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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이후 北상대 防諜작전 중단

[간첩수사, 요즘은 上] 2000년 이후 北상대 防諜작전 중단


DJ정권때 對共 수사전문가 대거 국정원 떠나

유명무실해진 國保法… 수사 더 어려워져

95년 南派 김동식사건 이후 간첩단 검거 ‘0’

최병묵기자 bmchoi@chosun.com

호경업기자 hok@chosun.com


입력 : 2004.10.18 06:07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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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보안법 폐지 논란



2000년 여름 국가정보원 대공 관련 직원 K씨가 보고자료를 들고 한 고위 간부를 만났다. 보고 라인은 아니지만 친분이 있어 북한을 상대로 한 공작 문제를 상의했다. 이 고위 간부는 “이제 그런 것 하면 다칠 수 있으니 없던 일로 하라”고 조언했다.
2000년 6월 남북 정상회담 후 임동원 국가정보원장이 ‘방첩(防諜) 공작’ 중단 지시를 내린 후의 일이었다. 당시 회담에서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은 상대방에 대한 공작을 하지 않기로 약속했다고 한 전직 국정원장이 말했다. 이 약속은 발표되지 않았다. 그는 북한도 대남 공작을 중단했는지 여부는 확인할 수 없었다고 했다.



현실은 북한이 남한 내 간첩들에게 보내는 것으로 추정되는 지령 통신은 한 해 8만건 안팎으로 줄지 않고 있다. 이런 가운데 간첩 검거는 급감하고, 95년 남파 간첩 김동식사건 이후 간첩단 검거는 아예 없다. 왜 그럴까.


대공 전문가들이 첫째로 꼽는 이유는 정권 교체다. 99년 임동원 국정원장 취임 후 대공 수사 전문가들이 대거 국정원을 떠났다. 임 원장은 대북 공작도 중단시켰다. (옮긴이 - 부추연 http://badkiller.or.kr 이나 사이버뉴스 http://www.cppc.or.kr 에 가면 임동원이 간첩이라는 글을 볼수 있다. 글쓴이는 전직 국정원직원 으로서 지금은 미국에 망명해있는걸로 안다. 구 자유게시판이나 기사검색에서 '김기환, 김기삼'으로 찾으면 볼수 있다.)대북 공작의 상당 부분은 체포한 간첩을 이용해 다른 간첩을 잡는 ‘역용공작’이었다. 예컨대 95년 부여에서 검거된 김동식은 79년에 붙잡힌 다른 간첩을 이용한 것이었다. 이런 작전을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관련 예산도 대폭 줄었다. 돈이 없으니 수사요원들의 사기도 크게 떨어졌다. 국정원 대공수사관이었던 K씨는 “간첩을 잡으려면 수년 때로는 수십년간 공작을 해야 하는데 돈도 없고 의욕도 없는데 누가 새로운 일을 벌이겠느냐”고 말했다.



경찰도 마찬가지다. 한 경찰 간부는 “요즘 보안(대공 담당) 쪽은 진급을 포기한 나이 든 경찰들뿐”이라고 말했다. 서울중앙지검의 한 검사는 “요사이 처음 발령받은 공안 검사 중에는 NL(민족해방)계, PD(민중민주)계도 구분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한 전직 국정원장의 말을 빌리면 지금은 “필요한 최소한을 유지”하고 있는 상황이다.



국가보안법의 유명무실화도 간첩 수사를 어렵게 만들었다. 한 대검 검사는 “대부분 누가 북한을 고무·찬양한다는 첩보가 간첩 수사의 첫 실마리가 되는데, 요즘 웬만한 국보법상 고무·찬양 혐의는 법원에서 구속영장도 떨어지지 않는다”고 했다.



대공 수사에도 인권이 강조되면서 자연스레 수사가 힘들어졌다. 과거에는 한총련이나 범민련 등의 이적 단체에 가입했으면 조사할 수 있었는데, 이제는 물증이 없으면 어렵다는 것이 수사관들의 말이다.


간첩 혐의자가 묵비권을 행사하거나 변호사와 답변 전략을 상의하기도 한다. 이른바 ‘신문(訊問) 투쟁’이다. 국정원의 한 수사관은 “요즘에는 이름 하나 알아내는 데 하루 이상 걸리는 경우도 많다”고 했다.


‘법정 투쟁’도 있다. 법정에서 무조건 ‘잠을 안 재웠다’ ‘폭력을 썼다’는 식으로 주장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신문 과정을 비디오 카메라로 촬영하는 일이 대공수사관들의 업무에 추가됐다. 전직 국정원 간부는 “요즘 국정원은 간첩 잡는 일보다 각종 회담차 남쪽에 내려온 북한 사람들의 안전에 더 신경쓰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