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의 추억`에 이어 볼만한 한국영화가 빈곤했던
탓인지, 아니면 가족제도에 대한 유연하고 쿨한 반란
이란 수사에 매료되었는지 관객들이 요즘 `바람난 가족`
이란 영화에 발길을 모으고 있다 하여,
지난 일요일 폭우를 뚫고 그 영화를 봤다.
아직 바람나긴 이른 다정한 연인들과
바람 피우기엔 일상이 고단하거나 감정이 메마른
중년의 부부들이 적잖게 눈에 띠었다.
나처럼 30대 여성들은 대개 동성의 친구들과
함께 온 듯 보였는데, 이 영화를 보면서 마음 속에
잠재된 바람의 불씨를 배우자에게 들키지 않겠다는
불온한 추측,또는 배우자 없이 영화와 잠시
바람피우고 싶은 고립된 욕망이나
호기심 때문이 아닐까 하는...(아니면 말고?)
영화 속
남자의 바람은 일상적이고 예측 가능하고 식상했고,
여자의 바람은 도발적이고 불편하고 슬펐다.
그리고 그 남자 엄마의 바람은 유쾌하고 아름다웠다.
법적으로 또는 일상적으로 묶어진 가족제도를 향한
감독의 냉소적 터치는, 엔딩 화면에 흐르는 어여부
밴드 식`즐거운 곳에서는 날 오라 하여도`란
노래의 불량스러움과 맞닿아 있었고, 관객들 상당수는
한동안 둔기로 가슴을 맞은 듯 자리에 머물렀다.
주인공들 모두 가족으로부터, 또는 가족을 묶고 있는
`더러운 피`(영화에서의 이미지)로부터 자유로워졌지만,
바람 핀 이후 겪게 되는 절망스런 운명을 그저 `쿨`하게
벗어내버린 그들의 경쾌한 몸짓엔 동의할 수 없었다.
남성은 그렇다치고, 어떻게든 기득권 속에서 잘
살아가니까...(특히 남자주인공 직업이 변호사란 점에서)
여성의 존재를 결국 새로운 임신 같은
이성애적인 관계 속에서 재확인하는 감독의
취향은 진실로 남성 중심적이었다.
옆집 고등학생에겐 짜릿한 페티시즘의 대상으로,
남편 바람기엔 전혀 무관심한 데다 남편의 폭력 조차도
냉소적인 무표정으로 일관하는 여성에게서 `쿨한 이미지`를
읽어내라니...감독의 일방주의가 나같이 페미니즘과는
거리가 멀게 살아가는 여성에게도 꽤나 버거웠다.
차라리 극중에선 다소 가볍게 그려지긴 했지만
"나이 육십에 오르가즘을 발견했다"고 외치며 초등학교
동창생을 따라나선 어머니의 `쿨`한 선택이 맘에 들었다.
`가족`이란 견고한 틀을 `쿨`하게 벗어나려고 했지만,
핏속에 흐르는 여성에 대한, 감독의 남성적 강박관념의
흔적까지는 완전히 지워내지 못한(사실, 지워내는 게
불가능함을 확인하게 한...), 그래서 여성의 성이
또한번 덫에 갖힌 막막함을 주었던 영화였다고나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