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때는 소주 서너 병을 마셔야만 잠들 수 있을 정도의 중증알코올중독과 심한 우울증으로 몸과 마음이 모두 망가져서 자살까지 생각했었고, 남들은 이미 은퇴했을 나이 30에 복싱글러브를 끼고 절망으로부터 탈출을 시도했던 여자.
50kg 남짓한 작은 체구의 여성프로복서 이인영이 지난 주말 국내 최초로 세계를 제패하는 잔잔한 감동의 쾌거를 이뤄냈다.
격투기종목 중에서도 거칠고 격렬하기가 최상위에 속하기에, 신체적으로 강인한 남성들에게도 몹시 힘겨운 복싱세계에 여성의 몸으로 과감히 뛰어들었다는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화제에 오를만한 일이었다. 게다가 유난히 굴곡이 많았던 그녀의 과거사까지도 감안해보자면, 세계챔피언이 되었다는 사실은 실로 작은 기적과도 같은 일인 것이다.
80년대 중후반까지만 해도 프로복싱은 부와 명예를 누릴 수 있는 국내 최고의 인기 스포츠 중 하나였다.
가난의 고단함에서 벗어나고자, 말 그대로 뼈를 깎는 듯한 혹독한 훈련과정을 견디면서 내일의 챔프를 꿈꾸는 많은 젊은이들이 있던 시절이 있었다. 몇 년 전 크게 흥행에 성공했던 영화 '넘버3'에서 배우 송강호가 열변을 토하던 '헝그리 정신'이란 말의 기원도 실은 이런 젊은 복서들의 눈물어린 투쟁정신에서 비롯된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국내 프로복싱은 사양 스포츠가 되고 말았다. 이젠 과거에 누리던 영화(榮華)의 그림자조차도 찾아보기 힘든 현실이 되고만 것이다.
어느새 우리의 경제력이 OECD에 가입할 정도로 성장했기 때문인지 몰라도 관객도, 선수도 더 이상 때리고 맞는 운동에 열광하지도 않고, 하려는 의지도 잃은 듯이 보인다.
이번 이인영 선수의 타이틀전 역시 스폰서를 구하지 못해서 두 번씩이나 연기되는 우여곡절이 있었다고 한다.
이런 열악한 대내외적 현실 속에서 일궈낸 성과였기에 가녀린 그녀의 허리에 채워진 황금색 챔피언벨트가 더욱 찬란한 빛을 바라는 듯 싶다.
챔피언이 되었어도 물질적 풍요로움은 그리 뒤따를 것 같아 보이지 않은 현실이다. 하지만 그녀가 보여준 불꽃투혼의 감동만큼은 모든 이의 가슴속에서 꺼지지 않는 희망의 불기둥으로 승화되어 적잖이 가치 있는 구실을 하게 될 것이다.
그 이유는 요즘처럼 살아가기에 힘겹고, 화병 나기 쉬운 사회분위기 속에서 삶의 활력을 일깨우는 청량제처럼 실의에 찬 국민들에 용기를 되찾게 하는 소중한 기회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