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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교평준화제도의 허구성

고교평준화제도의 허구성



글쓴이 : 김한응 (hane9kim) 글 올린 시간 : 2004-09-20 오후 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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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교평준화제도의 허구성



교육부가 몇 몇 사립대학교들이 수시 1학기모집에서 “고교등급제”를 적용했는지의 여부를 감사하기로 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각 대학교에서 자기들이 교육시키기에 가장 적절한 준비가 되어 있는 학생을 대학자율로 선발하는 것은 적어도 교육을 효율적으로 시키고자 하는 대학교의 입장에서 보면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더욱이 평준화제도의 실시로 사교육비가 가정을 파괴할 정도로 상승하는 등 부작용이 속출하고 각 고등학교 사이에 학력차가 분명히 드러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현실을 무시한 채, 고교평준화가 가정하고 있는 비현실적인 원칙에 입각한 입학제도를 고집하는 것은 옳다고 보기 어렵다.



어떤 제도라도 현실과 괴리가 생기게 되면 고쳐져야 한다. 현실과 떨어졌는데도 그것을 고수하면 그 제도만 망하는 것이 아니라 그 제도를 껴안고 있는 국가나 사회까지 망할 위험이 있다. 그런 것의 대표적인 예를 든다면 공산주의 체제와 조선조일 것이다.



공산주의 체제는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한다.”는 누구에게나 설득력이 있는 매력 있는 구호로 출발하였다. 처음에는 공산주의 체제의 이런 매력 때문에 선진국 대부분이 공산주의가 자국으로 침투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전전긍긍했었다. 그러나 열심히 일한대로 보상을 받지 못하는 상황이 오래 지속되어서는 “능력에 따라” 열심히 일할 사람이 없어지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산주의 체제는 능력과 보상이 비례하지 않아도 잘 될 수 있다는 이상(가정)을 버리지 않았다. 그리하여 약간의 시간이 흐르면서부터 현실과 이상 사이에는 허구(虛構)가 끼어들기 시작하였다. 그 증거로는 공산주의 말기의 현상을 들 수 있다. 각 가정에는 급여 등으로 받아놓은 현금은 많이 있었으나, 그 돈으로 살 수 있는 물건은 귀했다. 그리하여 예컨대 식량을 구함에 있어 돈은 거의 필요가 없어졌고 정부가 나누어 주는 배급권이 훨씬 더 중요하게 되었다. 능력에 따라 일할 사람도 없었지만, 필요에 따라 분배하는 일은 완전히 실패했음이 분명히 드러났다.



조선조가 얼마나 허구로 가득 차있었느냐는 호질(虎叱)문이라는 박지원의 단편소설에 잘 나타나 있다. 조선조에는 모든 양반들이 도덕적으로 올바르게 사는 것으로 가정되어 있었으나 실제로는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나쁜 짓만을 골라서 하고 있었다. 이런 사회가 양반은 도덕적이라는 이상(가정)을 개혁하지 못하고 격변하는 현실에의 적응에 실패하면서 패망으로 빠지게 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였다.



공산주의 체제나 조선조가 이처럼 망한 것은 인간은 사리사욕을 떠나서는 살 수가 없다는 현실을 인정하지 않은 때문이었다. 공산주의 체제는 공산주의자가 이타(利他)적으로 살 것이라고 가정하였고 조선조는 양반이 모두 도덕군자라고 가정했던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 공산사회의 모든 사람들이나 조선조의 양반들은 모두 개인적인 사익을 더 중요시하였다.



고교평준화제도에 허구가 차게 된 것은 그 가정(이상)이 잘못된 때문이다. 어린 나이인 중3 때에 힘든 경쟁을 하게 하는 것이 안타깝다고 따라서 그에 대해 무엇인가를 해보자는 것 까지는 좋았다. 그러나 이 제도는 어린이들부터 남보다 앞서 가서 더 잘 살아보겠다는 사익추구 본능이 있음을 간과했다는 잘못이 있다. 어린이는 말할 것도 없고 그 학부모들까지도 자기 자식이 잘되기를 바란다는 점을 이 제도는 전혀 고려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 결과는 얼마 전 한나라당 국회의원의 자료에서 극명하게 나타났다. 사립학교와 공립학교 사이에서만이 아니라 공립학교 사이에서도 학교 차이가 분명하게 드러난 것이다. 즉 고교평준화제도는 현실적으로 존재할 수 없는 제도인 것이 증명된 것이다. 상황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교육부는 “고교등급제”를 절대로 허용할 수 없다고 하고 있고, 전교조는 이에 대해 법적 조치를 취하겠다고 하니, 제도의 허구가 드러났는데도 그런 잘못된 제도를 지키겠다는 것인가?



허구에 가득 찬 제도를 그대로 끌어안고 있으면 우리나라가 어떻게 될지를 교육부와 전교조가 모른다는 말인지 아니면 우리나라가 망해도 고교평준화제도를 지키겠다는 뜻인지 모를 일이다. 조만간 우리 경제는 중국에 의해 추월당할 것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우려하고 있다. 중국에 추월당해서 조선조 말기와 같은 불행을 당할 위험이 있어도 고교평준화제도를 지킬 가치가 있는가?



지난 번 월드컵에서 우리나라가 4강까지 가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히딩크 감독이 선수들 간에 경쟁을 붙여놓고 그것을 객관적으로 공정하게 평가한 것이라고 한다. 축구도 이러할 진 데, 국가의 존망을 결정할 인재를 구하는, 훨씬 더 어려운 일을 고교평준화와 같은 온정적이고 경쟁을 억제하는 방식으로 해결할 수 있을까?



그런데 불행하게도 이처럼 온정적인 아이디어로 이루어져 있는 제도가 원래의 의도대로 좋은 결과를 가져오지 못하는 경우는 허다하다. 비정규직을 보호하려는 제도가 비정규직에게 오히려 불리하게 작용하여 그들의 고용을 불안하게 만들고, 여성근로자를 보호하자는 제도가 여성근로자의 취업기회를 오히려 줄이는 효과가 있음을 우리는 이미 경험하고 있다. 노조가 강성화되면 현재의 근로자들의 직장은 안정될지 몰라도 후대의 근로자의 취업기회는 그에 비례하여 줄어드는 문제가 생긴다. 우리나라에서 지금 청년실업이 늘어난 데는 이런 요인이 가장 크게 작용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경제가 잘 되려면 교육부터 잘되어야 한다. 교육이 잘되게 하는 제1차적 조건은 학생들과 학부모들의 희망, 솔직하게 말하면 그들의 이기심 즉 성공하려는 욕망을 인정하고, 이것이 최대로 효과를 발휘하도록 해야 한다. “고교등급제”가 실제로 시행되었는지의 여부는 알 수 없으나, 그 결과로 자기 자식들이 불리한 대우를 받았다(또는 그럴 것이라)고 의심하는 학부모들도 따지고 보면 자기 자식이 잘 되기를 바라는 희망 즉 사욕이 있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모든 학부모가 똑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전제하지 않으면 해결할 길이 없다. 그런 가정 위에서 현실성 있는 유일한 해결책은 모든 학생들에게 공평하게 경쟁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대학교에는 자기들 학교의 이상실현에 가장 적합한 학생을 뽑을 수 있는 자유를 주는 길이다. 여기에 더해서 학부모에게는 자기 자식의 실력을 가장 향상시켜줄 학교를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주어야 하고, 사학에게는 사학 설립자의 이상을 최대로 실현시킬 수 있는 최대한의 자유를 주어야 할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교육에 다양성과 활기를 부여한다면, 우리가 월드컵에서 4강을 달성한 것처럼, 중국이 우리를 추월할 생각을 포기하게 만들 정도로 우리 경제는 신속한 발전을 지속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