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근조 15회공인중개사 시험 [원문보기]
글쓴이 : 전종만
나는 <손해배상청구소송>으로 간다.
-전제
나는 15회 공인중개사시험의 무효를 주장하지 않는다.
오직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원할 뿐이다.
-손해배상청구의 원인
15회 공인중개사시험은 응시자의 평균 능력으로 1문제당 1분을 적용하여 200문제를 200분내에 풀수 없을 뿐만 아니라, 대다수의 응시자가 200문제를 끝까지 읽어보지도 못하였다. 이는 시험출제자와 응시자간의 상호신뢰에 대한 배신행위이며 반사회적행위이다.
나의 시간은 지난 일요일 부동산학개론과 민법을 풀던 10시 40분경 절망을 느끼던 그 순간에 정지했고, 나의 공간은 부동산학개론과 민법사이 뻥뚫린 공간으로 한정되었습니다. 나는 아직도 그날의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시간이 정지한 어두운 공간속에 홀로 서있습니다. 시험에 떨어져서가 아닙니다. 시험은 붙을 수도 있고, 떨어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문제를 읽어는 봐야 할 것 아닙니까? 문제를 읽을 시간은 줘야할 것 아닙니까? 이런 나의 생각이 상식밖의 행동입니까? 나는 지금 내 상식을 의심하고 있습니다. 내가 비상식적이었는지 출제자가 비상식적이었는지를 판가름하기 이전에는 아무일도 할 수 없을만큼 가치관과 정체성의 공황을 체험하고 있습니다.
어제는 밤새 인터넷에서 공인중개사시험 관련 글들을 읽어보았습니다. 무효와 재시험이 대세의 흐름으로 보였습니다. 오늘은 여의도집회에 참석하였습니다. 이곳에서도 역시 무효와 재시험만을 주장할 뿐 그 누구도 손해배상청구소송에 대해서는 말을 꺼내지 않았습니다.
가령 자동차사고가 났다고 가정해 봅시다. 여러분은 자동차를 상대로 울분을 터트립니까? 아니면 자동차를 운전한 운전자와 시비를 가립니까?
원인은 시험문제가 아니라 시험문제를 출제한 출제자에게 있는 것입니다. 자동차에 대고 아무리 떠들어봐야, 시험문제를 아무리 비난해봐야 달라지는 것은 없습니다. 제도를 바꾼다고 세상이 달라지지 않습니다. 사람을 바꿔야 제도가 바뀌고 세상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까지 시험문제만을 대상으로 소송을 해왔기때문에 오늘 이와 같은 황당일을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도 출제자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지 않았기때문에 오늘 이와 같은 황당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출제자들을 상대로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제기하지 않으면 지금 우리가 눈물을 흘리듯이 다음엔 내 자식들 눈에서 피눈물이 쏟아질 것입니다.
출제자에겐 시험출제에 관한 권한과 의무가 있습니다. 응시자에겐 응시에 관한 의무와 권리가 있습니다. 출제자는 자신의 권한으로 시험을 실시했고, 우리는 응시자의 의무를 성실히 이행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의무이행에 기한 권리를 행사할 수 있고, 출제자들은 권한행사에 기한 의무와 책임을 우리가 그랬듯이 성실히 이행하여야 할 것입니다.
공무원을 상대로 책임자를 결정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몸통은 도망가고 깃털만 남았던 일이 어디 한두번이었습니까? 그러나 이번만은 다릅니다. 부동산중개업법 시행령 제12조, 제13조에 출제위원, 시험위원회가 명시되어있고 이들은 건설교통부장관이 임명 또는 위촉한다고 규정되어 있으며 건설교통부장관은 시험위원회의 위원장이자 시험위원회의 의장이 된다고 똑똑하게 법으로 정하고 있습니다.
아무도 빠져나가지 못합니다. 어설프게 과실의 유무를 따지지 않아도 됩니다. 우리는 오로지 상대방의 악의만 주장하면 됩니다. 상대방이 끝끝내 몰랐다고 우기면 직무유기와 직무태
만을 스스로 자인하는 결과가 될 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16만 점에 달하는 증거물이 확보되어 있습니다. 잘 보관하고 계시리라 사료되는 15회 공인중개사 시험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누구든 우리의 주장이 터무니 없다고 한다면 직접 풀어보라고하면 됩니다. 아니, 다 읽기만이라도 해보라고하면 됩니다.
이번 사건은 그 선례를 찾아 볼 수 없을 만큼 황당한 사건입니다. 그러다보니 적절한 낱말이 없어 기존에 사용하던 ‘난이도’ 라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일반인들은 난이도는 출제자의 고유권한이라며 우리들의 행동을 억지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실제 건설교통부장관의 사과 발언에서도 사태의 심각성을 왜곡하기 위해 난이도만을 운운하였습니다. 본 사건은 난이도의 차원에서 논할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여기서 난이도 라는 낱말을 쓰지 않습니다. 이번 사건은 난이도에 대한 논란이 아니라 ‘출제폭력’ 에 대한 항거입니다.
나는 출제자들의 출제폭력에 대해 무효를 주장하지 않습니다. 마치 자격증을 구걸하는듯한 인상을 심어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 자신이 왠지 비굴해지는듯하기 때문입니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밟혀도 안 밟힌 척하는 경우를 많이 봐왔습니다. “밟기는 해도 때리지는 않은구나!” 때리면 “죽이지는 않는구나!”
말 못하는 지렁이도 온 몸으로 의사표시를 하는데, 말 잘하는 인간이 왜 침묵합니까? 왜 아부를 해야 합니까? 왜 구걸을 해야 합니까? 잘 못한 일도 없는데 왜 애걸을 해야 합니까? 이유없이 밟혔다면 최소한 아픔을 호소해야하는 것 아닙니까? 최소한 동물적 본능으로 비명은 질러야하는 것 아닙니까?
나는 비굴하고 싶지 않습니다.
나는 강한자에게 절대 눈물을 보이지 않습니다.
아무도 하지 않는 일은 바로 내가 해야할 일입니다.
나에게는 법정에 대한 추억이 있습니다.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 나는 임대차문제로 피고의 입장이었습니다. 돈 없고, 힘 없고, 배운 것도 없어 대법원 홈페이지에서 양식을 구해 직접 답변서와 준비서면을 작성했습니다. 법정에 서자 원고는 없었고 원고측 변호사만 출석해 있었습니다.
판사가 원고측 변호사에게 변론을 하라고 했습니다.
“이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냥 끝내시면 됩니다.”
판사가 나에게 물었습니다.
“피고, 이의있습니까?
“예, 이의있습니다!”
변론을 위해 증거자료를 손에 드는 순간 판사가 말했습니다.
“이의있으면 이의신청하세요. 다음, 사건번호 가단 OOOO ……”
나는 그 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머리속엔 ‘이의있습니까? 예, 이의있습니다! 이의있으면 이의신청하세요.’ 라는 말만 계속 반복해서 맴돌았습니다.
다음사건에 떠밀린 내가 증거자료를 가방에 담고 있는데 원고측 변호사가 귓속말로 말했습니다.
“나하고 나가서 잠간 얘기 좀 합시다.”
“나는 할 얘기 없습니다.”
그 날 이후 누가 나에게 조언을 구하면 나는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강자라고 생각되면 법대로 하고, 네가 약자라고 생각되면 주먹으로 해결해라.”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위해 법정변론을 한다는 것은 쉬운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말 잘하는 변호사제도가 있는가 봅니다. 변호사를 선임하기 위해서는 많은 비용이 필요한데 나에겐 그런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나 23만 응시자가 천원씩 모으면 2억3천만원이고, 만원씩 모으면 23억원 입니다. 이 정도 금액이면 우리들의 모든 요구에 대한 소송비용으로 충분하리라 생각됩니다. 저 또한 없는 살림이지만 만원한도 내에서 동참할 용의가 있습니다.
손해배상청구금액은 정신적 피해보상을 제하고도 응시자 1인당 10개월을 공부하였고 기회비용을 월 100만원으로 가정한다면 23만명의 총손해배상청구금액은 2조3천억원 입니다. 순수지출비용인 응시료, 교재료, 수강료, 교통비 등을 평균 100만원이라고 가정한다면 총순수지출비용은 2천3백억원 입니다.
현 대한민국 장관 중에 10개월 수입이 2천3백억원 이상인 사람 있습니까?
출제자들은 지금 자기가 무슨 일을 했는지 직시해야 할 것입니다.
강자를 상대로 싸우는 일은 어려운 일입니다. 특히 법적으로 대응하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정부단체를 상대로 법적 대항을 하려고 합니다. 보기에 따라선 무모한 일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나는 지는 싸움은 안 합니다.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이 설때에 싸웁니다. 나의 목표는 손해배상청구소송에서의 승소가 아닙니다. 나의 목표는 손해배상청구소송 그 자체입니다. 출제폭력에 대항하여 손해배상청구소송를 제기하였다는 선례가 바로 나의 목표입니다. 차후로 누구든 출제폭력을 휘두르면 손해배상청구소송을 면치 못한다는 관례를 만드는 것이 나의 목표입니다.
훗날 내 자식이 권력자로부터 부당한 일을 당했을 때, 2004년 11월 14일 제15회 공인중개사 시험에서 정부단체를 상대로 이 아빠가 대항했던 일을 말해줄 수 있으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승소를 하고, 재시험을 치고, 손해배상을 받아내고, 사죄를 받아내는 일은 부수적인 사안입니다. 출제자들이 그 어떤 배상을 한다해도 나의 충격은 지울 수 없습니다. 관용, 용서, 너그러움 같은 낱말은 강자가 약자에게 양보했을 때 사용하는 낱말이지 약자가 강자에게 양보 했을 때 사용하는 낱말이 아닙니다. 약자가 강자에게 양보했을 때는 비굴하다는 낱말을 사용합니다.
출제자들과 협상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손해배상청구소송과는 별개의 사안입니다.
출제자들이 협박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손해배상청구소송과는 별개의 사안입니다.
출제자들이 사죄를 하며 응시자들의 모든 요구를 들어 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손해배상청구소송과는 별개의 사안입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나는 오로지 손해배상청구소송으로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