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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제가 이렇게 글을 쓰게 된 이유는 더 이상 저 같은, 저희 엄마 같은 사람들이 나오지 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저는 올해 17살입니다. 그러나 또래들과는 전혀 다르게 살아 왔습니다. 어렸을 적부터 저는 제 아버지를 두려워 했습니다. 근처에만 있어도 오금이 저리고 항상 몸은 경직되었습니다. 사실 이름만 아버지이지 제게는 남과 다름없었습니다. 초등학교 2학년때 책을 사고 남은 돈으로 친구와 군것질을 조금 했었습니다. 그것을 이유로 저를 역기들 듯 번쩍 들어 방바닥에 내동댕이 쳤습니다. 맞을때면 따로 회초리가 필요없었습니다. 서서 발로 차고 밟고, 정말 안 맞아본 사람은 모를겁니다. 잘못을 하지 않아도 언제나 앞에만 서면 긴장이 되었습니다. 또 초등학교 2학년 때입니다. 아침 일찍 아버지는 우리에게 각자 학교와 학원을 가라고 하곤 목욕탕으로 갔습니다. 그때 동생은 학원이 바로 집 위였기 때문에 바로 올라가고 저는 시간이 되지 않아 tv를 보고 있었습니다. 8시쯤 집으로 돌아온 아버지는 그대로 저를 몇차례 때리곤 벽한쪽 구석에 무릎을 꿇게 하곤 그대로 가게로 나갔습니다. 그때 일하는 아주머니가 없었더라면 아마 하루종일 그렇게 있었을 겁니다. 친 엄마와 아버지는 오래전에 이혼해서 저희는 몇 년을 주기로 자꾸만 이곳저곳 옮겨다니기 일쑤였습니다. 2학년이 끝나고 저희는 엄마가 있는 곳으로 옮겨갔습니다. 그곳에서 약 2년쯤 있다가 5학년 2학기때 다시 아버지가 있는곳으로 옮겼습니다. 그때 들어간 집은 장군보살이라는 아줌마의 집이었는데 아버지와 동거하는 사이였습니다. 들어간지 몇 일만에 엄마라고 부르기를 요구했고 혼나는게 싫어서 저는 바로 그렇게 불렀습니다. 두 사람은 그리 다정하지 않았습니다. 몇 일을 주기로 싸웠습니다. 저희가 아버지 가게에 있을때 장군보살 아줌마는 자신의 오빠와 함께 찾아와 자신에게 사기쳤다고 돈 내놓으라며 소동을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그 집에 1년쯤 있었는데 장군보살 아줌마와 싸우고나서 저에게 하는 행동이 바뀌었습니다. 그때 tv가 안방에 있었는데 tv를 보면서 제 가슴을 만졌습니다. 그때 제 나이는 초등학교 6학년 이었습니다. 차라리 그것뿐 이었다면 죽고 싶다는 생각까지는 안했을 겁니다. 어느날 저녁, 술을 먹고 와서는 잠자는 저를 건드렸습니다. 한번이 아니라 상습적 이었습니다. 일주일에 3~4번은 기본이었습니다. 한번은 생리가 없는 도중에 아버지가 약을 사와서 먹으라고 했습니다. 위장약인줄알고 먹었는데 막 배가 아팠습니다. 저에게 배가 아프냐고 물어보기도 했습니다. 나중에 알고보니 아기를 지우는 약이었습니다. 아침에 동생을 심부름 보내놓고 한적도 있었습니다. 싫다고 울면서 거부해도 화내면서 강제로 했습니다. 정말 치욕스럽고 죽고 싶었습니다. 너무나 치욕스러운 일이라 누구에게도 알릴수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장군보살 아줌마가 와서는 붕대감은 손목을 보여주며 아버지가 한거라고, 동맥을 끊었다고 했습니다. 그전에는 아버지가 아줌마의 집을 자신의 앞으로 해놓아서 크게 싸운적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1년 동안을 그 집에서 살다가 가게 근처로 집을 옮겼습니다. 집을 옮기고 나서도 저에게 하는 행위는 변함 없었습니다. 그런데 제 친구들도 저희집에 놀러오는 것을 싫어했습니다. 제 아버지가 자꾸 만지고 건들인다며 변태같다고 수군거렸습니다. 그게 다가 아니었습니다. 저희가 학교에 가고 없을때면 다방언니들을 불러서 가게 뒷방에서 나쁜짓을 했습니다. 그래서 다방언니들은 아버지가 부르면 오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동네사람들도 전부 알고 있는 일입니다. 아버지가 엄마를 때리고선 속옷 한장 걸치지 못하게 하고는 집밖으로 나가게 한 것입니다. 아버지는 엄마를 맥주병, 의자 할것없이 닥치는대로 때렸습니다. 중학교 2학년 중간고사를 치고 나서 아버지의 재혼으로 창원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창원으로 가기전까지 어버지는 저를 더럽혔습니다. 그래서 중학교 1년동안은 넋이 나간채로 어떻게 하면 고통없이 죽을까하는 생각만 했습니다. 결국 찾아낸 방법은 약이었습니다. 그래서 조금씩 돈도 모았습니다. 하지만 어린 저에게는 수면제를 팔지 않았습니다. 제 이야기를 모두 하진 않았지만 학교에서 하는 상담도 받아보았지만 아무소용 없었습니다. 어느날 저는 아버지에게 소주병과 거친 발길질을 맞아야만 했습니다. 이유는 제 머리가 학생머리가 아니라는 겁니다. 그때 저는 컷트머리로 자르고 왔었는데 제 친구들은 거의 다 컷트 였습니다. 맞는 것까진 참을수 있었는데 5일동안 한끼도 주지 않고 학교에 갈 차비도 주지 않았습니다. 차비는 친구에게 빌리고 밥은 그냥 굶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시험을 잘못치고 와도 아버지는 밥도 차비도 주지 않았습니다. 그런 식으로 2년을 살았습니다. 저희가 잘못한게 없어도 걸핏하면 절에 가라 고아원에 가라는 소리를 들으면서 말입니다. 결국 2년만에 아버지의 재혼으로 이제는 끝이구나 싶어 굉장히 좋았습니다. 하지만 저를 건들이지만 않을뿐 더 심하게 변했습니다. 언제나 밥 먹는 시간이 되면 제게 화내는 시간이었습니다. 아버지는 동생을 좋아했습니다. 이유는 공부를 잘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버지의 차별은 날로 더해갔습니다. 사실 저는 그리 멍청한 쪽이 아닙니다. 초등학교 때 당한 그 사건들 이후로 정신이 혼란스러워져 공부는커녕 아무것도 할 수없게 되버렸습니다. 재혼 후 몇 일간은 지금의 엄마에게 잘해주는 듯싶었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엄마가 벌어놓은 돈은 아버지가 모두 챙겨가 버리고 엄마를 엄마 주변사람들 앞에서 욕보여서 하나둘씩 떨어져 나가게 했습니다. 아버지가 엄마에게 했던 행동은 상상도 할 수 없는 것들 이었습니다. 엄마가 벌어놓은 것임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엄마에게 그 돈을 다 썼다며 때렸습니다. 아버지는 집에서 놀면서 엄마가 벌어놓은 돈으로 밤낮으로 술집이며 호텔로 가서 펑펑 쓰고 다녔습니다. 저희 집에서 일 해주는 이모할머니들은 항상 엄마가 너무 가엾다며 우시고 들 했습니다. 하루는 저희가 학교에 가고 없었을 때였습니다. 집에는 엄마, 아버지, 이모할머니가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또 돈을 이유로 선풍기로 엄마를 때렸습니다. 입에서 피가 자꾸만 나와도 몇 차례 더 때렸다고 했습니다. 아버지는 하지도 않은 일도 했다며 욕하며 때렸습니다. 할아버지, 할머니께는 엄마가 우리를 휘어 잡아서 손, 발 주물러 주면서 꽁무니를 졸졸 따라다닌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사실 엄마 혼자 여러 일을 하기엔 너무 벅찬 나날이었습니다. 아버지는 맨날 놀면서 돈만 펑펑쓰고 빚은 늘어가고 그나마 집안일 해주시던 이모할머니들도 아버지가 내쫒듯 다 내보내서 혼자서 하루하루 죽을힘을 다해 일하시는 것을 보고 너무 안쓰러워서 조금이나마 도와주려고 그런건데 그것마저도 하지못하게 했습니다. 하도 힘들게 일하고 자주 맞아서 엄마 뱃속에 있던 동생도 유산이 되었습니다. 맨날 엄마에게 나가라고 하고 때리고 욕하면서도 돈은 다빼앗아가고 엄마가 아파서 조금 쉬는것도 못보았습니다. 그러다가 아버지가 술집에 갔을때 엄마는 큰이모가 계시는 진주에 가있겠다고 했습니다. 엄마가 가고 없으면 뒷일은 안봐도 뻔했습니다. 결국에 엄마는 가셨고 저는 아침저녁으로 엄마와 연락을주고 받았습니다. 아버지는 엄마에게 용서를 빌기는커녕 날이잘선 주방용칼을 신문지에 싸서 엄마에게 갔습니다. 저는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빨리 도망가라고 했습니다. 그러고 나서는 저도 엄마에게 가려고 짐을 싸놓았습니다. 그런데 엄마에게 가다가 음주단속에 걸려 경찰서에 갔는데 차에서 칼이 나온 것입니다. 경찰서에서 엄마를 불러서 갔다가 엄마와 아버지가 같이 나갔는데 아버지가 엄마 목을 졸랐다고 했습니다. 엄마목을 조르면서 아버지 말로는 한번 졸라서 죽지않으면 다시 졸라도 죽지 않는다는 말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엄마를 다시 집으로 데리고 오셨습니다. 다음날 저희가 일어나서 엄마를 보니 엄마의 얼굴은 검붉게 변해 있었습니다. 목부분부터 머리끝까지 그랬는데 알고보니 얼굴의 가는혈관들이 터져서 그런거였습니다. 그리고 얼마후 엄마에게 집에있던 엄마 부처님을 모시고 다른데서 일하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엄마는 저와 동생이 다니는 학교 사이에 있는 방을 구해서 매일매일 회사원처럼 출퇴근했습니다. 그래도 저는 그편이 훨씬 좋았습니다. 엄마가 아버지에게 시달리지 않고 저와 함께 집으로 돌아갈수 있었으니까요. 일주일도 안되서 아버지는 엄마에게 다시 집으로 들어와서 일하라고 했습니다. 예전부터 엄마가 눈앞에 안보이면 혼자서 의심만 했으니까요. 결국 엄마는 다시 집에서 일했습니다. 제가 중학교 3학년때 엄마는 다시 동생을 가지셨습니다. 처음에 아버지는 빈혈약도 사다주고 조심해야한다고 할때는 언제고 이틀도 안되서 병원에서 여동생이라는 얘기를 듣고 8개월된 아기를 지우라고 했습니다. 추석 전날 밤에는 엄마를 방에 끌고가서는 임신한 배를 걷어차고 때렸습니다. 문이 열리고 엄마가 기어서 나왔습니다. 저희는 엄마가 너무 많이 아파보여서 울면서 무릎꿇고 제발 병원에만 보내달라고 애원했습니다. 그랬더니 저런여자는 병원에 안가도 된다는 말뿐이었습니다. 그런 몸으로 엄마는 기어서 할머니집까지 갔고 엄마는 할머니집에서도 명절일까지 하고 왔습니다. 엄마는 하루가 멀다하고 맞았습니다. 임신중에 추운거실에서 자게하고 일은 일대로하고. 정말 내 아버지이지만 인간 같지 않았습니다. 엄마가 3일동안 일을 갔다가 우리방에서 자려고 했는데 갑자기 엄마 멱살을 잡아서 안방에 내동댕이치고는 방문을 잠궈 버렸습니다. 안에서는 엄마에게 죽이니 살리니 하며 욕소리와 엄마의 울음섞인 비명소리, 아버지가 엄마를 때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이대로는 정말 엄마가 죽겠다 싶어서 제가 112에 신고를 했습니다. 그때 엄마는 옷단추가 다떨어져나간 상태였고 우리는 얇은 잠옷만 걸친 상태였습니다. 너희가 왜 신고했냐고 때릴것처럼 쳐다보고 고함질러서 그대로 동생과 저는 집밖으로 뛰쳐나가 경찰아저씨 옆에서서 울기만 했습니다. 엄마와 아버지는 조사를 받으러 가야했기에 엄마는 먼저 차에타고 어버지는 옷을 갈아입고 문을 잠그고 나가버렸습니다. 저희는 잠옷만 입고 있는데 말입니다. 그대로 쫒겨나 하룻밤은 그동안의 일을 알고있던 옆집 할머니네에서 자고 다음날 동생은 학교에 갔다가 그대로 집으로 들어갔고 평소에 저를 싫어하는데다가 신고까지 했으니 그뒤는 불보듯 뻔해 숙모집에 있었습니다. 학교에 갈때도 아침일찍 뒷문으로 갔다가 뒷문으로 오고했습니다. 아버지는 저룰 잡으려고 저의 제일 친한 친구들을 미행하고 돈을 주면서 제가 어디있는지 가르쳐 달라고 하기도 했습니다. 방학이 되어서 엄마와 함께 진례할머니 집에 있었는데 동지때 아버지에게 전화가 와서는 집에 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엄마와 저에게 양심의 소리가 듣고싶다며 신고한날 자신이 엄마를 때렸냐고 윽박지르며 물었습니다. 겁에 질린 저는 안때렸다고 말했습니다. 엄마 역시 겁에 질려 안때렸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잠옷속에 녹음기를 넣고 우리가 한말을 녹음에 말도안되는 어거지로 우리를 무고죄로 잡아넣으려고 준비했던것입니다. 녹음이 끝난 아버지는 우리에게 다시 나가라고 했습니다. 그일이 있고 얼마후에 친엄마가 위암으로 돌아가셨습니다.정말 엎친데 겹친격이었습니다. 가뜩이나 상황이 그런데 친엄마까지 돌아가시고 나서는 몇일간 넋이 나간채로 지냈습니다. 부산, 아버지의 선생님이 있는곳에 오라고 해서 갔는데 아기낳고 3월달부터 200만원씩 내놓으라고 각서를쓰라고 해서 우리를 내버려 둔다는 조건으로 엄마는 각서를 썼습니다. 거기서 흥분한 저는 친엄마가 돌아가셨다고 말해버렸고 아버지는 그말을 듣고 엄마의 보험금을 타갔습니다. 우리를 키운다는 이유를 대고 말입니다. 저는 쫒겨났는데 법적대리인이라며 찾아갔습니다. 그뿐아니라 친엄마가 살아생전에 하시던 가게도 뺏고 아파트도 빼앗았습니다. 그런데 친엄마의 유언으로는 보험금은 우리에게, 가게는 같이 살던 아저씨가 먹고살수 있게 아저씨가 가게를 하라고 했는데 아버지가 마음대로 그런 행동을 한것입니다. 지금도 아마 아저씨쪽과 아버지는 법적으로 싸우고 있을 겁니다. 현재 저와 엄마는 아버지가 살고있는 집 근처에 방을 구해 살고 있습니다. 얼마전에는 동생도 태어났습니다. 집이 가깝다보니 하루하루가 불안합니다. 고등학교 원서를 쓸때 미용고에 가고싶다고 했지만 인문계가 아니면 학교에 다닐 생각도 하지말라고 해서 할수없이 인문계로 들어갔습니다. 하지만, 제가 그리 오래 산건 아니지만 너무나 많은 일을 겪은 충격때문인지 학교에서 공부할 수 없는 정도까지 와서 학교를 쉬고 있습니다. 언젠가 누가 저에게 조울증이 아니냐고 했습니다. 솔직히 저는 지금이라도 할수만 있다면 병원에가서 치료받고 싶습니다. 사람들은 어떻게 자식이 제 부모를 신고하느냐고 손가락질 할지는 몰라도 매일매일 죽이려고 하는 사람을 놔두고 불안해 하는것보다는 이게 더 나은 것 같았기 때문에 내린 결정이었습니다. 제 어린시절을 망친 제 아버지가 너무 원망 스럽습니다. 더 이상 제 인생을 망치고 싶지 않습니다.

여기까지가 제가 경찰아저씨께 드렸던 편지 내용입니다. 편지가 경찰서에 넘어가고 저와 엄마, 동생, 할머니 등 모두가 가서 조사를 받았습니다. 그때 저는 보복이 두려워 평생 그곳에서 나오지 못했으면 좋겠다고 말했고 할머니는 10년 이상 살게 하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자기네들 소문 나빠질까봐 또 엄마에게 뒤집어 씌우네요. 아버지란 사람이 엄마가 우리에게 거짓말을 시켜서 감옥에 가게 만들었다고 말할때는 오만가지 욕은 다하더니 이제는 본인들이 그러시네요. 왜 아무 말 없이 상처를 안아주려는 사람에게 그러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두분은 저를 얼마나 아껴주고 보살펴 줬길래 그런말을 하는건지 모르겠습니다. 고아원이나 가라고 했으면서, 나를 귀찮게 여겼으면서 어떻게 그런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할수있지요? 살인만 안했지 할아버지 할머니도 같은 종류의 사람이었습니다. 돈만 밝히고, 자기보다 못살거나 힘든 사람들은 무시하고, 괜한 사람 의심하고, 자신이 불리하면 자기가 한말을 마치 다른 사람이 한 것처럼 뒤집어 씌우고... 12월, 친엄마가 돌아가셨을때, 아니 정확히 말해 우리 이름으로 보험금이 나온다고 했을때 할아버지, 할머니는 저를 키우겠다며 그렇게도 나서시더니 여기저기 알아보고 아무소용이 없다는걸 알자 저를 마치 헌신짝 취급하듯 대했습니다. 키우겠다고 할땐 언제고 보험금을 못타니까 엄마에게 저를 키우던지 고아원에 보내든지 마음대로 하라는 말을 했다고 하네요. 그런데 그 말을 삼촌에 숙모까지 했다고하니 더 이상 그 집 사람들에게 뭐라 하겠습니까. 그런 할아버지, 할머니를 보고 자란 자신들의 아들은 생각안하고 아무 죄없는, 상처입은 사람들 위로는 못해줄망정 오히려 자신들이 불리하면 상처들을 헤집어 놓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무것도 가진게 없고 몸은 만삭인 엄마에게 돈을 비롯해서 자신들의 욕구를 충족 시켜주면 좀 잘해주고 힘에 부쳐 못 시켜주면 친척들에게 엄마를 이간질하고 항상 자신들이 피해자인척 연기했습니다. 어느날 해도 해도 너무 해서 우리들 인생 책임지라고, 처리해준다고 할때는 언제고 왜 가만히 있는 사람을 괴롭히냐고, 할머니 아들이 우리 인생 이렇게 망쳐놓았으니 책임지라고 했더니 내가 그렇게 하라고 시켰냐며 오히려 더 화를 내시더군요. 미안하다 사과는 못할망정 사람을 돈으로 못살게 굴고 손녀인 저의 아픈상처를 약점삼아 저희를 고통스럽게 했습니다. 정말 분했습니다. 왜 나를 이런곳에 속하게 했을까. 왜 나를 이렇게 까지 망쳐 놓았나 하는 원망도 참 많이 했습니다. 아버지란 사람의 모든 행동을 원망했지만 딱 한가지 고마운게 있다면 사람다운 사람을 만나게 해준 것 입니다. 엄마가 있었기에 조금이라도 상처를 덜 받을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앞으로의 일이 걱정입니다. 지금은 형을 받고 있기에 생명의 위협은 받고 있지 않지만 형이 끝난 7년 뒤에는 어떻게 될지 두렵습니다. 그곳에 있으면서도 저희를 죽이겠다고 벼르고 있는데, 나오고 나면 오죽하겠습니까. 그런 생각만하면 눈앞이 깜깜해 집니다. 제가 바라는 것은 크거나 많지 않습니다. 그저 지금의 우리 가족이 더 이상 상처받는 일 없이 행복하게 사는것, 사람답게 사는것, 그것뿐 입니다. 이미 아플만큼 아픈 사람들 입니다. 더 이상 얼마나 더 아파야 합니까. 제발 사람답게 살게 해주세요. 더 이상 두려워하면서 살고싶지 않아요. 더 이상 저희 가족이 고통스럽지 않게 해주세요.

교도소에서 아버지란 사람이 저희에게 보낸 편지중 하나 입니다.

“분한마음 삭히지 못하고 깊어가는 밤 지세우며 또 하루를 맞이한다.

이러한 시간이 길면 5년, 짧으면 4년.

이제는 아무것도 소용없고. 오직 너와 그 외 사람들의 마음대로 짓거린 말에 분노하며

체력을 다지는데 심혈을 기울이고 있을뿐.

내가 출소하는 그날까지 모두 이성을 떠나 버리면 몰라도 그렇지 않다면 더 이상

태양 아래서 산소는 맛보지 못하리라.

강진숙, 정금희, 박미혜, 송갑순, 최장윤, 최미나, 최수빈. 그동안 이 한사람 불과 몇 년

신체의 자유를 앗아가기 위해 거짓말 하느라 고생 많았지만 그 댓가는 충분히 줄것이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모두 할것이네. 내 몸은 비록 자유롭지 못하지만 나 아닌 사람도 있으니. 내 마음이 중요할 뿐이구나. 8. 24. 부산 교도소에서“

교도소 안에 있으면서도 이런 편지를 보내는데 저희가 어떻게 마음 편히 살수 있겠습니까. 정말 불안 합니다. 그 동안 그렇게 사람을 괴롭혀 놓고 또 얼마나 괴롭히려고 이러는 걸까요. 저희의 생사가 오고 갑니다. 저희를 살리시겠습니까. 아니면 저런 사람 하나를 살리시겠너무 무섭습니다. 나오자 마자 뻔합니다. 법이 있어서 근처에 못 온다고 하시지만 아닙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저희는 쥐도 새도 모르게 없어질겁니다. 교도소 안에서도 저런 편지를 쓰는데 나오면 오죽하겠습니까. 제발 저희를 살려주세요. 어떻게 판단하느냐에 따라 저희의 생사가 오고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