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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사설]詩의 날, 政治의 언어를 생각한다 에 대해서

조선 [사설]詩의 날, 政治의 언어를 생각한다 에 대해서







(홍재희) ===== 친일 반민족 반민주 반 통일의 냉전 수구적인 방상훈 세습족벌사주체제인 조선일보 사설은





“ 오늘은 ‘시(詩)의 날’이다. “시여, 그대는 이 지상을 살아가는 인간을 위안하고/ 보다 높은 쪽으로 솟구치게 하는 가장 정직한 노래여야 한다.” 지난 주말 부산의 ‘명시 낭송축제’에서 낭독한 ‘시인 선언’에서 김종해 한국시인협회장은 이렇게 말했다. 인간에게 위로를 주고 인간의 격(格)을 높이는 언어의 힘에 대한 찬사이다. “







(홍재희) ====== 라고 주장하고 있다. 조선일보의 편집권에 대해서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방상훈 세습사주나 사설과 내부칼럼을 집필하는 사람들 그리고 조선일보 기자들이 시의 날에 조선일보의 지면을 통해서 소개되고 있는 조선일보의 주의주장들이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정직한 노래’ 로 받아 들여 지고 있는지 깊은 성찰을 해 보았으면 한다. 조선일보의 기사에 대해서 한국사회의 깨어있는 지성들이 변화를 지향하고 있는 국민들이 어느정도 신뢰하고 있는지 깊이 반성해 보아야 한다. 조선일보는?







조선사설은





“ 최남선의 신체시 ‘해에게서 소년에게’가 발표된 날을 기념해 1986년 만들어진 ‘시(詩)의 날’이 올해로 18회째다. 해마다 오는 ‘시의 날’이지만 올해 유난히 시의 존재가 고맙고 그리운 것은 갈수록 막말이 판치는 세태 때문이다. 특히 이 정부 들어 “깽판” “양아치”에서 시작해 “까불지 마라” “내 손아귀에 있다”에 이르기까지 열거하기에도 숨차게 이어지는 정권 실세들의 막말은 ‘시정잡배’들이 듣기에도 이미 도를 넘어섰다. 언어가 갖고 있는 소통과 이해의 미덕은 실종된 채 오로지 상대방에 대한 증오와 공격과 파괴의 언어만 횡행하고 있다. 국민들의 마음은 황폐해지고 그 언어가 지시하는 이념과 당파성에 따라 찢길대로 찢겨가고 있다. “







(홍재희) ===== 라고 주장하고 있다. 조선사설은 “ 특히 이 정부 들어 “깽판” “양아치”에서 시작해 “까불지 마라” “내 손아귀에 있다”에 이르기까지 열거하기에도 숨차게 이어지는 정권 실세들의 막말은 ‘시정잡배’들이 듣기에도 이미 도를 넘어섰다. “ 라고 주장하고 있다. 정치인들의 적절치 못한 표현의 문제점은 고쳐 나가야 한다. 그러나 조선일보의 정치인들에 대한 한국사회에 대한 폭력적 표현을 동원한 거친 기사내용은 ‘시정잡배’들 못지 않다.







(홍재희) ===== 조선일보는 이정부 들어서기 이전부터 우리 남한사람들이 한푼두푼 모은 돈으로 굶어 죽어가고 있는 북한동포들을 돕기위해 식량을 구입해 북한동포들에게 전달하는 것 조차 ‘대북 퍼주기’ 라고 수구 정치적으로 매도하며 인도주의적인 도움의 쪽박을 야만적으로 깨면서 공동체의 사회공동체의 나눔의 순수한 정서에 언어적 테러행위를 서슴치 않았다. 조선일보는 그 뿐만 아니라 교육관련 사설난을 통해서도 학생들의 교육을 책임지고 있는 교사들을 향해서 근거없이 ‘사기’ 라고 운운하는 반교육적인 막말을 서슴치 않는다. 아래내용은 조선일보 2004년 10월16일자“ [사설]전교조는 '내신 사기(詐欺)'에 대답하라” 제하의 사설 내용이다. 조선일보의 언어폭력의 실태를 잘알수 있다.



[사설]전교조는 '내신 사기(詐欺)'에 대답하라 (조선일보 2004년 10월16일자)





연세대 올 1학기 수시 지원자들의 내신성적을 보면 이럴 바에 뭣 하러 우리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공부를 시켜야 하나 하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내신 부풀리기의 실상이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73명의 학생 중 공동으로 꼴찌를 한 71등 3명도 ‘수’를 받았다. 이런 ‘전원 수’ 과목이 수두룩했다. 전원에게 수를 주는 방법은 뻔하다. 문제를 미리 가르쳐주거나, 커닝을 해도 못 본 척하고, 답안지를 되돌려줘서 고쳐쓰도록 했을 것이다. 그래서 90점만 넘으면 ‘수’를 주었던 것이다.



어떤 대학들은 이런 ‘수우미양가 절대평가’를 믿을 수 없다고 해서 대신 ‘석차백분위’를 사용했다. 상대평가를 해보자는 것이다. 그러자 고교 교사들은 ‘무더기 1등’을 만들어 냈다. 수강 학생 138명 중 134명이 1등이라는 황당한 석차 분포까지 나왔다. 다 만점을 맞을 수있는 문제만 출제한 것이다.



전교조는 이런 사정을 속속들이 알고 있었을 것이다. 자기들이 가르치고 자기들이 문제를 내고 자기들이 채점을 했을 것 아닌가. 교사가 학생들과 짜고 ‘사기 내신’을 만든 셈이다. 그렇게 학생들에게 거짓과 편법을 가르치는 교사들이 무슨 자격으로 지금까지 참교육 운운해왔던 것인가. 사기 내신에 대해 전교조가 단 한번이라도 고민하고 토론하고 자책해봤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없다.



대학들은 엉터리 내신으로는 학생을 뽑을 수 없다고 보고 내신 실질반영률을 5% 미만으로 묶었고 고교별 학력격차를 감안하는 평가방법을 개발했다. 전교조와 그 주변단체들은 그런 대학들을 향해 ‘도덕적 추락’이라며 국민 앞에 사과하라고 했다. 정말 누가 사과하고 속죄해야 하며, 진짜로 감사(監査)를 받아야 할 것은 누구인가.



전교조는 전 국민 앞에서 대답해야 할 때다. 누가 내신 사기의 주범인가, 속이려는 쪽이 나쁜가 속지 않으려는 쪽이 잘못인가, 어떻게 그렇게 태연스러울 수있는가.입력 : 2004.10.15 18:22 03'











(홍재희) ===== 조선일보가 오늘자 사설을 통해서 비판하고 있는 그 어느 정치인 들조차도 정치적 반대자들에 대해서 사용하지 않고 있는 ‘사기’ 라는 언어 폭력을 독자들을 대상으로 아무거리 낌없이 무차별 적으로 사용 있다.그러한 조선일보의 언어 폭력은 결코 정치인들 못지 않다. 방씨 족벌조선일보의 언어 폭력은 일제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방씨 족벌조선일보는 일제시대에 조선의 숫처녀들의 정조를 유린하는 일제 종군위안부 모집에 나팔수 노릇을 하기위해 반민족적인 언어 폭력을 동원해 조선숫처녀들에 대한 인격살상행위를 서슴치 않았고 반민족적인 언어의 폭력을 통해 일제에 충성을 맹세하며 조선의 나이어린 학생들을 일제의 침략전쟁에 내몰아 수도없이 숨지게 하는 반민족 범죄행위를 자행하고도 그런 사실에 대해서 일제식민지지배체제에 애국하는 길이라고 반민족적인 언어 테러의 일상을 보여줬다.







(홍재희) ====== 조선일보는 전두환 신군부가 광주시민들을 학살하는 행위에 대해서 구국의 결단으로 신용비어천가를 부르면서 한편으로 전두환의 쿠데타에 맞선 광주시민들을 폭도라고 매도하며 언어폭력을 사용해 광주시민의 민주화에 혼을 향해 언어적 테러를 가차없이 가했다. 조선일보는 광주시민들의 민주항쟁에 대해서 폭동이라는 언어폭력을 통해 한국의 민주화운동에 혼을 유린하는 언어의 도발을 통해서 그 시대를 살아가는 민주시민들의 소통과 이해의 정상적인 흐름에 치명적인 걸림돌역할을 했다. 그런 조선일보가 지금 누구를 비판하고 있는가?







(홍재희) ====== 조선일보는 탈냉전 시대에 전혀 생산적이지 않은 시대착오적인 색깔론을 밑도 끝도 없이 확대재생산 시키면서 민족화해시대에 남북간의 화해협력에 찬물을 뿌렸다. 조선일보는 그에 그치지 않고 탈북동포가 북한으로 돌려보내달라고 1인 시위를 벌이자 멀쩡한 그를 의학적인 전문적 검증도 없이 정신이상을 보이고 있다는 보도를 통해 개인의 인권을 서슴없이 유린하는 언어적 폭력을 최근에도 일삼고 있다. 그런 조선일보의 반민족 반민주적 반통일적 반인권적인 언어폭력의 세습화는 대한민국의 그 어느 정치인들이나 정치집단도 따라갈수 없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방씨 족벌 조선일보만의 ‘전매특허’ 이다.







조선사설은





“ 이인호 서울대 명예교수가 지난달 29일 열린 한 토론회에서 “이 같은 독선과 무지의 언행은 현 정부 출범 후 가장 두드러진 변화인 반(反)지성주의의 결과”라고 한 것은 정확한 진단이다. 선동과 영합의 포퓰리즘 정치세계에서 언어는 상대에 대한 전투 수단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이를 막고 언어의 질과 격을 높이는 것은 지성(知性)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그 지적(知的) 행위의 끄트머리에 시가 존재한다. “







(홍재희) ======= 라고 주장하고 있다. 조선일보와 이인호 서울대 명예교수에게 묻겠다. 방씨족벌의 현 정부 출범이전부터 조선일보가 친일 반민족적인 범죄의 언행과 국사독재체제와의 권언유착을 통한 반민주 반 언론자유의 언행과 반인권적인 언행을 통한 반인륜적이고 반인본주의적이며 반 인도주의적이고 야만적인 행태는 어떤 결과에서 비롯됐는지 묻지 않을수 없다. 서울대 이인호 명예교수는 방씨 족벌 조선일보가 군사독재체제와 권언유착해서 한국의 민주주의를 말살하는 군사독재를 칭송하는 언행의 폭력성을 통해 대한민국을 공포의 통치로 몰고가고 있을때 왜 지성인 답게 조선일보의 야만적인 언행에 대해서 당당하게 비판하지 못하고 오늘에 조선일보의 부정적인 언어의 정체성이 고착화 되도록 방치 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홍재희) ===== 조선일보는 일제시대에는 반민족의 친일 반역을 위해 한민족이 일본왕에게 충성할 것을 선동했고 군사독재체제에는 정통성 없는 정치권력이 자행하고 있는 폭력적 언행에 대해서 구국의 결단이라고 미화하며 한국사회의 민주질서에 치명적인 언행으로 일관했다. 이러한 방씨 족벌 조선일보의 선동과 전투적인 권언유착의 사적인 이익극대화에 악용되었기 때문에 대한민국의 지성들이 정의로운 목소리를 낼수 있는 조선일보의 지면은 전혀 제공되지 않았고 민주와 인권과 정의로운 목소리가 조선일보의 지면을 통해 독자들과 의사소통할수 있는 기회자체를 방씨 족벌 조선일보 가 스스로 차단했다. 그러한 방씨 족벌 조선일보의 일제시대때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언어적 폭력의 일상화는 조선일보가 오늘자 사설을 통해서 비판하고 있는 정치인들의 언어표현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홍재희) ===== 특히 조선일보 기자츨신 정치인들의 자기 기만적이고 반지성적인 언어적 폭력의 문제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전두한 정권시절의 조선일보 기자출신 장관과 차떼기 부패정당인 한나라당의 당 대표를 지냈던 조선일보 편집국장출신의 정치인들이 국민들을 상대로 한 거짓과 위선의 언어적 기만행위는 조선일보의 언어폭력의 일상화라는 시대착오적 관행을 그대로 몸에 답습한채 정치계와 행정부에 들어가 정치인들의 언행을 오염시키는데 세련된 헤드코치 역할을 충실히 했다. 조선일보는 지금 스스로의 얼굴에 침을 뱉고 있다. 순결한 시어 여! 조선일보의 위선과 가식과 허구로 점철된 기만의 작위적 기사와 폭력적 언어 위에 청결의 이슬이 되어 촉촉이 배어들어라? 그래서 폭력적인 조선일보의 언어 표현속에 우리 모국어의 아름다운 형상이라는 새싹이 비로소 되살아날 수 있는 기회를 주소서?







조선사설은





“ 제대로 된 정치 지도자들의 말은 용광로와 같은 구실을 한다. 이해집단 간의 갈등을 조정하고 일상에 파묻혀 사는 국민들을 미래로 이끄는 힘은 정치가의 언어를 통해 나온다. 그러나 지금은 진흙탕을 헤매는 정치로 인해 언어마저 막돼가는 시대다. 시의 언어는 생명과 창조, 관용과 절제의 언어다. 이런 미덕들을 정치는 시에서 배워야 한다.”







(홍재희) ===== 라고 주장하고 있다. 언어의 생명은 진실이다. 그렇다면 방씨 족벌 조선일보의 논조는 일제시대때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거짓과 위선으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웠는가? 방씨 족벌 조선일보가 일제의 반민족적인 식민지 지배체제의 나팔수 노릇을 한 것은 언어의 생명인 진실에 어느정도 부합한 것으로 볼수있나? 방씨 족벌 조선일보는 대한민국의 헌정질서를 유린하고 민주정치질서를 파괴하고 인권을 유린하며 언론자유 까지 유린해온 군사독재체제와 권언유착을 통해 국민들을 선동한 수구적 작태속에 유린당한 언어의 진실을 지금 회복했는가?







(홍재희) ===== 그런 조선일보가 정치인들의 언어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 조선일보는 지금 당장 조선일보의 전 지면을 다시 한번 정독해 보아라? 조선일보의 논조는 사회적 위화감과 반목과 갈등과 밑도 끝도 없는 색깔론을 확대재생산 시키고 있는 언어적 폭력의 음습한 우범지대화? 된채 독자들의 염세적인 정서를 부추기고 있다. 조선일보의 경제기사 또한 대한민국이 내일이라도 곧 망할 듯 한 언어적 폭력의 일상화를 통해 독자들의 가슴속에 좌절과 박탈감의 진흙탕을 헤매이게 부추기고 있다. 조선일보의 논조는 순수한 시어의 일상으로부터 배워야 한다. 우리들은 모든 정치적 언행에 대해서 언론을 통해서 접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사설]詩의 날, 政治의 언어를 생각한다(조선일보 2004년 11월1일자)





오늘은 ‘시(詩)의 날’이다. “시여, 그대는 이 지상을 살아가는 인간을 위안하고/ 보다 높은 쪽으로 솟구치게 하는 가장 정직한 노래여야 한다.” 지난 주말 부산의 ‘명시 낭송축제’에서 낭독한 ‘시인 선언’에서 김종해 한국시인협회장은 이렇게 말했다. 인간에게 위로를 주고 인간의 격(格)을 높이는 언어의 힘에 대한 찬사이다.



최남선의 신체시 ‘해에게서 소년에게’가 발표된 날을 기념해 1986년 만들어진 ‘시(詩)의 날’이 올해로 18회째다. 해마다 오는 ‘시의 날’이지만 올해 유난히 시의 존재가 고맙고 그리운 것은 갈수록 막말이 판치는 세태 때문이다. 특히 이 정부 들어 “깽판” “양아치”에서 시작해 “까불지 마라” “내 손아귀에 있다”에 이르기까지 열거하기에도 숨차게 이어지는 정권 실세들의 막말은 ‘시정잡배’들이 듣기에도 이미 도를 넘어섰다. 언어가 갖고 있는 소통과 이해의 미덕은 실종된 채 오로지 상대방에 대한 증오와 공격과 파괴의 언어만 횡행하고 있다. 국민들의 마음은 황폐해지고 그 언어가 지시하는 이념과 당파성에 따라 찢길대로 찢겨가고 있다.



이인호 서울대 명예교수가 지난달 29일 열린 한 토론회에서 “이 같은 독선과 무지의 언행은 현 정부 출범 후 가장 두드러진 변화인 반(反)지성주의의 결과”라고 한 것은 정확한 진단이다. 선동과 영합의 포퓰리즘 정치세계에서 언어는 상대에 대한 전투 수단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이를 막고 언어의 질과 격을 높이는 것은 지성(知性)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그 지적(知的) 행위의 끄트머리에 시가 존재한다.



제대로 된 정치 지도자들의 말은 용광로와 같은 구실을 한다. 이해집단 간의 갈등을 조정하고 일상에 파묻혀 사는 국민들을 미래로 이끄는 힘은 정치가의 언어를 통해 나온다. 그러나 지금은 진흙탕을 헤매는 정치로 인해 언어마저 막돼가는 시대다. 시의 언어는 생명과 창조, 관용과 절제의 언어다. 이런 미덕들을 정치는 시에서 배워야 한다.

입력 : 2004.10.31 18:08 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