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작동국군묘지(1956년 음력 4월 그믐날 상경)
묘지는 묘지인데 무덤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습니다.산에 곱게 식목한 나무들은
아직 어려서 7살 소년의 키보다도 작았습니다. 광장 안쪽 끝에 있는 다리를 건너
간 허허벌판에 군용 천막을 치고 살았습니다. 해가 중천을 향하여 떠오르면서 천
막이 달구어지면 천막 아래에서 놀 수가 없는 소년은 그늘을 찿아다녔습니다. 다
리 밑에 가면 돌이 많아서 재미없고,벌판 아래쪽으로 한참 내려가면 시퍼런 강물
이 서서히 흐르는 강에 이르게 되는데 너무나 가파른 언덕 위의 큰 수양버들 그늘
에 앉아서 뱃놀이하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재미는 조금 있는데 햇빛이 숭숭 버
들가지 사이로 들어오는 바람에 영 성이 차지 않고 게다가 잠실 쪽으로 트럭이라
도 어쩌다가 지나가게 되면 후딱 일어나도 신작로의 먼지를 뒤집어 쓰는 바람에
영판 재미가 없었습니다.그러다보니 그래도 늘 찿아가게 된 그늘로 갔습니다.어
떨 때는 그 다리 위로 걸어가고 있는 소년에게 일하고 있던 인부들 중의 한분이 '거기 가서 놀지마라. 귀신 나온다'
라고 해도 아랑곳하지 않고 갔습니다.귀신이 무언지도 몰랐고 귀신이 나오는 것
을 본 적도 없었습니다...,하옇든 그림자도 얼씬거리지 않는 2살 많은 누나가 먼
곳에서 '저녁 먹어라'라고 할 때까지 놀았습니다.
텅 빈 광장에는 유일한 건물이 있었습니다. 2~3층 높이의,샛빨간 칠을 한 ,창문
조차 한개도 없는,직육면체의 건물이었습니다.그 건물 그늘에서 혼자 땅따먹기
도 하고 가이생도 하고 비석치기도 하고 하는 등,재미있게 놀았습니다.때로는 지
나가던 군인 아저씨가 주는 건빵을 먹기도 하고 때로는 맨땅에 누워서 자기도 하
였습니다. 그렇게 한여름을 보냈습니다; 그 큰 건물의 문은 좀처럼 열지 않았습니
다.흑석동쪽 산 아래에 있는 사무실에서 손님과 군인 아저씨가 광장을 가로질러
왔을 때만 주로 열었습니다.손님 중에는 신사복을,흰 두루마기를 입은 분도 있었
고,나들이옷이나 소복을 입은 분도 있었습니다;문이 열립니다.백열등이 켜지고
사람들이 들어갑니다.그 안에는 무언가가 높다랗게 차곡차곡 하나가득 쌓여 있습
니다.때로는 군인아저씨가 높다란 사다리 끝까지 올라가기도 하는 등하여 똑같
이 생긴 물건을 손님에게 갖다줍니다.대체 무슨 물건인 것인지,그것을 받아 가지
고 가슴에 안고 한 손님이 웁니다.그 손님을 껴안고 다른 손님도,손님들도 웁니
다.오열통곡을 합니다.너무나도 슬프게 웁니다.(10만명에 달하는 생이별하여 죽도
록 보고싶어도 이미 유골이 되어 볼 수 없는 영령들도 모두 함께 웁니다) 문에
선 채로 멍하게 바라보는 소년의 눈에도 눈물이 글썽글썽합니다.문만 열렸다하
면 눈물 바다가 되니, 도대체 알 수가 없었습니다.고개를 갸웃둥해봐도 안되
고.... 일하는 인부 아저씨한테 여쭈어 보아도 가르쳐주지 않았고 할머니도 가르쳐
주지 않았습니다.노상 그 그늘에 가서 노는 줄 아는 분들이고 어느 사이엔가 ,다
른 곳에서 노는 것이 보이면 '그늘에 가서 놀아라. 더위 먹을라'라고 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세월이 가면서 차차 그
눈물의 의미를 알게 되고 알고나면 또다시 어떤 의문이 생겨 가지고 그것을 풀려
고 고민하게 되는 길로 가게 될 수밖에 없었나 봅니다.아직 문제를 다 풀지도 못
하고 주저앉으면 안되는데 안되는데.............
참조;인간은 누구나 자기자신과 토론할 능력(지적본능)을 가지고 태어난
다. 이것은 모든 교육의 어머니!
참조;a.1.2.2.1.1.; 스페인은 무적함대가 궤멸한 시절에 카톨릭국가임을 자랑하여 종교개혁을 거부하고 종교의 자유가 없었다.그 결과, 스페인자체의 공업화(산업화)가 초기단계에서 질식 사양했다. 게다가 중남미 라틴아메리카의 식민지에 대한 정책 강령중의 강령은 본국의 공업시설을 식민지에 설치하지 않는 것 즉 기술이전을 원천적으로 봉쇄한 것이었다. 이 점은 근본적으로 영국의 식민지미국과 다른 점 중의 하나.a.1.2.2.1.2.;일제는 산업혁명을 이룩했지만 식민지인 우리나라에 대한 식민정책은 철저한 기술이전봉쇄였다. 최근의 일본 사이비학자나 관료가 당시에 일제의 도움이 있었던 양 주장한 것은 망언이었다. 1965년 한일협정 이후 서울 등 한국에 들어와 있는 일본기업지사에 근무하는 한국인에게는 보직이 주어지지 않았는데 ,이 점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고 ,목하 일본에 귀화한 재일교포 2,3,4세가 일본국공무원이 됬을 경우에 평생 말단공무원 신세를 면하지 못하고 차별 받는 점도 이와 무관하지 않으리라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