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www.chosun.com/w21data/html/news/200402/200402030245.html
속(續) 어느 여자 화가의 삶
박경란씨, 수백억대 남편 유작 안팔고 교사월급으로 생활
"작품은 공유해야"…유학하는 딸도 알바로 생활비 조달
요즘 인터넷상의 교사들 모임에서는 어김없이 미술 교사 박경란씨에 대한 이야기가 화제에 오른다. 화가 고(故) 박길웅씨의 아내인 그녀는 생활이 어려운데도 수백억원에 이르는 남편의 작품들을 미술관에 선뜻 내놓았다. 모든 것을 내준 그녀는 이번에는 학생들의 학습권을 지켜야 한다며 교단의 ‘투사’가 되었다.
소설가 서영은씨는 이같은 그녀의 이야기를 지난달 20일 조선일보 칼럼 ‘차 한잔 마시며’에 소개해 큰 화제를 뿌렸다. 칼럼이 게재된 후 “올바른 정신과 도리를 지켜살고자 하는 분의 애달픈 이야기”, “교사로서 그 분 심정이 너무나 처절해 가슴에 통증이 전해진다”, “어떤 분인지 만나보고 싶다”는 등의 독자 반응이 쏟아지기도 했다.
그녀는 요새로선 드물게 휴대폰을 갖고 있지 않았다. 모든 연락은 집 전화로만 할 것이며, 그나마 집은 자주 비운다고 했다. 급한 볼 일이 생겼지만 연락할 방법이 없어, 약속 장소로 나가는 수 밖에 없었다. 참으로 편리한 ‘강제’가 아닐 수 없다. 박씨는 “휴대폰은 내게는 일종의 사치품”이라고 말했다. 지난달 29일 국민대학교에서 그녀를 만났다.
박씨는 이날 대학교에서 교원 연수를 받고 있었다. 그녀는 대학 매점에 화장기 하나 없는 맨 얼굴에, 두꺼운 스웨터 차림으로 나타났다. 화가의 ‘아내’는 오랜 세월 시어머니와 딸의 부양을 책임졌다. 빠듯한 교사 월급이 수입의 전부였다. 마흔이 넘어서야 25평짜리 주공아파트를 제 힘으로 마련할 수 있었다. 박씨는 지금껏 신용카드도 휴대폰도 없다.
박경란씨는 지금껏 아홉번의 전시회를 열었고 33년동안 학교에서 미술을 가르쳤다. 그녀의 남편 박길웅씨는 1969년 국전(國展)에서 비구상화(추상화)로는 최초로 대통령상을 수상한 화가다. 한국 미술사에서 비구상화 시대의 문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는 그는 수많은 걸작들을 남기고 37세로 요절했다. 그녀가 스물아홉살 때였다.
그녀의 남편은 생전에 그림을 팔지 않았다. 그래서 궁핍한 생활 속에서도 그녀는 그림을 팔지 않았다. 장례식이 끝나자마자, 미술상들이 몰려왔다. 미술상들은 그림 한 장에 집 한 채 값을 불렀다. 박씨는 고집을 피웠다. 그녀는 “처음에는 오로지 남편 뜻 때문에, 나중에는 ‘그림은 모든 사람이 함께 해야 한다’는 남편의 뜻을 이해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남편이 사망한 1977년 이후 주변 사람들은 그녀를 끊임없이 설득했다. ‘그림 한 장만 팔아 딸 공부라도 시키라’는 얘기였다. 남편의 화실에는 유화, 판화, 드로잉까지 합쳐 1000여점의 그림이 고스란히 보관돼 있었다. 지난 1984년 박씨는 남편의 주요 작품 80점을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하고 나머지는 미술관에 보관을 맡겼다.
박씨는 하나 뿐인 딸에게 “우리가 물려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정신’ 뿐이다. 그 ‘정신’으로 어떻게 해나갈지는 네가 스스로 결정해라”고 말했다고 한다. 미국 컬럼비아 대학원에서 박물관 관리학을 전공하고 있는 딸은 전화교환원 등 닥치는대로 아르바이트를 해야 했다. 박씨는 딸에게 용돈이라도 보내기 위해 택시 한 번 타 본 적이 없다고 했다.
박씨는 여러 번 남편과의 짧은 시간들을 떠올렸다. 그를 처음 알게 된 것은 1969년이었다고 한다.
“그 때는 국가에 큰 일이 있으면 신문사에서 비행기로 ‘삐라’를 뿌렸어요. 어느날 서울 상도동 집 마당에 서 있는데 ‘삐라’가 날아와요. 박길웅 화가가 대통령상을 탔다면서, 예술에 개혁이 일어났다고 하더군요. 스무살 밖에 안된 전 그걸 보고 ‘이 사람이랑 결혼해야지’ 생각했지요.”
그녀는 대학 지도교수를 졸라 박길웅씨를 만날 수 있었고 그들은 1976년 인사동 양지화랑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남편의 열번째 개인전 자리에서였다. 그녀는 간소한 드레스만 입었고 부케 대신 자잘한 국화꽃을 머리에 달았다. 박씨는 “단 하루를 살아도 이 무뚝뚝하고 말 없는 남자와 살고 싶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남편은 이듬해 작업중 갑자기 쓰러졌다. 간암이었다.
박씨는 시어머니와 딸과 함께 세상에 남겨졌다. 미처 혼인 신고도 하지 못했다. 박씨는 “남편이 사망한 뒤 신문기사들을 오려 동사무소에 찾아갔다”고 말했다. 그들의 결혼과 출산, 남편의 사망 소식이 고스란히 신문에 보도됐던 것. 결국 3주 사이에 결혼, 출산, 사망신고가 이뤄졌다. 박씨는 “남편의 삶을 이해하기 위해” 잠시 손을 놓았던 그림을 잡았다고 한다.
그녀는 “그림을 그리면서, 남편이 왜 그렇게 전시회 때마다 자신의 그림에다 ‘비매(非賣)’ 딱지를 붙였는지 알 수 있었다”고 했다. 그림은 어느 한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닌, 모든 사람이 공유(共有)하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 그 사이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 지난 1996년에는 남편 없이 21년동안 모셔온 시어머니도 눈을 감았다.
이제 그녀는 “딸과 자신을 위해서만 살 수 있게” 되었다. 1998년 박씨는 서울 시내 어느 실업계 학교로 옮겼다. 그녀의 담당과목은 디자인이었다. 전공 분야가 아니었기에 학생들을 가르치기 위해 학원에서 전문디자인을 공부했다. 디자인을 배우려고 창작도 접었다. 그런데 이해 못할 일이 벌어졌다. 2002년 교과과정이 갑자기 수정된 것이다.
디자인 과목이 절반이나 줄고, 상업과목으로 대치됐다. 디자인학과 학생을 선발해놓고, 디자인 과목 보다는 다른 교과목을 많이 가르치게 된 것이었다. 그녀는 교권(敎權)과 학생들의 학습권을 지키기 위해 학교 측에 수없이 정정을 요구했다고 한다. 그녀는 이 문제에 대해 “가뜩이나 어려운 실업계 고교에 짐을 얹기 싫다”며 극도로 말을 아꼈다.
박씨는 현재 교육부에 진정서를, 학생들을 대신하여 경찰서에 고소 고발장을 낸 상태다. 그녀는 “모든 것은 교육부가 학생 중심에서 판단해주리라 믿는다”고 말했다. 그녀는 “내가 딸아이한테 ‘강요’ 했듯이, 우리 학생들에게도 진정 참된 교육을 주고 싶다”고 말했다. 그리고는 “잠시 빠져나온” 교원 연수를 받기 위해 국민대학교 건물 안으로 총총히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