 일본이 패망한 후 다시 조선일보사의 사주로서 일제에 의해 폐간되었던 조선일보를 1945년 11월 23일자로 속간하였고 그의 속간사는 다음과 같다.



´우리는 더퍼노코 ´황국신민´이 되라는 강잉을 바덧스며 징병으로 징용으로 공출로 전쟁에 철저협력하라는 호령을 듯고 볼 뿐이엿다. 우리는 입을 가젓스나 생벙어리 행세를 하여야 하엿스며 할 말은 만헛스나 호소할 곳이 업섯다. 우리는 죽으라면 말업시 죽는 시늉을 하지 안흐면 안 될 환경에 노혀 잇섯다. 굴근 철쇄(鐵鎖)로 억매이고 날카로운 총검밋테 떨허 오직 노예적 굴종을 하지 않흐면 안 되엇섯다. 확실히 총독정치 36년간에 이 기간가치 언론이 구속된 때는 업다고 단언할 수 있다.´



그는 이와 같은 말로 일제 치하에서 자신의 친일행위가 놓여진 환경에 의해 어쩔 수 없었던 것임을 피력하며 그러나 이는 모두 과거의 일이니 언론의 자유를 회복하고 붓을 다시 들어 건국 대업 완성에 기여해 우리의 나아갈 길을 밝히겠다고 다짐하기에 이른다.



해방 정국에서 민족정기를 회복하려던 가장 큰 움직임인 ´반민족행위 처벌법´이 친일 세력에 의해 폐기되면서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을 기회가 전혀 없었던 것은 언론계 또한 마찬가지였다. 일제에 빌붙었던 친일 언론인 대다수가 해방 이후 다시 문단과 언론계의 주역으로 활동을 재개하던 당시, 방응모도 이전의 자기 자리로 되돌아가 황국신민으로서 해야 할 바를 써내려 가던 펜으로 다시 대한민국의 건국대업 완성을 호소하는 재빠른 처세술을 보여 주었다.



자기 변명도 섞인 듯한 속간사 이외에는 단 한 줄의 사과문도 발표하지 않았으며, 자신의 친일행적에 대한 어떠한 문책도 받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그는 해방 이후 특별한 활동 없이 조선일보 사주로 있다가 한국전쟁 중인 1950년 7월 6일 공산군에게 납북당한 뒤 소식이 없다.





<인용저서>

·반민족문제연구소 지음(저술자: 문영숙 반민족문제연구소 연구원), <청산하지 못한 역사 ② 한국현대사를 움직인 친일파 60>, 227∼235쪽

·김학민·정운현 엮음, <친일파 죄상기>, ´민족정기의 심판´(33, 39, 53쪽), ´친일파 군상´( 381, 427, 448, 454, 464쪽)

·반민족문제연구소 엮음, <친일파 99인③ 분야별 주요인물의 친일이력서>, 부록2·일제하 친일단체 및 소속 주요인명록, 267∼269쪽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편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제9권 269∼270쪽

·조광 1940∼1944년 』



(자료출처 = 미디어 오늘 2002년 3월7일자)







[사설] 역사를 더럽히는 벌거벗은 장사꾼들(조선일보 2004년 2월14일자)







탤런트 이승연씨가 ‘일본군 위안부’를 소재로 누드 사진을 찍어 인터넷과 휴대전화 영상으로 팔겠다고 나선 것은 아무리 봐도 제정신에서 한 일은 아닐 것이다. 그게 제정신에서 벌인 일이라면 그 ‘제정신’은 보통사람의 ‘정신 나간 정신’과 같은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위안부로 끌려갔던 할머니들이 몇 년째 일본대사관 앞에서 피맺힌 시위를 계속하고 있는 마당에 어떻게 이런 발상을 할 수 있었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생각해 보라. 이스라엘 여배우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벌거벗고 찍은 사진으로 장사를 하겠다고 나서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뭐라고 하겠는가.



이승연씨와 기획사측은 대규모 기자회견까지 열어 “종군위안부 문제가 잊혀지는 것이 안타까워서 기획했다”고 밝혔다 한다. 입에서 나오기만 하면 다 말이 되는 줄 아는 모양이다. “종군위안부가 여성의 성(性)을 상품으로 생각하게 만든 원흉”이라고도 했다. 벌거벗은 사진 한 번 접속하는 데 1000원 안팎씩 받아 청소년들의 푼돈을 우려내려 하면서 무슨 뒷말이 이리 많은가.



이미 10여명의 여자 연예인들이 앞다퉈 벌거벗은 사진을 팔아 몇 억, 몇 십억을 벌어들였다. 탱크로 정권을 잡은 세력들이 유일하게 백성이 숨 쉴 공간으로 음란물에 관대했던 암울했던 그 시절보다 지금이 오히려 더 병들고 더 황폐한 사회가 돼버렸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공영’이라는 명찰을 붙인 TV들이 시청자 눈길을 끌기 위해 누드 장사로 지명도를 쌓은 연예인들을 드라마와 프로그램에 잇따라 기용하고 있는 것을 보면 이 나라가 정신이 제대로 된 나라라고는 도저히 볼 수가 없다.



황폐한 나라, 뒤집힌 사회에서 국민이 제정신을 지키려면 결국 자신이 절제하는 수밖에 없다. 천박한 누드 상품을 더 이상 사지 않는 소비자들의 단호함만이 이 부끄러운 악순환의 고리를 끊을 수 있다. 입력 : 2004.02.13 18:17 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