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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안경 47-1 역사야 놀자.....

쌍안경 47-1 역사야 놀자.....



1. 역사정리

지금 우리는 당장 급하다고 하여 많으 욕심으로 충만되어 있다. 당장에 친일문제를 정리해 버리고 매칠내로 5~6~70년대의 것까지 다 정리하고픈 그런 욕심. 그러나 그것은 다만 욕심일 뿐이다. 친일문제를 정리하기 위해 해방 이후로 지금껏 요구되고 또한 묵살되고 한 것이 그친 날은 없다. 다만 사회적 분위기 탓에 하고픈 말 못하고 하고픈 일 못하고 그저 세월이 흘러서 이것들이 조속히 귶명되고 정리되어, 이후로는 이 문제에서 자유로워지고픈 생각들만 간직한 채 지금에 이르른 것이다.



따라서 욕심을 부리는 것도 무리가 아니며 또한 그것이 비정상적인 생각과 행동이라 누구도 나무랄 수 없는 것이 오늘 우리 대한민국 국민의 처지이다.



또한 작금의 화해무드와 경쟁의 무두로 장식되는 세계환경에 우리가 능동적 희망적으로 대처하기 위해서도 이런 문제들이 조속히 해결되어, 일본과의 교류도 자유로이, 그리고 협력도 자유로이, 그리고 역시 이웃 중국과도 역시 자유로운 조건이 조성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일단 강대국 중일과의 교류협력과 도안자 관계의 조성이 원활히 진행되려면 우선 당장 그 과거의 쓰라리고 억울한 역사가 명확하고 명쾌하게 정리되는 것이 선행조건이라는 것이고, 이런 선행조건의 충족이 곧 ‘통일’도 앞당길 수 있다는 확신을 더욱 공고히 하게 되는 것이다.



이유가 어떻고, 또한 당면 상황이 어떻든 일단 한국은 이런 이웃과의 동반자관계를 형성키 위한 선행조건 곧 일단 국내문제가 제대로 정리되는 것이 준비되지 않은 상황하에서는 우리는 많은 장애물을 건너야 하고 또는 그 장애물로 인하여 갈 길을 포기하기도 해야 하는 처지에 있음에 우리는 더욱 초조하고 또한 서두르고픈 욕심이 우리들을 지배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통일의 선행조건도 곧 국내문제의 명쾌한 정리이고, 동북아의 교류협력과 동반공생이라는 취지하에서도 한국의 국내문제의 명쾌한 정리가 선행조건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러하니 결국 초조와 서두르고픈 욕구는 당연하다 할 것이지만, 어디 과거에도 정리 못한 정리작업이 오늘에는 쉬울 턱이 있는가?



역사정리의 그리고 국내문제의 정리의 이러한 당면의 필요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결국 그것들을 깨끗이 정리할 지혜를 모아야 하는 것이며, 또한 허술한 수선은 곧 또 다른 수선이 기다리듯이 그런 수선이 아닌 확실한 재건축 같은 핵심적이고도 뒷탈 없는 수선 곧 정리만이 우리에게 플러스가 될 수 있음을 우리는 차분히 되새겨야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런 차분함이 없이 서두를 때에는 우리는 또 다른 수선을 해야 하고, 또한 현재의 수선작업이 곧 후에 더 많은 비용과 노력이 소요되는 수선을 양산할 수 있음을 우리는 세상의 이치로서 그리고 역사적 사실로서 이해하고 넘어가야 하는 것이다.



세계대전을 우리만이 치른 것도 아니요, 우리만이 침약당한 식민지도 아닐진데, 유독 우리만이 그 정리를 못하고 지금에 이른 것이, 다시 생각하니 어처구니 없는 손홰임을 누구도 인식할진대, 지금에 와서 다른 나라는 가만 잇는데 우리만이 호들갑을 떤다고 말하는 이도 존재할 정도로, 우리는 아직 미흡하고 미성숙한 존재임이 분명하고, 또한 중국이나 일본과의 교류협력과 공생관계의 공고화가 가장 피부에 와 닿는 지금, 그리고 통일이 아니되어 지금 손해보는 정도를 환산하자면 억울하기 그지 앖는 지금에, 우리가 서두르지 않을 이유도 없건만, 우리가 서두르지 않아야 하는 것이 바로 우리들 모두의 상처이고 고통인 요소들이 방치하면 곧 그 고통은 사라지지 않고 후세에 계승된다는 것과, 당장에 엄청난 손해를 감수해야 한다는 이런 당장의 고통이 치유되어야 함에도, 그것이 다만 진통제 처방이나 또는 한시적 통증제거용 시술이 된다면, 결국 시도하재 아니한 것만 못한 결과일 수 잇으므로, 우리는 그 고통이 당장 아프고 또한 당장의 손해가 눈에 보이더라도 조금만 참고 그 본질을 치유하는데 주력하는 것이 가장 근본적 코리아 업그레이드 작업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역사정리에 있어서도 그 순서가 있다. 당장에 모든 것을 일거에 정리하려는 욕심은 결국 모든 것을 다만 어떤 학문분야의 개론서만 탐구하듯이 주변만을 맴돌 가능성, 그리고 비례적인 측면, 그리고 합의적인 측면, 그리고 ‘역사’라는 특성 등이 감안되지 않고 무시될 가능성이 농후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금 당장 모든 문제를 일거에 해결하려는 시도는 엄청난 모험이며 또한 일본과 미국을 횡단하는 바다를 가로지르는 간척사업 시도와 다름 없다. 알기 쉽게 설명하자면, 오늘 한곳에 둑을 쌓는 공사를 하고 내일 또 다른 곳에 둑을 쌓는 공사를 위해 바위와 돌맹이를 투척하려 해서 나가보면 어제 쌓은 둑은 사라지고 없고 바닷물 만이 출렁대는 격인데, 오늘 또 작업해 보았자 내일 이것은 사라지고 없고 내일 또 새로 시작하는 시작의 끊없음의 연속이고 결과는 공허한 그런 시도와 다름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역사를 올바로 정리하고 또한 우리의 미래를 확고히 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그 수많은 질곡을 한꺼번에 내 놓고 수 많은 이들의 비명소리만을 들으며 머리 아파할 것이 아니라, 하나 하나씩 그 줄기와 메듭을 구분하여 차분하고 순서적으로 정리해 가야 하는 것이다. 물론 그런 순서에 입각하여 정리하더라도 누락분이 발생할 수 있으므로, 그 순서를 지키며 어느 정도 무리익게 정리된 다음에 또 그것을 일괄정리하고 하는 등의 세상이치를 존중하는 그런 차분한 정리작업이야말로 우리가 가장 고통을 최소화하고 국력낭비나 비용을 최소화할 수 있는 그리고 가장 깨끗하고 명쾌하게 정리해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이 세상은 ‘정치’란 중요한 수단과 통과의례가 우리 모두에게 필요악적인 존재로 공생하고 잇는 점이 이런 간단하고 명확한 세상이치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게 발목잡고 있다.



정치하는 이들은 당장에 특정 이해관계자들이 손해를 최소화하기 위하여 모든 것을 내 놓아 핵심을 희석하려 하는 시도를 하게 되고, 이는 정치의 본질적 특성으로 항상 자리한다. 즉 친일문제에 부자유한 이들은 해방후의 역사를 들이대면 자신들의 불리함이 희석되고, 그리고 5~60년대의 문제로 불리한 이력을 가진 이들은 역시 친일문제를 들이대면 자신들의 약점이 희석되기에 이른다. 그래서 정치권에서는 모든 것을 일거에 내놓고 국민들을 혼돈하게 하는 술수를 쓴다. 그러나 정치인으로서는 이런 의도가 당연하다. 당장 자신의 정치생명을 위해서 하는 몸부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렇게 ‘정치’에 중심을 두고 모든 것이 사고되고 나면 결국 손해보는 것은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이고, 그 국민이지, 결코 정치가 손해보지는 않고 다만 정치는 그저 그대로 존재할 뿐이다. 그리고 4년 후에 정치인들의 교채가 있고 나서도 이런 현상은 되풀이 된다. 따라서 오직 정치라는 한 필요악 때문에 우리들의 가장 중요한 질병을 우리는 여직 치료하지 못하고 다만 그 상처를 반창고 속에 감춰두고 지금까지 오게 된 샘이다. 그래서 정치라는 필요악은 그대로 존재하고 또 지금에 이르고 잇지만, 그 정치에 소속된 정치인들은 그 시대가 지나고 나면 누구나 할 것 없이 다 비난의 대상이 되고, 또한 욕설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정치인들은 그같은 되풀이에서 결코 해방되지 못하고 정치라는 필요악에 종속되어 결국 자신도 후에는 그 비난의 대상이 되고 마는 것이 아이러니이자, 이 세상의 미묘한 이치이기도 하다.



그래서 역사정리는 결국 정치를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어야 하고, 정치인을 위해서도 아니어야 한다. 역사정리는 오직 국익을 위해서 그리고 백성을 위해서여야 한다. 그런 역사정리를 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1890년경부터 1953년까지의 역사에 발목잡혀 그 시대를 2100년에도 그리고 2200년에도 작금곽 같은 갈들에 종속되어 헤어나지 못할 수도 있다.



만새가 전에 역사정리를 못하면 그 피해자가 갈수록 늘어난다는 발언은 바로, 이런 것을 염두에 둔 것이며, 결국 친일문제로 도마에 단골로 오르는 이들의 후손들이 늘아만 갈 것이고, 그리고 6.25문제, 한일협정문제, 유신문제, 국보위문제 등과 연관되면서 어느 것 하나 정리되지 않고 고스란이 후손들에게 짐만을 선사할 가능성이 농후한 것이다.



또한 애석하게도 우리들은 해방후에 강대국들의 틈바구니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리고 냉전적 이념의 틈바구니에서 살아남기 위해 각자 발버둥하다보니, 우리들 선친들 그리고 우리들의 진실한 삶의 추구는 온데간데 없고 오직 이념이라는 요물에 지배당하며, 서로들 감시하고 또한 헐띁고 그리고 살아남기 위해 서로들 조심하다 보니, 할 말 하지 못하고, 또한 할말 하는 이들을 쉽게 단죄해 버리고, 그리고 오직 우리의 생존만을 위해 발버둥친 삶만이 우리 앞에 덩그러니 남아 있다. 이러다 보니 순수해야할 학자들마져도 출세를 생각하고, 신분을 생각하고, 그리고 경제문제를 생각해야 하고 또한 목숨을 생각해야 하고 그리고 자신의 자녀들을 생각해야 하는 걱정으로 해야할 일들을 결코 하지 못하고, 다만 그런 왜곡된 사회를 살다보니, 정치에도 참여하고, 그리고 각종의 이권에도 참여하면서, 결국 우리가 진정으로 해야 할 것을 게을리한 채, 지금에 이르다 보니, 지금 당장 어떤 중댛산 일을 하려 하다보니, 연구결과가 전혀 없고, 또한 주장사실이 전혀 없고, 그리고 각종의 증거만이 인멸되었다는 안타까운 비명만을 들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만새는 지금이라도 학3자들에게는 최소한 자신들이 주장할 것들을 어느 위험이 없이 안방에서 하는 것처럼 할 수 있게 보장하고 보호해 주어야 한다는 필요성을 말하게 된 것이며, 과거의 그 왜곡된 사회에서 하지 못한 일들을 지금 맘껏 하게 하여, 근현대의 우리 학자들의 창피함을 만회할 수 있게 해 주어야 한다는 뜻을 전달한 것이다.



지금은 최소한 과거처럼 말 한미디 잘못하여 철장신세 지는 시대도 아니요, 누군가가 그들을 모함하여 그들을 무조건 빨5갱이로 몰아 죽이거나 감옥에 처 놓는 일도 없을 것이고, 또한 중립을 지켰다 하여 그들이 친북용공세력이라 매도될 가능성도 없다. 지금은 오직 잘못된 것에 대한 엄격한 심사만이 있는 것이고 잘된 것에 대한 칭찬이 비록 매정할 정도로 야박할 지라도 지금 우리 학자들 그리고 사명감을 가진 연구인들은 과거의 선배들의 창피함을 만회해 주어야 할 의무가 있고, 그리고 이제는 신분을 걱정하는 그런 나태함에서 벗어나는 용기를 발휘할 그 때라고 본다.



학자들이 정치에서 무관하게 묵묵히 자신의 사명을 다할 때, 우리 국민들은 학자들을 정치인들보다 더 숭고하게 받을 것이며, 또한 우리의 부끄러운 병에 걸려 있던 해방후의 역사는 말끔히 치유될 것이라 확신되기도 하거니와, 이제 학자들의 후학들에게는 과거와 다른 페러다임을 계승하는 계기로 삼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용기의 뒤에는 우리 국익이 확신되고 또한 우리 백성들의 이익이 확신된다는 점을 우리는 각인해 둘 필요가 있다.



정치권에서는 지금 친일문제, 그리고 해방이후의 문제까지 아우르는 친일진상규명법을 올초에 제정했고, 또 지금 여당에 의해 재상정되기에 이르렀고, 그리고 노통이 어떤 이유에서 내놓은지 모르나 일단은 ‘국가보안법폐지’를 들고 나온만큼, 정치권에서는 1890년부터 1980년초에 이르는 모든 역사를 일단 사각엥글에 집어 놓었고, 그것을 우리 국민앞에 방영하고 있어서, 여하간 한국의 근현대사는 지금 뜨겁게 달궈지고 잇는 중이다. 그러나 역사는 그렇게 해서 제대로 정리된다거나 또는 우리의 바램대로 되지는 않기에, 우선 우리가 정치권에 주문하기 이전에, 학자분들부터 일단 가장 순수한 시작을 하여, 결국 정치권이 그 시작을 따르게 할 그런 사업, 그런 행동을 해야 할 시기에 이르렀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아무리 언론과 여론이 떠들어도 결국 정치는 법으로 말하고, 제도로 말하고, 그리고 선언과 발표로 말할 뿐이다. 그리고 포상과 징벌로만 해결하려 할 뿐이다. 그 부족함을 채울이는 바로 시민단체도 아니요, 오직 학자나 연구인들 뿐이다. 화해는 결국 탁월한 정치능력으로서도 할 수 있지만, 지금 당장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그 화해는 대국민의 심장에서 출발하게 하면 되는 것이다. 그 화해는 모든 상처가 표면에 나타나고 그것을 국민들이 손수 만졌을 때 가능한 것이며, 그 화해는 합리적이고도 설득력 있는 그리고 모든 이가 납득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만새는 학자분들께 일말의 희망을 걸고 싶다(그렇다고 하여 학자분들에게 그 합의점과 화해의 답까지 구하라는 주문은 아니다. 다만 사실과 가능성들을 양심껏 그리고 가능성껏 나열하여 국민들이 그것들을 모두 만지게 해 주기만 하면 된다고 본다).





2. 불라디미르 푸틴?

금번 러시아의 참상은 결국 오리를 혼돈으로 몰고 간다. 테러가 악이고 또한 바어되어야 한다는 의견은 누구를 막론하고 적극적일 것이다. 그러나 그 테러의 근본이 결국 ‘불평등’;에서 출발한 것이라고 볼 때, 그것을 방어하거나 억지하는 수단을 어느 것올 할 것인가에 대하여는 의견이 매우 분분하다.



과연 그것을 해결함에 있어서 오직 부시나 푸틴처럼 힘으로 초전박살해야 하는가? 아니면 포용과 아량으로 그 폭력을 최소화하면서 오직 불평등해소에 주력한ㄴ 것이 테러억지책의 유일한 수단인가?. 그리고 푸틴의 말처럼 어린이까지 희생시키는 이들은 결국 협상의 대상이 될 수 없고 또한 그럴 가치도 없는가?



푸틴의 말은 간단히 생각하면 이해가 간다. 그러나 좀 더 깊게 생각하면 결코 이해가지 않는 망언이다. 그리고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해 볼 때, 소련의 탄생은 결국 요즘 세상에서 말하는 그 ‘테러’로 탄생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레닌이 러시아왕정을 무너드린 것이 결국 약자들의 집합적 테러로 이룬 것이라는 점이다. 그것은 누구나 아는 바 대로 지나친 불평등에서 비롯된 것이고, 그 덕에 공산주의는 이 세상을 한동안 풍미해왔다. 그리고 러시아의 지금 정권도 결국 공산당이 모태이고 주인이다. 그 공산당은 결국 자신들의 목적달성을 위해서는 엄청난 희생이 뒤따르더라도 결국 그 희생을 감수한다고 하면서 노약자건 누구건 그 대상을 문제삼지 않는다고 했다.



그런데 이번 러시아 참사 역시 체첸이라는 곳에서 비롯되었다지만, 결국 그 테러의 대상이 러시아 국민 그것도 어린아이들이 대부분인 적지 않은 인명이었다는 점이다. 인질테러의 특성이 결국 그 인질들에 대한 목숨을 가지고 협박하여 자신들의 약함을 보완하면서 강한 상대에게서의 자신들의 목적달성을 꾀하려 하는 범죄유형이다. 그러니만치 그들 인질범들은 당연히 그 대상을 가리지 않고 가장 유리한 수단을 택하려 햇을 것이며, 그 위협이나 협박이 가장 상대방의 피부에 느껴질 수단을 택할 것이다. 그것은 상식이다. 따라서 인질범들은 당연히 어린이건 노약자건 이를 가리지 않는다는 것이 상식이고 또한 당연히 그것이 예상되는 것이다. 따라서 푸틴의 어린이를 죽이며 인질로 삼는 이들은 인간이하이기에 협상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은 다만 자신의 행동에 대한 변명과 핑계에 다름 아닌 간단한 속임수일 뿐이다.



최소한 그 많은 인질에 대한 국가로서의 배려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내하여 최소한의 인명을 구출하는데 중점이 두어져야 하는 것이지, 당장의 해결을 위해 당장 행동하여 상당한 희생을 감수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따라서 푸틴은 무조건 러시아 그리고 세계국민들에게 고개숙여야 일개 강국의 원수다운 행동이다. 그 외의 어떤 변명도 어떤 이유도 물문해야 한다. 그것이 희생돵한 이들에 대한 우선의 최선의 예의다.



어쨌든 요즘 우리는 과거를 잊지 말자는 말을 자주 한다. 그 이유는 역시 과거를 망각함으로써 자신들의 본래의 초심이 자연스레 왜곡되고 변질되기 때문이다. 러시아공산당이 억압받고 착취당하는 노동자농민을 위한다는 취지의 혁명의 초심은 약자를 위한 것이었지만, 얼마 못가 그 초심은 뭍혀버리고 힘의 지배, 그리고 역시 계급적 지배로 또 다른 약자를 양산해 낸 것, 그리고 최근의 푸틴의 발상과 발언은 역시 초심을 망각햇기 때문이고, 과거를 제대로 기억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공산주의가 생겨나고 판친 것은 결국 ‘불평등’이 심했기 때문이고, 그 불평등당하는 이들의 숫자가 너무나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찌됐건 그 불평등이 완화되고 어느 정도 해소되자 공산주의의 이념은 수많은 민중들로부터 그 필요성이 의심받게 되어 결국 지금에 이른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지금 또 그런 과거가 망각되고 공공연히 불평등이 방치되려 하고 또한 묵인되려 한다는 것이며, 그 변형된 결과적 현상으로 ‘테러’라는 것이 등장하며 이 세상을 풍미하려 하는데도, 오직 그 테러는 힘으로 억짛해야 한다는 논리가 먹혀들어가고 있다.



물론 테러가 불평등에서 시작되엇다 하여 그것을 무조건 용인하면서 비폭력적으로 불평등적 요인만을 해소하면서 억지할 수는 없다. 가끔 폭력적 억지수단도 동원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 테러는 안하무인이 되고 또한 불평등 해소만으로도 억지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위험분산(포트폴리오 구성)에 있어서 폭력적 억지수단은 최소한에 그치게 준비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근본원인인 불평등 해소에 중점을 두어야 하고, 또한 얼마간의 비용이 소요되더라도 그 관심의 끈을 놓지 말아야 한다. 그와 동시에 간혈적 최소한의 수단으로서 폭력적 억지수단이 동원되어야 한다. 이것이 테러억지의 가장 정석적 해답이다.



그런데, 미국의 부시대통령이 테러억지를 위해 힘으로 제압할 것을 천명하면서 행동에 옮기고 잇는 시점에, 그 행동에 일정한 간격을 두었던 러시아가 테러억지를 위해 기다림의 여유도 없이 수많은 희생을 감수하면서 급하게 테러진압을 하면서 국민앞에 내세운 말이 ‘얼런이마져 죽이며 그들을 협박하는 이들과 대화할 수 없다’고 한 발언은 매우 부적절하다 아나힐 수 없다는 것이다. 무조건 국민앞에 사죄했더라면 그나마 불평등을 느끼는 자국국민들에게 최소한의 위로는 되었을 진데, 그런 위로의 처방마져 무시되는 러시아 국민은 처량할 수 밖에 없을 것이란 안타까움만이 감돌 뿐이다.



결국 테러는 결코 강자가 약자에게 하는 수단이 아니다. 테러는 약자들이 강자를 대상으로 하는 최후의 수단일 뿐이다. 이 점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강자가 약자에게 하는 폭행은 다만 폭행어기나 위압일 뿐이지 테러는 아니다.



2004.9.10 만새 올림