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휴학 때부터 학교를 들락거리며 줄곧 '문학'을 떠들던 모습이 선뜻 떠오른다. 심지어 MT도 쫓아다녔었지.. 선후배들과 술자리를 오가며 토론을 벌였고, 돈이 없다며 대전 갈 차비를 후배한테서 뜯기도 하고, 자취방에서 오가는 긍정성과 부정성 사이에서 괜시리 고민도 해보며, 그렇게 한학기를 보냈던 그가 복학을 하였고, 한마디로 '문학성'과 '원칙'이라는 주무기로 그는 전폭적인(?) 지지를 얻으며 시장을 맡게 되었다. 그게 벌써 '92년의 일이었던가.. 그랬던 그가 초반기에 보여주었던 참신한 노력, 그리고 애써 심고자 했던 희망들은 확실히 긍정적인 효과였었지.. 하지만, 어인 일인지 불과 한달도 못 채운 채 그는 갑작스레 시장직을 사퇴한다고 선언했다. 그것도 모자라 동아리방에 변명이랍시고 커다란 대자보를 내붙이기도 했었지.. 그때나 지금이나 어렴풋이 기억나는 부분은 그 중 가장 큰 이유란 그가 늘 기피하고 적대시해오던 냉소와 무관심 앞에서의 굴복, 결국은 자신이 심고자 했던 희망에 대한 포기라고나 할까.. 아마 그런 게 아니었을까 한다. 누군들 그의 혹은 절절했을, 또 함부로는 말하기 어려웠던 고뇌와 한계 등등에 대해 선뜻 이해를 못하랴. 허나, 그 결정은 분명 치명적인 것이었고 많은 이들이 그에게 등을 돌리게 만든 결정적인 첫단추였기도 했다. 이후에도 그는 본의아니게 소위 주류 계층과의 마찰이 끊임없었고, 늘 회의는 시끄러웠으며, 비록 그것들이 혹여 그의 참된 고민과 진정한 동아리 발전에 대한 제안으로 여기진다 해도 진정 그 모양새는 그리 아름답지 못했다.. 참으로 씁쓸했던 기억이 아닐 수 없다.. 그나마 다음 학기부터 후배들을 도맡아 세미나를 진행하겠다고 나섰던 대목이거나, 시낭송회 무렵에 꾸역꾸역 성공리에 마친 행사에 일조했던 부분들 역시 그의 엄청난 과오들과 독설조의 비판에 대한 인상에 묻혀, 아쉽지만 아무에게도 지지를 얻지 못했었지.. 그해 가을인가, 그가 동연선거 참모장을 맡았었지. 어쩜 끝까지 그가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일을 마무리했던 최초이자 최후의 일일지도 모를. 동연 선거가 끝나고 당선이 확정되고 모두들 축제의 술판을 벌이고, 먼저 사라졌던 그 선배의 자취방에 찾아가 친구 앞에서 이불 뒤집어쓴 채 펑펑 울고만 있던 그의 모습이 지금도 눈앞에 역력하다.. 그게 벌써 10년이 넘은 얘기다. 그리고, 사실 솔직히 지금도, 그는 그해의 또 그 다음의 이러저러한 일들로 인해 금이 갔던 선후배들과 여전히 소원하다. 아니, 어쩜 앞으로도 그러할 것 같다. 어찌 생각해보면 정작 소원하다기보단, 괜시리 서로의 상처 내지 자존심을 건드리고 싶지 않은, 서로에 대한 일종의 배려일까.. 사실 따지고 보면 이제 와서 사과를 한답시고 혹은 미안하다고 쑥스럽게 얘기를 꺼낸다는 게 얼마나 어색하고도 한편으로는 의미없는 일일까.. 물론 이게 벌써 일종의 허무인지도 모르겠으나, 어쩌면 세상에 근본적으로 생각이 다른 사람들이 존재할 수도 있다는 생각은 사실 수많은 세월이 흐르면서 결코 공짜로 가르쳐주지 않는 진실인 것 같다. 매트릭스에도 그런 얘기가 나온다지 않는가, "동의가 곧 협동의 전제조건은 아니다."
그가 청문회 때부터 당시의 쟁쟁하던 정주영 회장 앞에서 추상같은 어조로 인권과 도덕을 역설하던, 그래서 국민적 스타로 등극하던 그 모습이 지금도 눈앞에 선하다. 내가 사실 반강제로 군에 입대하기 직전이었지. '89년의 마지막 날 국회 5공 청문회에서 전두환 전대통령의 성의없는 연설 앞에 분개하던 TV는 팻말을 집어던져 응수하던 그의 모습을 클로즈업했었다.. 그해 겨울 신병교육대에서 3당 통합이라는 희대의 민자당 창당 소식을 들었고, 그것은 곧 정치의 절망을 뜻했었다. 만일 내가 편향이었다면 아마 그 영향도 컸으리라. 그는 극소수의 비주류로 남았지만, 보란듯이 여러 곳에서 고배를 마셨고, 가끔은 진보진영에서조차 그를 배신자로 내몰던 적이 있었지. 그것도 더듬어보니 딱 '92년 그때구나. 백선본이 참패하던 그 참혹한 겨울의 일들이었지.. 그렇게 철저히 소외된 채 잊고 지내던 그가 어느덧 민주당 대표위원까지는 잘도 올라갔었지. 누가 그를 대선후보로 생각이나 했었던가. 국민경선이 아니고서야.. 게다가, 누가 초유의 후보단일화를 생각이나 했었던가. 그것도 다 작년에 벌어졌던 드라마들이다. 한마디로 '도덕성'과 '원칙'이라는 주무기 하나만으로 그는 실로 전폭적인(?) 지지를 얻으며 대통령을 맡게 되었다. 그게 이제 겨우 반년이 지난 일이던가.. 그랬던 그가 초반기에 보여주었던 참신한 패러다임과 애써 심고자 했던 정치에 대한 희망 (사실 혹은 재미)들은 확실히 긍정적인 효과였었지.. 하지만, 그 일이 어제다, 불과 한해도 못 채운 채 그는 갑작스레 대통령직에 대한 신임을 묻겠다고 선언했다. 그것도 모자라 오늘은 변명이랍시고 딴죽걸기의 야당과 언론을 공격하며 언론 인터뷰에 응하고 있다. 지금이나 앞으로나 나름대로 예견되는 부분은 그 중 가장 큰 이유가 그의 평생동지 혹은 측근들의 덜떨어진 사고방식과 부정부패, 그리고 여전히 공고한 틀을 자랑스레 내세우는 뻔뻔한 집단들 앞에서의 굴복, 결국은 자신이 심고자 했던 정치적 비전 내지 정도라는 것들에 대한 포기라고나 할까.. 아마 그런 게 아니었을까 한다. 누군들 그의 절절했을, 또 함부로 밝히기는 곤란했던 결함 혹은 고뇌와 한계 등등에 대해 선뜻 이해를 못하랴. 또한, 그는 자신의 과오에 대해 아주 적절하게 겸허한 자세로 사죄를 표명하기조차 했다. 허나, "재신임을 묻겠다"는 그 결정은 분명 위험한 선택이 되었고 이제 많은 이들이 그에게 등을 돌리게 만드는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할 가능성도 있다. 그는 정말로, '도박'을 감행하는 거다. 게다가 만일 그가 이후에 혹여 본의아니게라도 소위 향후의 주류 계층과 마찰을 빚거나, 비록 그것들이 혹여 그의 참된 고민과 진정한 국가의 발전에 대한 제안이라 해도 어차피 그 모양새는 이제 초라함을 면하기 어렵게 됐다. 참으로 씁쓸하고도 암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물론 그동안의 노대통령에 대한 신뢰나 그만의 독특한 덕목들에 대한 신뢰는 변함이 없다. 하지만, 여전히 그의 어깨를 짓누르는 "경솔함"이라는 상처는 더 그를 압박할 것이다. '92년 봄에 갑자기 뜻하지 않던 시장직 사퇴를 선언한 선배의 모습을 떠올린 배경은 그렇다. 적어도, 그 선배의 치명적인 결함은 바로 그 무책임함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차원에서라면, 이번 노대통령이 "재신임을 묻겠다"고 한 발언은 얼마나 훨씬 더 책임감있게 들리는가. 과연 누가 그의 이런 고민섞인 발언에 대해 "무책임"하다고 함부로 야유를 퍼부을 자격이 있겠는가.
'92년의 황량했던 늦가을밤, 혼자 펑펑 울고 있던 그 선배가 다시 떠오른다. 노대통령이 차라리 그 선배의 모습을 보인다면, 물론 이는 그가 여태까지의 이 형편없는 실정에 대한 확실한 책임을 지겠다는 의미에서의 행위를 일컫는 말이지만, 확실하게 그의 지지세력으로 입장을 포명하고 싶기조차 하다. 그가 만일 그런 의미에서의 참회와 진실어린 눈물을 흘릴 줄 아는 용기가 있다면, 나 역시 그가 극적으로 당선되는 그날 밤처럼 다시 한번 또 마음껏 함께 감동해줄 용의가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게 바로, 비극적이게도, "공인"이라는 자리에서의 절대적인 책임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편으로, 임기라는 것이 어찌 보면 필요악인 셈인지도 모른다. 국가정책의 특성상 임기 중에 마치기 어려운 부분들도 분명히 있을 것이고 (청계천 복원을 임기중에 하겠다는 발상 자체는 과연 얼마나 우스운가), 따라서 역사적인 평가란 결국 역사가 하는 것이지 시정잡배나 우스꽝스런 모습과 논리로 치장한 정치배 혹은 매국과 호도를 밥먹듯 하던 언론에게 함부로 건네줄 수 없는, 소중한 우리 자신들의 몫인 것이기 때문이다. 내 어투가 늘상 이리 지겨웠듯이, 언제고 했던 말을 다시 하자면, 물론 이게 벌써 허무라 할지라도, 근본적으로 생각이 다른 사람들 역시 어차피 같은 배를 탄 공동운명체가 아닌가. "동의가 곧 협동의 전제조건은 아니다. 그리고, 공짜 민주주의란 원래부터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