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퇴촌'나눔의 집'이란 이름의 공간에선 일제 강점기
종군위안부로 힘겨운 시절을 겪었던 할머니들이 함께
모여 살고 있습니다. 그들의 아픔을 함께 나누려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는 가운데,
미국과 일본에서 온 두 젊은이들이 최근까지 그들의
한맺은 노래와 굴곡진 모습을 기록하기 위해 한동안
그곳에 머물기도 했답니다.
그동안 종군 위안부 문제가 국내는 물론, 아시아권
전역에 걸쳐 수차례 뜨거운 이슈가 되어오긴 했지만,
그들의 슬픔을 달래줄만한 보상이나 사과는 결코
충분하지 않았던 것이 사실입니다. 더욱이 요즘들어선
일반인들의 관심 조차 조금씩 흐려지는 듯 보여
안타깝기 그지 없습니다.
여기, 종군위안부라는 지난 세월의 멍에를 눈물과 함께
털어놓은 김순덕 할머니의 이야기를 전해드리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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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의 세월(김순덕 할머니의 증언)
- 1921년 경남 의령군 출생. 1937년부터 1940년까지 중국에서 위안부 생활. 현재 경기도 광주군 퇴촌면 나눔의 집 거주.
가난이 죄
1921년 경남 의령군 대의면에서 태어났다. 우리 가족은 살기가 어려워 대나무 바구니를 만들어 생계를 꾸리고 있던 큰 아버지댁에서 더부살이를 했다. 그 곳은 지리산 밑의 산청군 삼장면 평촌리였다. 아버지는 여기서 담배농사를 지었다. 아버지가 농사 지은 담뱃잎은 전매품이라 싼 값으로 팔지 않으면 안되었다. 담뱃잎을 따고 나면 담배 둥치에서 새순이 돋아나오는데 아버지는 그것을 모아 놓았다가 말려서 피우곤 했다.
어느 날 이 일이 일본 순사에게 발각되어 아버지는 잡혀가서 모진 매를 맞았다. 그 뒤부터 매 맞은 후유증으로 시름시름 앓다가 돌아가시고 말았다. 오빠 둘, 언니, 나, 여동생, 이렇게 다섯의 자식을 데리고 어머니가 어렵게 생활을 꾸려갈 수 밖에 없었다. 거의 굶어 죽을 지경이었다. 나무 뿌리를 캐 먹기도 하고, 하루종일 디딜방아를 찧어 주고 딩기를 얻어다가 시래기죽을 쒀 먹기도 했다. 오빠는 돈 벌어 온다고 중국으로 갔다.
나도 하는 수 없이 내 한 입이라도 줄이고 돈도 벌 겸해서 남의 집 살이에 나섰다. 나와 같이 나물 캐러 다니던 동네 친구가 진주 부잣집으로 식모살이를 갔는데, 집에 다니러 왔다가 나를 진주의 은행원 집에 소개해 주었던 것이다. 내가 열 두 살 때였다. 그 집은 아이 다섯, 어른 여섯 명의 대식구였는데, 주인 여자가 독해서 고생이 심했다. 저녁 설거지를 하고 밤 한두 시까지 5리나 떨어진 곳에 가서 물을 길어 와야 했다.
이렇게 몇 해를 지내다 열 다섯 살이 되니, 그 동안 어리다고 주지 않던 월급을 조금씩 주기 시작했다. 열 여섯 살 때 돈이 몇 푼 모여 어머니께 옷 해 드리려고 광목을 조금 사고 장 담그는 콩도 한 말 사서 집으로 찾아갔다. 그 사이에 우리 집은 이모가 사는 합천군 삼가면에 있는 빈 집으로 이사해 있었다. 나는 전과 같이 나물을 뜯으며 집안일을 돌보았다.
나가사키에서의 첫날 밤
내가 열 일곱 살 되던 해(1937) 음력 정월 보름인가 2월 초쯤 되었을 때였다. 우리가 전에 살던 평촌에 조선인 남자가 나타나 일본 공장에서 일할 처녀를 모집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얼마 전에도 평촌에서 몇 명의 여자를 데려갔다고 했다. 나도 평촌으로 달려가 지원을 했다. 당시는 지금 같지 않아 세상이 어수룩했고, 특히 학교도 다니지 않은 나는 아무것도 몰랐다. 공장에 돈 벌러 가는 줄만 알았고,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이었는지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떠나는 날에는 합천 마산 등지에서 온 여자들이 30명쯤 모였다. 이 여자들과는 나중에 조선으로 돌아올 때까지 내내 함께 지냈다. 우리는 의령에서 버스를 타고 출발하여 정암다리를 건너면서 "정암다리야, 잘 있거라. 돈 벌어 올 때까지 너 잘 있거라"라며 서로 부둥켜안고 울었다.
부산에서 배를 타자 인솔자는 조선인 남녀 두 명으로 바뀌었다. 이들은 집이 상해라고 했다. 연락선이어서 사람들이 많이 탔다. 여러 층으로 되어 있었는데, 우리 일행은 계단을 한참 내려가서 배 밑바닥에 있는 방에 탔다. 나가사키에 도착하니 우리 일행을 군인들이 지키는 여관으로 데려갔다. 나는 "왜 우리를 여기에 가두나요? 앞으로 우리는 무슨 일을 하게 되나요?"라고 물었으나, 그 사람들은 "명령이 있어야 안다"고만 대답했다.
나가사키에서의 첫날 밤, 나는 계급이 높은 군인에게 끌려가서 강간을 당했다. 그 군인은 권총을 차고 있었다. 나는 피도 나오고 무서워서 도망을 치려고 했으나, 그 군인은 아무 때 당해도 당하니까 그런 줄 알라며 달랬다. 또 몇 번만 참으면 곧 괜찮아진다고 말했다. 나뿐만이 아니라, 우리 일행은 매일 밤 계급이 높은 군인들의 방으로 이곳 저곳 끌려가서 강간을 당했다. 항의를 해 봤자, 군인들은 대답이 없었다.
일주일 뒤 다시 조선인 인솔자를 따라 배를 타고 상해로 갔다. 배는 부산에서 타고 온 것과 비교도 안될 만큼 큰 것이었다. 산더미 만했다. 이 배에는 군인도 타고 민간인도 타고 있었다. 계단을 내려가서 복도를 지나 안으로 들어가니 허허벌판 같이 큰 방이 있었다. 누워서 옆을 보면 사람들이 끝없이 누워 있는 것이 보였다. 이 배를 타고 며칠을 갔다.
상해의 '란창'
어수선한 상해 거리의 변두리에 머물게 되었다. 육군부대 바깥에 있는 큰 집이었다. 조그만 방이 많고, 일본인 여자 둘과 조선인 여자 스물이 이미 이 집에 살고 있었다. 의령에서 함께 간 우리 일행 30명을 합치니 모두 50명 정도가 되었다. 일본인 여자들은 유곽에서 있다가 온 사람이라고 했다. 나이가 27, 8세 정도로 조선 여자들보다 대개 열 살쯤 많았다. 본래 이 집에 있던 조선 여자들은 전라도 충청도 등지에서 왔다고 했는데, 나이는 우리들과 비슷했다.
나는 여기서 '란창'으로 불렸다. 우리는 아픈 사람이나 특별한 사정이 있는 사람을 빼 놓고 매일 평균 35명쯤이 일을 했다. 이 집은 나무 판자로 칸을 막아서 한 사람 누울 만한 크기의 방들을 많이 만들어 놓았다. 방 안에는 침대가 있었고, 거기서 우리는 한 사람씩 기거했다. 집 앞에는 간판이 붙어 있었다. 글자를 잘 몰라 확실히는 알 수 없었지만, '위안소'라고 써 있었던 것 같다. 우리를 인솔해 간 조선 사람이 주인인 듯했지만, 먹는 것을 보급하고, 집의 청결상태를 검사하는 일은 군인들이 맡아 했다.
아침 일곱 시에 일어나서 교대로 밥을 먹고 나면 아흡 시쯤부터 군인들이 줄을 서서 오기 시작했다. 저녁 여섯 시 이후부터는 계급이 높은 사람들이 왔고, 자고 가는 사람도 있었다. 한 여자당 하루 평균 30-40명이 와서 잠도 못잘 정도로 바빴다. 전투가 있을 때는 찾아오는 군인들의 수가 적었다. 방마다 삿쿠(콘돔)을 수북이 같다 놓고서 군인들에게 착용하게 했다. 간혹 안쓰려는 군인들도 있었다. 내가 나쁜 병이 있어 옮을지 모른다고 겁을 주기도 했으나, 그래도 "언제 죽을지 모르는 판에 병에 걸린들 대수냐?"고 막무가내로 덤비는 사람도 많았다. 이럴 때 나는 정말 성병에 걸릴까 봐 환장할 지경이었다.
아프고 괴로울 때는 죽으려고도 해 보았다. 강물에 뛰어들려고도 했고, 낭떨어지에서 뛰어내리려고도 했다. 달리는 차에 뛰어들려고도 했지만, 차마 그러지 못했다. 이럴 때 고향의 어머니 생각이 가슴이 저리도록 났다. 도망 가려 해도 어디가 어딘지 몰라서 그럴 수 없었다. 결국 포기하는 수 밖에 없었다. 군인들이 무서워서 죽으라면 죽는 시늉이라도 해야 했다. 군인과 싸움을 하는 여자, 물건이 없어졌다고 난리를 치는 여자, 도망 치다가 군인에게 붙잡혀 오는 여자, 군인에게 발길에 채여 비명을 지르는 여자, 그 곳은 별별 다툼이 많아 아수라장 그대로 였다. 그러나 나는 반항하지 못했다. 그것만이 사는 길이라고 믿었다.
한두 달에 한번씩 군의관에게 검진을 받았다. 병원에는 다른 위안소에서 온 여자들까지 있어서 여자들이 아주 많았다. 중국 여자들이 줄지어 서 있는 것도 보았다. 중국 여자들은 군인들에게 위안부로 잡혀 오면 도망치거나 자살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들었다. 검사대에 올라가서 두 다리를 벌리면 군의관이 나팔 같기도 하고 오리 주둥이 같기도 한 것을 밑으로 넣어서 살펴보았다. 병이 있으면 '606호'라는 주사를 놓아 주었다. 나는 성병은 없었지만 밑에서 피가 흐르고 소변을 못 보는 병(방광염인 듯)에 걸려 통원 치료를 받았다. 다른 여자들 중에도 밑이 바늘 구멍 들어갈 구멍도 없이 훌떡 뒤집히도록 붓고 피가 나는 사람이 많았다. 멀쩡한 처녀들을 데려다 날이면 날마다 이런 일들을 시키니 오죽했겠는가? 성병이 있는 사람들은 쉬도록 명령이 내려졌다.
전투를 마치고 돌아오는 군인들은 난폭하고 삿쿠도 잘 사용하지 않으려고 했다. 얼굴 옷 신발 등이 온통 먼지투성이였다. 반대로 전투를 하러 나가는 군인들은 다소 온순하고, 이제 자기는 필요 없다고 잔돈 푼을 놓아 두고 가기도 했다. 전투가 무섭다고 우는 군인들도 있었다. 나는 그들에게 "꼭 살아서 돌아오라"고 위로해 주기도 했다. 그들이 정말 살아서 다시 돌아오면 반가워 기뻐하기도 했다. 이러는 중에 단골로 오는 군인들도 늘어났다. 어떤 사람은 "사랑한다. 결혼하자"고 제의하기도 했다.
위안소는 특정 부대에 소속되어 있지는 않았지만, 부대가 이동하면 위안소도 곧 뒤따라 갔다. 우리는 처음에 있던 상해를 떠나 전방으로 전방으로 몇 번인가 이동하여 마지막에는 남경에 있었다. 위안소는 대개 도심이 아닌 외딴 곳에 자리 잡았다. 전쟁으로 주변 상황이 참혹했다. 매일 총소리가 들렸고, 여기저기 시체가 널려 있었다. 개가 시체를 물고 다니기도 했다.
군인들은 올 때마다 조그만 표(요즘의 경로우대증같이 생겼다)를 주고 같는데, 그것을 모아다가 조선인 주인에게 갖다 주면, 주인은 공책에 일일이 기록했다. 일본이 전쟁에 이기면 그 돈으로 팔자를 고치게 해 준다고 했다. 그러나 따로 급료를 받은 적은 없었다. 옷 화장품 음식물 값은 나중에 돈을 줄 때 제하고 준다고 했다. 우리들은 주인에게 시장에서 무엇을 사다 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는데, "그러면 나중에 가지고 나갈 돈이 적어진다"고 주인이 말하기도 했다. 나는 일본이 이겨야 돈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해서 일본이 이기라고 기도하기도 했다.
군인들은 일본 여자보다 조선 여자들이 깨끗하다고 더 좋아했다. 계급이 아주 높은 군인들은 예쁘고 똑똑한 조선 여자들을 골라 차에 태워 부대로 데려가기도 했다. 나도 불려가 이즈미라는 군인과 특별히 가까운 관계를 맺게 되었다. 나이가 쉰 살쯤 된 사람이었다. 계급도 아주 높아 보였다. 이즈미를 만나기 위해 부대 안으로 들러갈 때나 이즈미와 함께 밖으로 바람을 쐬러 나갈 때면 군인들이 양 옆으로 늘어서 총을 높이 들고 무엇이라 큰 소리로 구호를 외쳐댔다.
이즈미는 전투가 잠잠하여 시간이 날 때는 졸병을 시켜서 나를 불러들여 2, 3일간 자기 방에서 재웠다. 부대가 먼저 이동해서 위안소와 멀리 떨어져 있을 때면 배를 보내 데려가기도 했다. 어느 날 이즈미를 만나기 위해 배를 타고 강을 건너는데, 강을 메우도록 많은 시체가 떠내려 가는 것이 보였다. 강물은 온통 핏빛이었다. 이즈미를 자주 만나면서 나는 이 사람을 아버지 겸 남편 겸, 한 식구로 생각하게 되었다. 숫자와 일본어도 직접 가르쳐 주는 등 나에 대한 이즈미의 사랑은 극진했다. 날마다 사랑한다고 말했고, 전쟁이 끝나면 일본으로 데리고 들어가서 고생 안시키고 학교도 보내 주면서 같이 살 것이라고 늘 말했다.
무일푼의 귀향
위안소 생활을 한 지 3년쯤 지난 해(1940) 2, 3월경, 이즈미는 내가 자주 아프고 전쟁도 점점 위험하게 될 것 같으니 안되겠다고 하면서 고향의 집에 돌아가 있으라고, 그러면 꼭 찾으러 가겠다고 했다. 나는 같이 있던 친구 네 명과 같이 조선으로 나가겠다고 했다. 이즈미는 주인에게 우리 일행을 보내라고 명령했다. 주인은 워낙 높은 사람의 명령이라 거부할 수 없으면서도 "일본이 곧 전쟁에서 이길텐데, 그러면 돈도 받을 수 있고 좋을텐데, 왜 가려고 하느냐"면서 싫어했다. 이즈미는 "나중에 일본으로 불러 돈을 줄지도 모르니, 여기로 다시는 올 생각일랑 말라"고 했다.
우리는 돈도 한 푼 못받고 떠나 왔다. 이즈미가 100엔을 준 것이 전부였다. 이즈미는 귀향증을 여러 장 만들어 주었다. 이것을 역에서 보이면 기차를 태워 주고, 트럭이나 배도 태워 주었다. 먹을 것, 잘 곳 등도 불편 없이 해결해 주었다. 중간에 평양인가 어디에서 어떤 조선 사람이 "이 사람(이즈미)을 어떻게 아느냐"고 물어 보았다. 이즈미가 준 종이에는 "이 사람은 군에 와서 일하다가 병이 나서 조선에 병 고치러 가니, 경상남도 어디까지 가는 차편, 식사를 제공하라"고 써 있었다고 한다.
남편의 죽음
20일쯤 걸려 합천군 삼가면의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이웃 사람들이 수군대는 것 같고 사는 것도 가난하여 다시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서울로 올라왔다. 이즈미에게서는 계속 편지가 왔다. 나도 답장을 했고, 소포도 보냈다. 미숫가루나 고춧가루 같은 것을 보내면, "고춧가루는 먹고 메워서 죽을 뻔했다. 나를 죽이려 했느냐"고 농담을 걸어 오기도 했다. 또 "편지 철자법이 틀렸다"고 하는 등 웃기는 편지를 쓰기도 했다. 서울살이가 힘 들어 답장을 자주 하지는 못했지만, 몇 년간 남경에서 이즈미의 편지가 오다가 해방 한두 해 전에 끝어졌다.
종로의 낚시여관에 있다가 가방공장에도 다니고, 구멍가게도 하면서 살았다. 6.25 전에 장사를 하는 사리원 사람의 첩으로 들어가 같이 살게 되었다. 나와 본처는 처음부터 사이가 좋았으며, 지금도 서로 왕래하며 산다. 나는 아들 둘과 딸 하나를 낳았다. 큰 아들은 지금 트럭 운전을 한다. 남편은 20년 전에 심장마비로 죽었다.
위안부 생활에서 얻은 방광염 자궁병 정신불안 등 많은 병이 지금까지도 나를 괴롭히고 있다. 담석도 있고, 빈혈도 심하다. 지금까지 분하고 원통한 내 지난 과거를 묻어 두고 살았는데, 이제 다 말하고 나니 속이 후련하다. 큰 아들은 내 이야기를 듣고, "어머니, 그렇게 험한 과거를 가지고도 열심히 잘 사셨어요. 장해요"하며 흐느껴 울었다. 그러나 작은 며느리는 비관에 빠져 있다. 작은 아들도 맥이 하나 없는 모습이다. 이 아이들 모습을 보면 가슴이 메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