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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상훈 사장 신년사 조선일보역사 왜곡하다.

방상훈 사장 신년사 조선일보역사를 왜곡하다.











2004년 1월 2일 조선일보 임직원들을 상대로 발표한 조선일보 사장 방상훈의 신년사 내용 가운데 주목할 만한 대목이 두 군데 있다.





첫 번째 주목할 대목은 방상훈 사장이 신년사를 통해서 안티조선 운동에 대해 심각한 위기의식을 공개적으로 표출한 점이다. 아래는 방상훈 사장의 신년사 중 일부내용이다.





『새해, 우리가 갈 길도 결코 평탄하지 않습니다.


국내 정치는 불안하고, 경제 여건 또한 크게 나아질 것 같지 않습니다.


4월 총선을 전후하여 나라안은 또다시 분열과 혼란으로 치닫지 않을까 걱정됩니다.





이에 편승하여, 우리 신문을 흠집내려는 특정 세력들의 음해 역시, 더욱 기승을 부릴 것으로 예상됩니다. 』











두 번째 주목할 대목은 는 방상훈 사장이 2004년 신년사를 통해서 방상훈 세습족벌사주체제인 조선일보의 부끄러운 역사를 왜곡하는 한편으로 방씨 족벌 조선일보의 친일 반민족적인 범죄행위를 미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방상훈 사장의 조선일보 역사왜곡발언을 우리의 근 . 현대사에 대해 제대로 된 역사교육을 받지 못한 조선일보의 젊은 기자들과 젊은 독자들이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 수용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에 방상훈 사장에 의해 왜곡된 조선일보의 역사를 있는 그대로 알리기 위해 이 글을 쓴다. 아래 내용은 방상훈 사장이 2004년 신년사를 통해 조선일보의 역사를 왜곡한 내용이다.











『조선일보는 일제 식민지 시대 그 폭압의 암흑기에도, 신간회의 기치아래 분열된 민족주의 세력을 하나로 합치는데 앞장섰고, 강제 폐간되던 그 날까지 한글신문을 고수하며 우리의 얼을 지켜왔습니다.』








방상훈 사장이 위에서 주장하고 있는 내용은 교묘하게 독자들을 속이고 또한편으로 일제하 조선일보의 역할을 왜곡시키고 있다. 방상훈 족벌세습사주체제가 경영권을 인수하고 조선일보를 운영하고 있던 기간동안은 항일민족운동이 아닌 친일반민족적인 범죄행위를 통해 우리겨레와 민족에게 씻을수 없는 치욕과 고통을 안겨 줬기 때문에 조선일보가 우리의 얼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는 말을 방상훈 족벌사주체제는 할 자격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상훈 사장은 신년사를 통해서 " 조선일보는 일제 식민지 시대 그 폭압의 암흑기에도, 신간회의 기치아래 분열된 민족주의 세력을 하나로 합치는데 앞장섰고, ... " 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여기서 신간회에 대해서 참고로 한번 알아볼 필요가 있다.








『1927년 결성되어 1931년 해체된 신간회는 당시의 수준에서 민족통일전선 문제에 대한 진지한 모색의 결과로 출현한 한국 최초의 좌우 합작적 대중 단체였다. 이 단체는 1920년대 중반 국내 민족해방운동의 동향을 반영하여 신생의 사회주의 진영과 3 . 1 운동이후 점차 영향력을 상실해 가고 있던 민족주의 진영간의 협동으로 결성된 것으로서, 식민지하 민족통일전선 결성문제를 최초로, 그리고 전면적으로 제기하였다는 점에서 민족해방운동사상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당시 상황에서 신간회가 내건 `민족단일당` 이라는 슬로건은 전국적인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으며. 때문에 창립 이후 빠른 속도로 조직을 확장해 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신간회는 그 주도세력들의 인식상, 실천상의 여러한계 _ 이는 주로 반제 민족통일전선의 민족해방운동에서의 지위, 그리고 올바른 통일전선형성경로에 대한 이해의 부족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_ 로 인하여 활발한 반일투쟁을 전개하지 못한 채 해체되고 말았다.








신간회 자체는 불과 4년 동안만 존속할 수 있었고. 또한 진정한 의미에서 통일 전선체로 규정하기에는 많은 한계를 안고 있었으나. 그것이 식민지 시기 민족해방운동 전반에 미친 영향은 심대하였다... 』





(자료출처 = 역사문제연구소 민족해방운동사 연구반 지음 민족해방연구사 제 6장 신간회 운동 편 . 출판사= 역사비평사. 1990년출간)








위에서 살펴본대로 신간회 라는 단체가 존재했던 기간은 1927년부터 1931년 까지이다. 방상훈사장의 주장대로 그 당시 조선일보가 신간회의 기치아래 분열된 민족주의 세력을 하나로 합치는데 앞장섰다는 주장이 사실이라 해도 방사장의 할아버지인 조선일보 방응모 사주에서 손자인 방상훈 세습족벌사주로 이어지는 방씨 세습족벌들의 역할은 전혀 없었다는 점이다. 방상훈 현 조선일보 사장의 할아버지인 방응모가 조선일보를 인수해서 사장에 취임한 것이 1933년 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선일보의 역사에 대해서 자세하게 모르고 있는 젊은 조선일보 기자들이나 젊은 독자들은 방상훈 사장의 신년사에 나와 있는 신간회 통합운동에 방씨족벌의 조선일보가 역할을 한 것으로 받다들일 가능성이 다분히 있다. 이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방상훈사장은 그러한 점을 교묘하게 악용하고 있다.














조선일보 방상훈사장은 2004년 신년사를 통해서 일제하 부끄러운 친일 반민족적인 범죄행위를 저지른 조선일보를 미화하고 있다. 한번 살펴보자. 방상훈 사장은 신년사에서 주장하기를 " 조선일보는 ... 강제 폐간되던 그 날까지 한글신문을 고수하며 우리의 얼을 지켜왔습니다. " 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럼 조선총독부가 조선일보를 비롯한 한국인 민간인에 대한 신문발행 허가의 목적이 어디에 있었는지 한번 살펴 보자.








『 조선총독부의 한국인 민간인에 대한 신문 발행 허가도 문화정치의 일환이었다. " 조선인의 기분을 알고 조선인 사이에 어떠한 공기가 흐르고 있는가를 알기 위해 유익" 한 점도 작용하여서. (당시 정무총감 水野 太浪의 말 . 그는 " 불을 때는 데 굴뚝이 없으면 언젠가는 솥이 파열한다" 고 말하였다)친일예속자본가 단체인 대정실업친목회의 예종석에게 「조선일보」를 허용하였고.( 芮宗錫은 「조선일보」초대사장 趙鎭泰 와 함께 1907년 漢成府民會를 조직하였고, 3 . 1 운동에 반대하여 유세하였으며, 조진태, 한상룡, 민영휘 등과 더불어 大正실업친목회를 만들어 동화운동의 선두에 나섰다.)








동아일보는 김성수, 김연수 형제의 자산을 모체로 대지주 . 자본가를 발기인으로 하고 ,(동아일보의 주요 발기인들은 경성방직주식회사의 발기인들과 대체로 일치한다.) 이완용(李完用)과 더불어 우두머리격 친일파인 후작 박영효를 사장으로.(박용효는 대자산가로 1910년 이전에도 많은 회사에 참여하였다. 그는 총독의 정책에 의해 부르주아지 . 대지주들이 일제에 타협하는 데 중요한 매개역할을 하였다. 그는 이완용에 이어 중추원 부의장을 맡았고. 尹德榮과 함께 조선식산은행 감사였다.) 「매일신보」간부 이상협을 편집 책임자로. 장덕수 . 진학문을 간부로 하여 출범하였다. 1906년 이래 실력양성운동을 고창하며 친일활동을 한 국민협회의 민원식은 「시사신문」의 발행을 허가 받았다.











그러나 3개의 신문은 민족개량주의를 유포시키면서도 민족적인 색채를 띈 논설과 기사도 많이 실어. 1920년대 중후반기에는 압수와 정간처분을 자주 받았다. 잡지의 경우도 모두 다 사전 검열되어 상당부분이 삭제되기가 일쑤였다.








언론지가 1920년대 중후반에 민족적이었던 데에는 파멸해 가는 중산층과 인텔리겐차를 주로 상대하여 치열한 판매경쟁을 벌여야 했고 사회주의자들이 다수 간부와 기자로 들어와 있었으며 「조선일보」의 안재홍과 같은 민족주의 인사들이 일부 경영 . 편집에 참여 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총독부 당국도" 어떠한 신문에 대해서도 당국에 아부하는 기사를 쓰는 것을 환영하지 않았다. 더욱이 `단순히 마음에 안들었다`는 이유로 압박하는 것은 되도록 피했다"는 주장처럼, 정책적 `관용` 도 부분적으로 1920년대에는 작용하였다. 』


(자료출처 =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 제 1장 일제시기민족국가건설운동편. 서중석 지음 역사비평사 1991년간)











위에서 나온 내용을 보면 알수 있듯이 조선일보를 비롯한 일제하 신문들은 일제의 필요에 의해서 만들어 졌고 일제에 순응하였으며 제한적이나마 조선일보가 민족의 입장을 대변하는 역할을 했던 시기는 현 방상훈조선일보 사장의 할아버지인 방응모가 조선일보를 인수하기 이전인 1920년대 중후반때 였고 방응모가 조선일보를 인수한 1933년 부터는 철저하게 친일 반민족적인 논조로 조선일보의 지면을 도배했다. 방씨 족벌의 조선일보는 1940년 8월에 폐간될 때까지 철저하게 일본왕에 충성을 맹세하며 일본의 군국주의에 나팔수 역할을 했다. 아래내용을 한번 참고로 살펴보자.














『군국파시즘에 의한 황국신민화 강행의 행태를 볼 때 . 1940년 8월 10일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폐간되어 한국의 언론은 다시 3 .1 운동 이전의 암흑시대로 환원되고 말았다는 평가는 사실과 거리가 있을 수 있다. 폐간이 안되었더라면 전쟁협력에 급급하였던 「조선일보」의 조광(朝光)처럼.(조광은 현 월간조선의 전신임 . 필자 주) 두신문 모두 전쟁협력 신문이 되어. 해방후 한민당은 민족문제에서 한층 더 난처 하였을 것이다.











신문들은 만주사변이후`비상시 태세`를 인정하였고 사상탄압을 부분적으로 긍정하였으며, 신문의 논조도 비판이라기보다는 `논의`, `요망`의 형태로 바뀌었고, 당국의 삭제도 거의 없었다. 중일전쟁 이후 한국인이 내던 신문들은 그 이전까지의 멈칫거리던 태도도 약해지고. `언론의 총후보국`에 노력하였다.








예컨대 신문들은 1938년 1월1일에서 폐간일까지 거의 매일 수건씩 황군의 전과를 큼지막하게 보도하였고 . 전쟁헌금. ` 헌납` 위문과 이에 관련된 천도교와 기독교 단체의 `미담`을 1일에 몇 건씩 보도하였다. 한 신문의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에 관한 기사제목을 몇 가지만 보면 " 전조선 방방곡곡의 총동원연맹의 조직성(組織性)" (1938. 7 . 7), " 숭엄한 국체, 발랄한 정신, 일본정신 발양주간의 제4일"(1939. 2 . 11) " 금일부터 일본정신 발양주간 남산에 3천명 집합 궁성예배 건국체조 " (1939. 2 . 9)" 천도교 본부에서 정신연맹을 결성 전조선 20만 신도동원" (1939. 2 . 9) " (1939. 6 . 12)등이 눈에 띄고 " 총후보국의 열변 작야 7시 반 기청(基靑)회관에서 각 교파연합대강연"(1939. 4. 29). " 성전 홍업(鴻業)에 봉공(奉公)북지(北支) 제일선에 나간 지원병 백승길(白承吉)군 학무국장에 감격의 일언"(1939. 6 . 11) 등도 눈에 띈다. 한 신문은 폐간사에서" 지나사변 발발이래 본보(本報)는 보도보국의 사명과 임무에 충실하려고 노력하였고 더욱이 동아 신질서 건설의 위업을 성취하는 데 만일이라도 노력하고자 숙야분려( 夙夜奮勵)" 하였다고 회고하였다.』





(자료출처=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 제 1장 일제시기민족국가건설운동편. 서중석 지음 역사비평사 1991년간)











위와 같이 폐간되는 날까지 친일매국의 논조를 통해 일제에 충성을 다하며 반민족적인 나팔수 역할에 충실해 놓고 방상훈 사장은 올 신년사를 통해서 ` 강제 폐간되던 그 날까지 한글신문을 고수하며 우리의 얼을 지켜왔습니다. ` 라고 독자들을 기만하고 있다. 방상훈 조선일보사장이 이렇듯이 방씨 족벌의 부끄러운 친일반민족의 살아있는 역사를 왜곡하고 호도해도 역사적 진실 자체는 어찌할수 없는 것이다.











문제는 방상훈 세습족벌사주체제의 조선일보가 일제시대에 나라와 민족을 팔아 먹는 반민족 행위를 해 놓고 이제와서 사실자체를 숨기고 왜곡하는 그 자체가 더 한국사회로부터 용서받지 못할 행위라고 본다. 그러나 한가지 특기할 것은 2004년 조선일보 신년사를 통해서 방상훈 사장이 조선일보가 `민족의 정론지` 라는 주장을 감히 대놓고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을 알수 있다.

















『조선일보 방상훈 사장의 신년사 전문.





새로운 시작은 언제나, 희망과 기대로 가슴 설레이게 합니다.


오늘 우리도, 새로운 희망과 기대를 안고, 2004년 새해의 출발점에 섰습니다.





지난 한 해는 나라 안팎의 사정도,언론계 안팎의 사정도 모두 어려웠습니다.





우리나라의 오피니언 리더들은, 지난 한 해 우리나라를 표현하는 4자 성어로 ‘우왕좌왕’을 선정했습니다. 나라 전체가 나침반 잃은 배처럼, 목표를 잃고 표류한 한 해 였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이같은 시대 상황에서, 언론마저 목표를 잃고 혼란과 혼돈에 동승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조선일보는 일제 식민지 시대 그 폭압의 암흑기에도, 신간회의 기치아래 분열된 민족주의 세력을 하나로 합치는데 앞장섰고, 강제 폐간되던 그 날까지 한글신문을 고수하며 우리의 얼을 지켜왔습니다.





새해, 우리의 목표는 분명합니다. 나라와 국민이 안전하게 항해할 수 있도록 어두운 바다의 뱃길을 환히 비춰주는 등대의 역할을 조선일보가 맡아야 합니다.





사우 여러분.





지난 해 우리는 부단히 스스로를 혁신했습니다.


뉴스면과 오피니언면을 분리했으며, 1면에서 9면까지의 뉴스면을 컬러화해, 본격적인 ‘컬러 뉴스 시대’를 열었습니다. 정동 별관과 부평 공장에 새롭게 설치된 첨단 인쇄설비가 바로 ‘컬러 뉴스 시대’의 주역입니다.





올해는 평촌과 성남의 인쇄 설비도 새롭게 바꿀 것입니다.





IMF에 못지않은 어려운 경제여건이었지만, 광고와 판매도 기대이상의 성과를 이끌어냈습니다.





사우 여러분.


새해, 우리가 갈 길도 결코 평탄하지 않습니다.


국내 정치는 불안하고, 경제 여건 또한 크게 나아질 것 같지 않습니다.


4월 총선을 전후하여 나라안은 또다시 분열과 혼란으로 치닫지 않을까 걱정됩니다.





이에 편승하여, 우리 신문을 흠집내려는 특정 세력들의 음해 역시, 더욱 기승을 부릴 것으로 예상됩니다.





사우 여러분.





주변 여건이 어렵고 혼란스러울수록, 우리는 중심을 잡고 바로 서야 합니다.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원리는 우리가 지켜야할 원칙이자 가치입니다. ‘나라와 미래를 생각하는 신문, 조선일보’도 이 바탕 위에 서있습니다.





언론이 지녀야할 가장 중요한 정신의 하나가 바로 비판 정신입니다.


비판 정신은 국가사회가 썩지않게 하는 ‘소금’의 역할을 합니다.





조선일보는 어떤 비바람이 몰아쳐도, 언론 본연의 비판 정신을 결연히 지켜나갈 것입니다.


언론이 국가사회적으로 담당해야할 또 다른 중요 기능의 하나가 ‘빛’의 역할입니다. 어렵고 소외된 계층에게 따뜻한 사랑의 빛을 비추어, 사회 곳곳에 드리워진 어두운 그림자를 걷어내는 역할입니다.





조선일보의 지면은 올해 ‘어두운 곳, 낮은 곳’에 집중적으로 ‘빛’을 비추어 나라전체를 밝게 만드는 일에 발벗고 나설 것입니다.





한 숟갈의 양식이 필요한 불우 이웃들, 기댈 곳조차 없는 소년소녀 가장들, 홀로 사는 노인들, 박봉의 근로자들...이 모두가 ‘빛’을 비추어야할 대상입니다.





정부와 사회의 정책 잘못과 무관심으로 거리를 헤매는 청년 실업 문제 역시, 우리가 잊어서는 안될 과제입니다.





조선일보의 지면은, 이들에게 따뜻한 사랑의 손을 내미는 아름다운 이웃들의 이야기에도 결코 소홀하지 않을 것입니다.





사우 여러분.


조선일보는 ‘1등 신문’이 아닌, ‘최고의 신문’을 지향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국 최고의 인재들이 조선일보로 모여들도록 해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몸높이와 울타리를 겸허하게 낮추어야 합니다.


낮은 곳으로 물이 흘러들듯, 보수와 진보, 연령 구분없이 한국 최고의 인재들이 조선일보로 모여 들게 해, 새로운 조선일보의 정체성으로 다시 태어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사우 여러분


올해 경제상황은 지난 해보다 더욱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여건이 아무리 어렵더라도, 회사는 사람을 키우는 일을 비롯해 신문제작과 회사 발전에 필요한 문제들에 관해서는, 결코 투자를 아끼지 않을 것입니다.





사우 여러분.





정동 별관 6층 엘리베이터를 나서면 벽면에 ‘수처작주’라는 글귀가 붙어있습니다. ‘가는 곳마다 주인이 돼라’는 말입니다. 그래야 개인의 발전도, 회사의 발전도 이루어질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 말뜻 그대로, 사우 모두가 主人이 됩시다. 그러면 어떠한 어려움이 닥쳐오더라도 우리는 능히, 이를 극복해낼 수 있을 것입니다.


사우 여러분.





2004년 새해에도 모두 건강하시고, 가정에 늘 웃음과 행복이 가득 하시길 빕니다.





감사합니다.





2004. 1. 2 조선일보 사장 방상훈





(자료출처 = 2004년 1월3일 미디어 오늘 인터넷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