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팔복에 대하여...(신앙인에게 주신 여덟가지 복음--이것이 참 복음입니다..오중복음과 비교해 보십시오.)
제가 신앙의 단계라는 글을 쓰고 난 후 어떤 분이 묻기를 그런 신앙의 단계가 성경 말씀에 의해 증명되냐는 것이었습니다. 생소한 말씀도 아니고 이미 널리 퍼진 말씀에도 그리 물으시니 이상한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그 글은 산상보훈의 팔복음을 기준으로 작성된 것입니다. '복음'이란 '복된 음성'의 준말이니 예수님께서 가르치신이 '팔복음'이야말로 '복음 중 복음'이며 이 팔복음에 비추어 보면 조용기씨의 오중복음이 얼마나 인위적이며 거짓된 것인가는 금방 드러나 버립니다. 왜냐하면 이 팔복음은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단계를 명철하게 설명하고 있기때문입니다. 아주 간단히 설명해보지요.
1.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요.
여기서 '심령이 가난한 자'는 겸손한자를 말합니다. 즉 자신의 죄악성과 한계와 교만을 깨닫고 낮아질대로 낮아진 자를 말합니다. 예수님께 늘 질책을 당하던 바리새인들이 자기의 죄없음을 자랑하는 교만한 자라면 감히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짖기에도 두려워 자기는 죄인 중에 죄인이라고 고백하는 세리같은 이가 심령이 가난한 자입니다. 인간은 이와같이 낮아지고 낮아진 상태에서야 비로소 하나님의 자비를 간구하는 단계가 되지요...이렇게 심령이 가난해질대로 가난해진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천국이란 믿음의 시작점인 심령의 평온 상태를 말합니다. 즉 신앙인이 갖춰야할 첫 시작은 낮아질대로 낮아져야 하며, 그렇게 되면 그심령에 진실한 하늘의 복인 평온을 위한 준비가 시작된다는 말씀입니다.(물론 이 평온은 진실한 평강과 화평을 맞이하기 위한 첫단계에 불과합니다. 그 다음 복음에서 회개를 요구하시고 있는 까닭입니다.)
2.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이요.
이제 낮아질대로 낮아진 신앙인은 애통해하며 자신의 죄를 하나님 앞에 '자복'해야 합니다. 즉 심령이 가난해 진자는 인간적인 평온이 아니라 진실한 평강과 평온을 위하여 '회개'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를 어느 목사님은 이렇게 설명하셨습니다.
'고린도후서 7;10에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를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라"'
즉 성령님은 심령이 가난해져서 낮아질대로 낮아진 자에게 죄악을 깨닫고 근심케 하여 회개하도록 합니다. 이렇게 자신의 죄악을 회개하는 것, 이것이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위로를 받는다는 뜻은 죄사함과 함께 평강과 평온을 주시겠다는 의미입니다. 이 평온은 인간이 다시 범죄케 되면 금방 잃고 맙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영접한 그 첫마음을 우리가 늘 유지해야 합니다.
3.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이제 자신의 '죄악성'을 깨닫고 예수님을 마음에 영접하여 죄사함의 은혜를 받은 자의 심정은 온유해져야 한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진실로 예수님을 마음에 받아들인 사람은 그 마음이 온유해질 수 밖에 없다고 가르치심은 자신이 진정 예수님을 영접했는가 가리는 기준이 됩니다. 아직도 온유한 마음이 없다면 그는 진실로 예수님의 은혜를 체험하지 못했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저부터 말입니다. 여기서 온유한 자는 곧 자기 죄를 사함받은 자가 '자기에게 죄지은 사람을 용서하는 자'입니다.
마음이 온유한 자들이 받는 복은 기업입니다. 사실 성공한 사람 중에 온유한 성품의 사람이 꽤 되기는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땅의 기업은 세상에 속한 땅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육에 속한 축복을 젖먹이에게 주시는 축복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장성한 자에 대한 축복은 하늘나라의 기업입니다.
베드로전서 1;4에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한 것이라" 한 말씀을 기억하시고 '기복주의 신앙' '세속주의 신앙'에 매달리지 말아야 합니다.
4.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이요...
의에 주린 자에서 의란 '흠이 없는 것' '공의'(박성환 목사님의 주석)를 말합니다. 다시말해 세상 것에 무게를 두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속성을 담고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닮고자 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자에게는 '영적인 배부름' 영혼의 축복이 있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영혼을 거룩하게 하시고 그 축복으로 온전히 거듭나게 하신다는 의미입니다.
5.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요.
이제 신앙인이 4번째 단계를 지나 다섯번째 단계로 들어서면 '사랑의 실천'을 위해 최선을 다해야한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긍휼히 여기사 우리를 위하여 스스로의 목숨을 내 놓으시며 말씀 하신 바대로 '이와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를 실천하는 단계가 이 단계입니다. 이렇게 타인에게 긍휼을 베푸는 자는 곧 긍휼히 여김을 받는 복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기를 중단하지 아니하면 하나님도 우리를 더욱 어여삐 여겨 사랑하신다는 말씀입니다.
6.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이제 '사랑의 실천'단계에 있는 신앙인이라면 마음을 항시 긴장시켜 불경한 것들이 침투할 기회를 주지 말아야합니다. 그 말씀이 바로 위의 말씀입니다. 이렇게 마음을 청결히 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거룩하심과 사랑'을 늘 묵상하며 스스로의 행위를 돌아 봐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볼 것이라 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을 볼 것이란 의미는 문자 그대로 두 눈으로 하나님을 본다는 것이 아닙니다. 늘 마음을 다해 예수님을 닮기를 간구하면 하나님의 모습을 바로 알게된다는 말씀입니다. 즉 성경의 참뜻과 의미를 깨우치고 하나님의 모습과 속성을 만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7.화평케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이제 여섯개의 복을 모두 받은 자는 '주의 증인'으로서 살아가게 됩니다. 어디서나 '사랑의 실천'으로 예수님을 증거하게 됩니다. 화목에는 두가지가 있는 데 그 하나는 '하나님과 사람과의 화평'이요 또 다른 한가지는 '사람간의 화평'입니다. 이 모두를 가능케 하는 이가 온전한 신앙인이라 할 수 있으며 이렇게 될 때까지 성령님은 각 단계마다 신앙인을 단련 시키십니다. 때로는 불만족스런 환경으로, 때로는 사람들간의 문제로, 때로는 신앙의 문제로 시험하시고 단련시키십니다. 그러나 신앙인이라면 이 일곱번째 복의 단계가 될 때까지 방심하지 말고 최선을 다해 예수님을 닮은 삶을 이뤄가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 분의 자녀 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8.의를 위하여 핍박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마지막 복음에서 이젠 예수님을 닮기 원하여 그 분의 의를 세상에 전할 때에 권력자가 혹은 힘있는 자들이 핍박하더라도 두려워 말라 하십니다. 그러면서 다시 한번 '천국이 저희 것이라' 하시는 데 이는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 주었던 마음의 평온이 아니라 정말 천국을 말합니다. 기독인들이 꿈꾸고 갈망하는...
부족하지만 예수님의 팔복음을 설명 해 봤습니다. 물론 어느 분이 '신앙의 5단계'를 설명하는 제글이 성경적 근거로 이루어졌냐고 물으셨기에 그 증거로서 쓰게 됐음을 고백합니다.
이제 제가 이글을 읽은 분들에게 묻고자 합니다.
'
예수님의 '팔복음'이 기독교인이 지켜야할 모든 원칙과 신앙을 단계별로 명확하고도 거룩하게 설명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조용기씨는 이상스러운 '5중 복음'이 왜 필요했던 걸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