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집에 경상도 시골에서 온 할머니가 한 분 다녀가셨습니다.
깊이 패인 굵은 주름살과 몇개 남지 않은 이, 그리고 휜 허리,
농사일로 평생을 보낸 그 할머니가, 지난 태풍으로 인해
1년 농사가 헛일이 되었다며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분의 마디진 손가락은 온통 검게 물들어 있었습니다.
호두 농사라도 건져보려고 강풍 속에서 호두를 따고
손질하느라 검은 물이 배었다며, 시골서 가져온 호두 한 줌을
건네 주더군요. 차마 받기 민망해 사양하려했지만, 시골 인심
그렇게 박대하는 것 아니라는 할머니의 따뜻한 꾸중에
그 눈물의 호두를 받아들고 돌아왔습니다.
어제, 그날은 고이경해씨의 유해가 한국에 도착하던 날이었습니다.
하루종일 굵은 비가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듯 내렸지만
피해복구로 지친 농민들의 가슴을 더욱 적시는 빗줄기같아
괜스리 원망스러운 마음이 들기까지 하더군요.
오늘도 농민들은 `농업주권`을 외치며 고이경해씨
추모 촛불을 들고 집회를 가졌다고 합니다. 미국 주도의
`WTO`체제의 폭력성을 규탄하고, 한국정부의 무기력한 대응을
비난하는 뜨거운 울림이 광화문에 메아리친 모양입니다.
우루과이라운드 협상 이후 10여년 넘게 농업정책은 혼란을
거듭해왔고, 지금 농촌은 50대 이후 노인들만이 빚더미에
눌린 채 우리 농업의 사망신고를 기다리고 있는 형편이란 걸
누구나 다 알고 있을 겁니다.
개방농정이라는 틀 속에서 세계 농업을 묶고 세계 농업인을
배고프게 하는 `WTO`체제에 대한 우리 정부의 속수무책은
차마 비판하기조차 번거로울 지경입니다. 식량주권의 문제를
이처럼 안일하게 접근하는 정부, 그리고 농민과 농업의 현실을
너무 멀게만 생각하는 우리들에게 더욱 철저한 반성이
요구되는 때입니다. 한국 농업에 완전한 사망선고가 내려지
기까진 별로 시간이 많지 남지 않은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