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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사설] 가난한 집 자녀만 멍들게 한 평준화 에 대해서

조선 [사설] 가난한 집 자녀만 멍들게 한 평준화 에 대해서











(홍재희) ======== 방상훈의 세습족벌사주체제인 조선일보 사설은





" ‘누가 서울대에 들어오는가’라는 서울대 사회과학연구원의 보고서는 지금의 입시제도와 교육시스템으론 가난한 집 아이들이 아무리 노력해도 경쟁에서 살아남기 힘들다는 사실을 보여줬다. 입시 경쟁이 학교 교실이 아닌 학원 강의실에서 결판나고 있기 때문이다. 좋은 학원을 다닐 돈이 없으면 아예 경쟁이 되지 않는 것이다. "








(홍재희) ======= 라고 주장하고 있다. 조선사설은 지금의 입시제도와 교육시스템으로는 가난한 집 아이들이 아무리 노력해도 경쟁에서 살아남기 힘들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가난한 집아이와 부자집아이가 처음부터 타고난 천부적 능력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 교육여건의 불평등한 접근과정 속에서 파생된 현상이라면 그것은 능력의 차이가 아닌 일종의 차별 행위이다. 이러한 차별행위는 조선사설의 주장대로 교육을 시장경쟁의 논리로 접근한다고 해도 차별을 통한 불공정행위를 극복하는 제도적 정치를 마련하면 된다. 조선사설은 그런 대안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다.














(홍재희) ====== 조선사설은 교육하면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의 경쟁력 있는 교육정책을 예로 들고 있는데 조선일보가 떠받들고 있는 는 미국에는 차별 때문에 피해를 입는 소수계층들에게 주류사회에 진출할 수 있는 사다리 역할을 하는 어퍼머티브 액션(Affirmative Action) 정책을 통해 흑인. 여성 . 히스패닉계등 이 차별을 극복하고 미국의 주류사회에 진출할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어퍼머티브 액션(Affirmative Action) = 차별대우를 받는 집단이 종래 받아온 차별로 말미암아 다른 집단에 비해서 현저하게 불평등한 상태에 놓인 경우에 그 격차를 신속하게 시정하기 위해 취하는 적극적인 우대조치. 정부기관이나 민간기업에서 일정한 비율의 흑인과 여성을 고용하도록 하는 할당제(quota system) 가 주요시책이다.』


(자료출처 = 현대지식정보사전 COKID 2000)








(홍재희) ======= 조선사설이 `지금의 입시제도와 교육시스템으론 가난한 집 아이들이 아무리 노력해도 경쟁에서 살아남기 힘들다는 사실을 보여줬다.` 는 사실 앞에 진심으로 고민하고 있다면 제도적 보완책을 통해 그러한 문제점들이 극복되기 이전인 이시점에서 단기적인 대책으로 가난하지만 우수한 학생들이 어퍼머티브 액션(Affirmative Action) 정책이라는 사다리를 통해 서울대학교에 들어갈 수 있는 법적 제도적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 바람직한 언론의 역할이 아닐까?











(홍재희) ======= 조선사설은





" 이런 불평등은 모든 경쟁이 학교의 울타리 안에서 이뤄지도록 해야만 바꿔놓을 수 있다. 무엇보다 학교의 학습 분위기가 학원 못지 않게 진지해야 하고 학원 못지 않게 자신의 학습능력에 어울리는 질 좋은 수업을 들을 수 있어야 한다. "








(홍재희) ======= 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조선사설은 학교의 울타리 밖에서 불법적으로 행해지고 있는 학원이나 고액과외의 정당성을 옹호하며 그들 집단의 조선일보에 대한 광고물량에 군침을 흘리고 있는 현실 또한 무시할 수 없는 현실이 아닌가? 이러한 조선사설의 비교육적인 논조는 공교육의 내실화를 위한 기여보다는 사교육을 정당화 시켜 독자들을 상대로 오히려 공교육에 대한 불신을 초래해 사교육에 대한 중독현상을 심화 시킬 뿐이라고 본다.











(홍재희) ======== 조선사설은





" 이건 인수분해도 못 하는 아이와 미·적분까지 마스터 한 아이를 한 교실에 나란히 앉혀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수업을 이해 못한다는 고교생이 18%, 의욕을 상실했다는 대답이 16%, 마지못해 수업에 참여하고 있다는 학생이 24%에 달하는(교육개발원 설문조사) 지금의 공교육으로는 사교육을 대신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선 경쟁의 승부가 학교 밖 학원에서 결정될 수밖에 없다. 그 결과 가난한 학생들은 경쟁의 대열에서 밀려나게 되는 것이다. "








(홍재희) ====== 라고 주장하고 있다. 조선사설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아무리 좋은 교육정책을 추진하고 있는 국가나 학교가 학생들에게 제공하고 있는 교육도 대상학생들중에 수업을 이해 못하는 학생은 나올 수 있고 또 의욕을 상실했다는 학생들이 나올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현행 공교육의 부실한 제공을 통해서만 파생되는 특수한 현상이나 되는 듯이 몰고 가는 조선사설의 행태는 문제의 본질을 벗어난 기회주의적인 접근방법이라고 볼 수 있다. 조선사설의 주장은 부실한 공교육을 보완하기 위한 학교 밖의 학원에서 결정이 된다고 강조하고 있는데 고액학원에 갈 수 없는 가난한 학생들이 경쟁에서 밀려나게 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홍재희) ====== 그러나 조선사설이 한가지 간과하고 있는 점이 있다. 가난한 학생들을 물리치고 서울대에 들어간 학생들이 지난 30여년 동안 기초학문분야나 다른 실용적인 학문적 접근을 통해서 과연 열린 지구촌 시대가 요청하고 있는 인재로서 바람직하게 성장해 한국사회와 세계를 위해 어느정도 기여했느냐 라는 질문에 대해서 자신있는 답변을 내놓지 못하고 있는 조선일보를 보면 조선사설이 입에 침이 마르도록 강조하고 있는 학교 밖의 학원교육이 우물안식의 서울대 입시에 변칙적으로 불공정하게 경쟁해서 들어가는 데에는 유리한 측면은 있어도 열린 지구촌시대에 경쟁력 있는 인재를 양성하는 데에는 실패해 오히려 변칙경쟁에서 뒤처졌던 가난한 학생들 보다 경쟁력 있게 개방된 사회 체제속에서 지구촌을 누비며 크게 기여하고 있다는 아무런 객관적 근거도 없다는 점을 조선일보는 간과하고 있다.











(홍재희) ======= 조선사설은





" 현재도 비슷한 실력의 학생들을 한데 모아 가르치는 수준별 학습을 권장하고 있다고는 한다. 하지만 여건이 낫다는 서울에서도 수준별 이동수업이 부분적으로라도 이뤄지는 비율은 20%를 간신히 넘기고 있다. 교실과 교재가 모자라고, 교사는 귀찮아 하고, 학생과 학부모는 학습능력의 차이를 차별이라고 싫어하기 때문이다. 차이와 차별을 구분 못하는 운동권적 구태(舊態)에 학부모와 학생들까지 오염된 것이다. 결국 학교는 잠자는 곳이 돼 버리고 돈 있는 집 아이들만이 저녁에 비싼 돈 내고 학원을 찾아가는 악순환이 되풀이될 뿐이다. "














(홍재희) ======= 라고 주장하고 있다. 단순히 기능적인 측면의 성적순으로 우열을 가리는 분류방식은 올바른 교육의 접근으로 볼 수 없다. 특히 입시위주의 시각에서 그런 접근을 하고 있다면 더더욱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지금까지 그러한 분류방식에 의해서 학생들을 서열화하고 대학의 경우도 서울대학을 정점으로 해서 연 . 고대 등으로 줄을 세워놓고 서열화 해놓고 입시위주의 주입식 교육에 치중했기 때문에 조선일보가 지적하고 있는 기초학문분야에서 지금까지 대한민국의 대학출신 학자들이 노벨상 한번 수상하지 못한 황폐한 교육현실을 고착화 시켰다고 본다.














(홍재희) ====== 조선사설은 그러한 고착화된 교육현실을 지금 옹호하고 있다. 이동수업의 교육적 효과를 살리려면 학생개개인의 개성과 적성에 맞는 분류법을 통해 학문연구의 집중도와 심층성 그리고 효율성을 높일 수 있는 측면에서 학생들을 분류해서 이동식 수업을 해야 한다고 본다. 그렇지 않고 입시위주의 우열반을 편성하는 것은 지금까지와 같은 오류를 재현하는 것 이상의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본다. 조선사설은 그러한 방법이 치열한 국제경쟁에서 다른 국가를 앞지르는 방법으로 착각하고 있지만 그러한 방법이 지금까지 한국의 교육을 수십년 뒤로 후퇴시켰다는 점을 조선사설은 지금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조선사설은 교육의 본질에 대해서 지금 잘못이해하고 있다.














(홍재희) ======= 조선사설은





" 서울대 사회과학연구원의 보고서는 “평준화로 인해 우수학생만 따로 모아 차별적으로 교육할 수 없게 되면서 저소득층 학생의 일류대 진학이 어려워졌다”고 밝혔다. 그런데도 교육부총리는 “평준화를 하지 않았다면 사교육이 더 기승을 부렸을 가능성이 크다”고 하고, 서울시 교육감은 평준화 철폐는 잘 사는 특권층을 위한 것이라는 궤변을 늘어놓는 실정이다. "











(홍재희) ======= 라고 주장하고 있다. `평준화로 인해 우수학생만 따로 모아 차별적으로 교육할 수 없게 되면서 저소득층 학생의 일류대 진학이 어려워졌다` 라고 주장하고 있는 서울대 사회과학연구원의 보고서와 조선사설의 주장에 대해서 동의하지 않는다. 서울대 사회과학연구원의 보고서와 조선사설의 주장이 설득력이 있으려면





" 1990년대에 전북·강원 등 전국 40% 지역이 비평준화로 돌아섰지만, 서울대 진학률은 오히려 떨어지고 사교육 문제는 더욱 악화했다. 이런 상황에서 평준화 이전으로 돌아가 중·고등학교까지 서열화한다면 훨씬 더 많은 사교육비가 개인에게 전가될 게 불을 보듯 뻔하다. "








(홍재희) ====== 라고 제기하고 있는 반론에 대해서 설득력 있는 답변을 해야할 것이다. 문제는 조선사설의 주장과 같이 고교평준화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한국의 교육풍토에 있다는 점이다. 조선일보는 그 점에 대해서 혼돈을 보여주고 있다.








『‘학벌대물림’ 평준화탓인가





지난 25일 서울대 사회과학연구원이 지난 34년 동안 신입생들의 ‘배경’을 분석해 발표한 연구자료(<한겨레> 26일치 9면)가 난데없는 평준화 폐지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 연구팀이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그 연구자료는 “평준화와 쉬운 입시문제가 오히려 부유층의 서울대 진학 증가를 초래했다”는 식의 평준화 폐지론 쪽에 무게를 실은 것으로 비쳐졌다. 일부 언론들도 덩달아 ‘평준화가 학력 세습 불러’ 등의 선정적인 제목을 달아가며 평준화 문제점을 부각시키기에 나섰다.


하지만 저소득층이 서울대에 가기 힘든 것이 고교 평준화 때문이라는 주장은 입증된 바 없다. 오히려 문제의 원인은 사교육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입시제도이며, 좀더 근본적으로는 일류대학을 나와야 출세할 수 있다는 ‘학벌사회’에 있다는 지적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실제로 1990년대에 전북·강원 등 전국 40% 지역이 비평준화로 돌아섰지만, 서울대 진학률은 오히려 떨어지고 사교육 문제는 더욱 악화했다. 이런 상황에서 평준화 이전으로 돌아가 중·고등학교까지 서열화한다면 훨씬 더 많은 사교육비가 개인에게 전가될 게 불을 보듯 뻔하다.





서울대 본부 쪽은 이날 “연구자료에 대해 언론이 어떤 관점으로 해석하더라도 문제제기나 항의를 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발표했다. 평준화를 교육 문제의 주범으로 여기는, 검증되지 않은 연구팀의 해석에 언론의 견강부회식 풀이까지 덧붙여지는 마당에 왜 이런 아리송한 입장을 내놓았는지 모를 일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고교 평준화에 대한 괜한 시비가 아니라, 사교육을 받지 않고는 ‘일류대’에 들어가기 힘든 현행 입시제도에 대한 대안을 찾는 일이다. 서열화한 대학들 맨 앞에 자리잡은 서울대는 “대학 서열화 해소방안을 마련하는 데 머리를 써야 한다”는 지적에 귀 기울여야 한다. 그것이 ‘국립 서울대’가 할 일이다.


이지은 기자 jieuny@hani.co.kr http://www.hani.co.kr/section』


(자료출처 = 인터넷 한겨레 2004년 1월 26일자)














(홍재희) ======= 조선사설은





" 정답 찾아내는 기술자로 만드는 과외 교육에 길들여진 아이들이 창의력과 자생력을 가질 리 만무하다. 이런 사교육에 GDP의 3%인 13조6000억원을 쏟아붓는 밑빠진 시루 같은 교육투자로는 미래를 향한 지적(知的) 경쟁에서 우리 아이들과 우리나라를 낙오하게 만들 뿐인 것이다. "








(홍재희) ======= 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렇다 현재와 같은 입시위주의 공교육은 전면 재편돼야한다. 치열한 경쟁을 부추기면서 21세기가 요구하고 있는 인재 양성에는 실패하고 서울대에 입학하는 쓸모 없는 기능만을 습득시키는 낭비적인 교육은 이제 바꿔나가야 한다. 서울대를 지향하는 교육이 얼마나 원시적인 동물농장 식의 우열을 가리는 승패게임에 불과하다는 점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홍재희) ====== 조선사설의 주장대로 정답 찾아내는 기술자로 만드는 공교육과 학교울타리 밖의 학원교육을 통해 대한민국 특유의 폐쇄적인 방식으로 서열화된 서울대 연 . 고대 에 들어가는 입시교육을 통해서는 기초학문연구발전은 기대하기 힘들고 우수한 학문적 업적이 축적된 가운데 세계적인 평가를 통해서 수여 받는 노벨상을 수상하기는 더더욱 불가능하다. 조선일보 의 접근방식 과 서울대 식의 교육방식에서 하루속히 이탈하는 것이 한국교육이 살 수 있는 길이라고 본다. 그러한 발상의 전환 없이 GDP의 3%인 13조6000억원을 쏟아붓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홍재희) ====== 조선사설은





" 야간에 학원과 과외를 기습 단속하는 기상천외의 쇼적(的) 행정만으론 아무 것도 바꿔놓을 수가 없다. 사교육에 의존할 수밖에 없게 만든 공교육 붕괴의 근본 대책을 찾아야지 공권력을 동원해 사교육을 때려잡는다고 될 일이 아닌 것이다. "








(홍재희) ======= 라고 주장하고 있다. 조선사설은 지금 불법행위를 두둔하며 정당화 하고 있다. 불법과외와 고액과외는 실정법대로 엄중단속 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데 이러한 불법단속행위를 마치 `쇼` 로 회화화 하고 학원과 과외활동을 정상적인 역할을 하며 핍박 받는것으로 상징조작하고 있는 논조를 보면 조선 사설을 작성한 사람의 자녀나 친인척들이 필경 학원교육이나 과외에 수 . 혜택을 받고 있는 이해관계에 얽혀 있다는 점을 유추할 수 있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본다. 조선일보가 불법과외를 하고 있는 학원단속에 대해서 비판적으로 나오는 것을 보면 이들 학원들로부터 조선일보가 거둬들이는 광고물량도 상당수에 이르고 있지 않나 하는 강한 의문을 언론소비자의 입장에서 강하게 제기해 본다.














(홍재희) ====== 조선사설은





" 가난한 아이, 불우한 집안 사정의 아이들에게도 자신의 힘으로 향상(向上)의 사다리를 올라갈 수 있는 희망을 주기 위해선 게임의 규칙을 바꾸는 수밖에 없다. 그것은 천차만별의 학생들에게, 집안 사정의 낫고 못하고가 아니라 저마다의 학습능력과 학습의욕에 따라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교실 안에서 제공하는 것이다. 이것을 우열반(優劣班)이라고 부르고 바라보는 사회주의적 잘못된 평등관을 청산해야 한다. "











(홍재희) ======= 라고 주장하고 있다. 대안을 제시하겠다. 장기적으로 대학의 서열화를 폐지해야 한다. 대학은 학생들의 성적의 우열을 가려 등수에 따라 서열을 정하는 곳이 아닌 학생 자신의 적성에 맞는 학문적 연구에 충실하는 곳이다. 단기적으로 현행 서울대의 입학정원을 4배로 늘려서 조선일보가 애처로워하고 있는 불우한 집안사정으로 해서 자신의 힘으로 향상(向上)의 사다리를 올라갈 수 있는 희망을 가지지 못한 학생들에게 사다리 역할을 하면 된다고 본다. 반면에 졸업정원을 엄격하게 지금보다 절반으로 줄이는 획기적인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홍재희) ===== 조선사설은 사회주의적 잘못된 평등관을 청산해야 한다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조선사설은 어제 사설을 통해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의 평등관에 입각한 교육정책에 대해서





"14억 인구의 중국은 4000만이 넘는다는 대졸(大卒) 인력이 예비군처럼 연구개발과 산업현장에 투입될 날을 기다리고 있다"








라고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 중국의 사회주의 교육체계의 장점을 입에 침이 마르도록 인용하며 따라 배우라고 해놓고 오늘자 조선 사설은 사회주의적인 평등관을 비판하고 있다. 조선사설이 어제 다르고 오늘 다른 좌충우돌 식의 교육관련 사설이야말로 한국교육을 망치는 나팔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홍재희) ======== 조선사설은








" 그러자면 재능과 개성을 살려나가는 사학의 의욕도 북돋워주고 지원해 주어야 한다. 양심 있고 정직한 교육자와 교육행정가라면, 고교 평준화와 변별력 없는 수능시험이 저소득층 학생들에게서 기회를 빼앗고 과외에 돈을 쏟아부을 수 있는 고소득층 자녀만을 유리하게 만들었다는 명백한 증거 앞에, 겸허하게 자신의 말과 행동을 뉘우쳐야 마땅한 것이다. "








(홍재희) ===== 라고 주장하고 있다, 한국의 사학은 자율적인 교육을 할수 있는 자질보다는 먼저 사학재단의 투명한 운영을 통해 교육소비계층의 사학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조선사설은 그 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나? 지금과 같은 치열한 입시제도를 유지하고 대학의 서열화를 유지하면서는 고교평준화나 비평준화등 모든 교육정책이 왜곡될 수밖에 없다. 교육의 황폐화를 극복할 수 없다.














(홍재희) ====== 조선사설은





" 가난한 집 아이가 제대로 된 교육을 못 받고, 경쟁에서 탈락해 다시 가난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현재의 평준화 제도는 이제 폐기처분할 때가 됐다. 자신들의 정치적 이념에 눈 먼 나머지 가난한 집안의 아이들에게 향상과 발전의 사다리를 앗아가는 것은 죄악(罪惡)을 범하는 것일 뿐이다. "











(홍재희) ======= 라고 주장하고 있다. 가난한 집 아이가 학원교육을 받지 못해 서울대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해서 가난으로 돌아살수 있다는 방상훈 세습족벌사주체제인 조선일보 사설의 주장에는 동의할 수 없다. 현행 서울대의 교육 행태로는 부자집 아이가 서울대에 들어가서도 21세기가 요구하는 부자의 덕목이나 21세기가 요구하고 있는 학문적 성취도를 만족스럽게 교육받지 못하기 때문에 이들 이 앞으로 한국사회는 물론 세계의 21세기 시민사회에 리더가 될 수 있다는 긍정적 희망을 기대할수 있는 교육을 받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조선사설의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변칙적인 학원수업과 고액과외를 받아 불공정 경쟁을 통해 서울대에 들어간 그들이 오히려 미래에 가난한 군상들로 전락할 가능성도 전혀 배제할수 없다고 본다. 조선일보는 발상의 전환을 해야한다.














(홍재희) ====== 가난한 집 아이들이 현행 서울대 입시코스를 통해 서울대에 들어가 사회에 진출하게 되면 21세기가 요구하고 있는 부와 학문적 축적과 세계시민의 자질에 대한 능력을 함양할수 있다고 장담할 수 없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새로운 의미에서 또 하나의 가난한 집단에 편승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고 본다. 이제 서울대 증후군에서 벗어나자. 열린교육의 기회는 세계 도처에 산재해 있고 신분상승의 사다리는 꼭 서울대가 아니라도 대한민국 사회 곳곳과 지구촌 곳곳에 도전정신을 지닌 젊은이들을 기다리고 있다.











[사설] 가난한 집 자녀만 멍들게 한 평준화(조선일보 2004년 1월27일자)











‘누가 서울대에 들어오는가’라는 서울대 사회과학연구원의 보고서는 지금의 입시제도와 교육시스템으론 가난한 집 아이들이 아무리 노력해도 경쟁에서 살아남기 힘들다는 사실을 보여줬다. 입시 경쟁이 학교 교실이 아닌 학원 강의실에서 결판나고 있기 때문이다. 좋은 학원을 다닐 돈이 없으면 아예 경쟁이 되지 않는 것이다.





이런 불평등은 모든 경쟁이 학교의 울타리 안에서 이뤄지도록 해야만 바꿔놓을 수 있다. 무엇보다 학교의 학습 분위기가 학원 못지 않게 진지해야 하고 학원 못지 않게 자신의 학습능력에 어울리는 질 좋은 수업을 들을 수 있어야 한다.





이건 인수분해도 못 하는 아이와 미·적분까지 마스터 한 아이를 한 교실에 나란히 앉혀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수업을 이해 못한다는 고교생이 18%, 의욕을 상실했다는 대답이 16%, 마지못해 수업에 참여하고 있다는 학생이 24%에 달하는(교육개발원 설문조사) 지금의 공교육으로는 사교육을 대신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선 경쟁의 승부가 학교 밖 학원에서 결정될 수밖에 없다. 그 결과 가난한 학생들은 경쟁의 대열에서 밀려나게 되는 것이다.





현재도 비슷한 실력의 학생들을 한데 모아 가르치는 수준별 학습을 권장하고 있다고는 한다. 하지만 여건이 낫다는 서울에서도 수준별 이동수업이 부분적으로라도 이뤄지는 비율은 20%를 간신히 넘기고 있다. 교실과 교재가 모자라고, 교사는 귀찮아 하고, 학생과 학부모는 학습능력의 차이를 차별이라고 싫어하기 때문이다. 차이와 차별을 구분 못하는 운동권적 구태(舊態)에 학부모와 학생들까지 오염된 것이다. 결국 학교는 잠자는 곳이 돼 버리고 돈 있는 집 아이들만이 저녁에 비싼 돈 내고 학원을 찾아가는 악순환이 되풀이될 뿐이다.





서울대 사회과학연구원의 보고서는 “평준화로 인해 우수학생만 따로 모아 차별적으로 교육할 수 없게 되면서 저소득층 학생의 일류대 진학이 어려워졌다”고 밝혔다. 그런데도 교육부총리는 “평준화를 하지 않았다면 사교육이 더 기승을 부렸을 가능성이 크다”고 하고, 서울시 교육감은 평준화 철폐는 잘 사는 특권층을 위한 것이라는 궤변을 늘어놓는 실정이다.





정답 찾아내는 기술자로 만드는 과외 교육에 길들여진 아이들이 창의력과 자생력을 가질 리 만무하다. 이런 사교육에 GDP의 3%인 13조6000억원을 쏟아붓는 밑빠진 시루 같은 교육투자로는 미래를 향한 지적(知的) 경쟁에서 우리 아이들과 우리나라를 낙오하게 만들 뿐인 것이다.





야간에 학원과 과외를 기습 단속하는 기상천외의 쇼적(的) 행정만으론 아무 것도 바꿔놓을 수가 없다. 사교육에 의존할 수밖에 없게 만든 공교육 붕괴의 근본 대책을 찾아야지 공권력을 동원해 사교육을 때려잡는다고 될 일이 아닌 것이다.





가난한 아이, 불우한 집안 사정의 아이들에게도 자신의 힘으로 향상(向上)의 사다리를 올라갈 수 있는 희망을 주기 위해선 게임의 규칙을 바꾸는 수밖에 없다. 그것은 천차만별의 학생들에게, 집안 사정의 낫고 못하고가 아니라 저마다의 학습능력과 학습의욕에 따라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교실 안에서 제공하는 것이다. 이것을 우열반(優劣班)이라고 부르고 바라보는 사회주의적 잘못된 평등관을 청산해야 한다.





그러자면 재능과 개성을 살려나가는 사학의 의욕도 북돋워주고 지원해 주어야 한다. 양심 있고 정직한 교육자와 교육행정가라면, 고교 평준화와 변별력 없는 수능시험이 저소득층 학생들에게서 기회를 빼앗고 과외에 돈을 쏟아부을 수 있는 고소득층 자녀만을 유리하게 만들었다는 명백한 증거 앞에, 겸허하게 자신의 말과 행동을 뉘우쳐야 마땅한 것이다.





가난한 집 아이가 제대로 된 교육을 못 받고, 경쟁에서 탈락해 다시 가난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현재의 평준화 제도는 이제 폐기처분할 때가 됐다. 자신들의 정치적 이념에 눈 먼 나머지 가난한 집안의 아이들에게 향상과 발전의 사다리를 앗아가는 것은 죄악(罪惡)을 범하는 것일 뿐이다.














[사설] 평준화의 사이비 종교에서 깨어나라(조선일보 2004년 1월26일자)

















서울 강남 출신 수험생의 서울대 사회과학대 입학률이 전국 평균의 2.5배나 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고소득의 전문직 아버지를 둔 학생의 입학률도 일반 학생의 17배에 달한다고 한다. 서울대 사회과학연구원이 낸 보고서의 내용이다.





서울대 사회과학대학만의 얘기일 리가 없다. 서울대의 다른 학부도 다를 바 없을 것이고, 소위 일류대라는 학교를 조사해보면 다 비슷한 결과가 나올 것이다.





이 보고서를 읽으면서 우리는 교육이 우리에게 과연 무엇인가에 대해 근원적인 물음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교육의 우선적 목표는 개인의 타고난 인성을 함양해 지적·도덕적 능력을 향상시키고 정서적으로 건전한 인간을 키워내는 것이다. 다음으론 사회의 존립과 발전을 위해 필요한 인재를 키워 사회에 내보내는 일이다. 교육의 또 다른 의의는 자기에게 주어진 조건을 운명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노력으로 이 조건을 바꿔갈 수 있는 상승의 사다리를 제공하는 것이다.





우선 평준화 이전과 이후를 비교해서 지금의 교육이 인성 함양에 제몫을 다하고 있는지에 대해 양심적인 교사와 양심적인 교육행정가들이 있다면 대답을 해보라. 빠른 사회변화를 소화하지 못해 거친 품성으로 변해가는 아이들에 대해 학교는 그저 속수무책일 뿐이다.





그렇다면 교육이 사회가 필요로 하는 인재를 공급해주고 있는가? 서울대에선 입학식도 치르기 전의 신입생에게 특별 합숙훈련을 시켜야 하는 형편이다.





교육평등을 입에 달고 다니는 사람들은 국경이 무의미해진 글로벌 세계에서 우물 안의 평등이란 이념적 자기 기만(欺瞞)일 뿐이라는 사실을 외면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의 아이들을 지금처럼 가르쳐 냉혹한 국제적 경쟁터로 내보내는 오늘의 교육은 갑옷도 차려 입히지 않고 사지(死地)로 내모는 무책임의 극치라고 할 수밖에 없다.





14억 인구의 중국은 4000만이 넘는다는 대졸(大卒) 인력이 예비군처럼 연구개발과 산업현장에 투입될 날을 기다리고 있다. 1억4000만 인구의 일본은 세계 최고의 기술력에다 기초과학 분야에서 10여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하고 노벨상 예비후보가 줄을 서 있는 나라다. 이런 틈바구니에 끼여 있는 처지의 우리가 평준화라는 시대착오적 교육 시스템에 언제까지나 매달려 있는 한 현재와 미래를 한꺼번에 포기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 나라의 평준화 교육은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고 보다 높은 목표를 향해 나아가려는 청소년들에게 ‘다 같이’라는 족쇄를 채움으로써 자기 실현의 꿈을 앗아가고 있다. 이 나라에선 어려운 집안 출신의 학생이 각고면려(刻苦勉勵)를 통해 이 나라 각계의 지도자로서 활약하고자 하는 의욕을 아예 앗아가 버렸다. 공교육은 폐허화되고, 사교육비는 하늘 높은 줄 모르는 이 상황에서 어려운 집안 아이들이 어디서 자기의 실력을 기르고 무슨 꿈을 키워나갈 수 있겠는가. 이처럼 상승(上昇)의 통로가 봉쇄돼버린 사회에서 자라는 것은 좌절과 증오와 자포자기라는 독버섯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